항목 ID | GC08700471 |
---|---|
한자 | 密陽 孝子 李申 旌閭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 산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하여주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974년 - 밀양 효자 이신 정려비 보수 |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392년 - 이신 사망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9년 8월 3일 - 밀양 효자 이신 정려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81호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6월 29일 - 밀양 효자 이신 정려비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현 소재지 | 밀양 효자 이신 정려비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 산1 |
원소재지 | 밀양 효자 이신 정려비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 산1 |
성격 | 정려비 |
관련 인물 | 이신 |
재질 | 규서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33㎝[높이]|84㎝[폭] |
소유자 | 재령이씨 대종회 |
관리자 | 재령이씨 대종회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81호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효자 정려비.
[개설]
밀양 오현(五賢) 중 한 사람인 계은(溪隐) 이신(李申)은 고려 공민왕 때 경기도 개성에서 내려와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조음리에 정착한 사재령(司宰令) 이일선(李日善)의 장남으로 공민왕 때 효렴(孝廉)으로 뽑혀 입신한 후 도만호(都萬戶)를 지냈다. 사헌부 지평에 재임할 때 간관 김진양(金震陽), 강회백(姜淮伯) 등과 함께 고려 왕조를 폐하고 조선을 세우려 하였던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의 죄상을 탄핵하다가 박해를 당하여 귀향 가는 도중에 장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신의 효행은 『밀양읍지(密陽郡邑誌)』뿐만 아니라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전국의 읍지를 모아 놓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실렸으며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도 포함되어 대표적 효자로 일컬어졌다.
[건립 경위]
이신은 일찍이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였는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여묘를 하는 3년 간 허리띠를 풀지 않고 애통해하다가 쇠약해져서 뼈가 드러날 정도였다고 한다. 모든 상례 도구는 여러 형제와 함께 마련하지 않고 손수 부담하였고 스스로 흙을 지어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조선 태종 때에 와서 이신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가 세워졌으며, 정려비가 세워진 마을 이름도 효자동으로 일컫게 되었다.
[위치]
밀양 효자 이신 정려비는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국도 제25호선을 따라 경상남도 창원 방면으로 15㎞ 가면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나온다. 마을길을 따라 2㎞ 정도 가면 효자문마을 입구 길가에 정각이 있다.
[형태]
밀양 효자 이신 정려비는 1974년에 보수공사가 실시되어 현대적 요소가 많이 가미되면서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다. 현재의 정려각은 벽돌조 기단 위에 2개의 방형 돌기둥으로 세우고 옥개석을 올린 형태이다. 명정(銘旌)은 한 몸의 판석으로 돌기둥의 상부 즉 옥개석 하부에 끼워 넣었으며, 높이 133㎝, 폭 84㎝의 크기이다.
[금석문]
두전에 ‘효자지평이신지려(孝子持平李申之閭)’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하부와 배면에는 정표자인 이신의 행실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현황]
정려각 우측에 1974년의 보수 내용을 기록한 ‘계은이선생보수기실비’가 설치되어 있으며, 밀양 효자 이신 정려비와 함께 적벽돌로 쌓은 담장으로 보호하고 있다. 1999년 8월 3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81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