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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81
한자 禹性傳
영어공식명칭 Woo Sŏng-jŏn
이칭/별칭 경선(景善),추연(秋淵),연암(淵庵),충강(忠康),추의장(秋義將),추의사(秋義使)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양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2년연표보기 - 우성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61년 - 우성전 진사시 입격
활동 시기/일시 1564년 - 우성전 승려 보우(普雨)의 참수를 건의
활동 시기/일시 1568년 - 우성전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72년 11월 29일 - 우성전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6년 3월 - 우성전 수원현감으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81년 2월 9일 - 우성전 수원부사에서 파직
활동 시기/일시 1584년 - 우성전 강화부사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88년 7월 5일 - 우성전 선조에 의해 어사(御史)로 발탁되어 지방에 파견
활동 시기/일시 1591년 - 우성전 파직 후 고향인 수원으로 퇴거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우성전 추의군(秋義軍)을 결성하고 강화도에 들어감
활동 시기/일시 1592년 7월 30일 - 우성전 인천도호부사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2년 9월 9일 - 우성전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2년 9월 24일 - 우성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93년 7월 19일연표보기 - 우성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88년 4월 17일 - 우성전 이조참판으로 증직
추모 시기/일시 1791년 1월 30일 - 우성전 이조판서로 가증(加贈)
추모 시기/일시 1793년 12월 21일 - 우성전 충강(忠康) 시호를 받음
출생지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추연우성전묘역(우하영묘역포함) -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산 78-1 지도보기
성격 문신|의병장
성별 남성
본관 단양(丹陽)
대표 관직 홍문관 부수찬|홍문관 수찬|강화부사|수원현감|성균관 대사성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연암(淵庵)이다. 조선의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낸 우인열(禹仁烈)의 7대손으로, 증조부는 우환(禹桓), 조부는 승사랑(承仕郞)을 지낸 우성윤(禹成允)이다. 우성전은 함종현령을 지낸 우언겸(禹彦謙)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 연안 김씨는 김석린(金石鱗)의 딸이며, 형 우심전(禹心傳)과 동생 우도전(禹道傳)이 있다. 아버지 우언겸의 친형인 사옹원봉사 우준겸(禹俊謙)의 양자가 되었다. 부인은 부제학을 지낸 허엽(許曄)의 딸 양천(陽川) 허씨(許氏)이다. 증조인 우환 대에 이르러 수원부 호매절면[현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으로 이거하였다.

[활동 사항]

우성전(禹性傳)[1542~1593]은 이황의 문하에서 유성룡·김성일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약관의 나이로 진사시에 입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64년에는 유생의 신분으로 당시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던 승려 보우(普雨)의 처벌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27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의 검열·봉교, 홍문관 부수찬·수찬을 지내었다. 1576년(선조 9) 수원부가 강상(綱常)의 변으로 인하여 현으로 강호(降號)되자, 선조는 우성전의 요청을 받아들여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수원현감으로 있으면서 적폐를 일소하고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도 세웠으며, 수원현 역시 도호부의 호칭도 회복할 수 있었으나, 1581년(선조 14) 공무보다는 노모의 봉양에 더욱 힘쓴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한양으로 돌아와, 홍문관 수찬·전한, 사헌부 장령·사옹원 정·성균관 사성 등을 역임하고, 1584년 강화부사로 부임하였다.

우성전은 동인을 주도한 인사였으나, 서인 세력에 대하여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하여 보다 강경한 입장에 있던 대북(大北) 계열과는 대립하고 있었다. 1591년(선조 24)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이 건저의(建儲議) 사건으로 실세하였을 무렵, 그에 대한 논박을 만류하였다가 오히려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파직된 이후 고향인 수원으로 돌아와,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기도에서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추의군(秋義軍)이라고 부르면서 강화도에 들어가 김천일(金千鎰)의 의병과 합류하였다. 우성전은 의병장으로서도 상당히 활약하였으며, 그의 부대는 2~3천여 명의 세력을 형성하였다. 황해도와 경기도에서 작전에 다소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으나, 1593년 6월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하자, 여러 관군 장수들과 함께 추격하여 부평에 이르렀다. 7월 19일 지병이 악화되어 부평(富平)의 노상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술로는 『계갑일록(癸甲日錄)』과 이황의 언행을 기록한 『추연수록(秋淵手錄)』이 있으며, 「이기설(理氣說)」과 「역설(易說)」을 지었다. 1583년 6월부터 1584년 8월까지의 일기인 『추연선생일기(秋淵先生日記)』가 있다.

[묘소]

묘소은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산 78-1에 있다. 부인 양천 허씨(陽川 許氏)와 함께 매장된 쌍분(雙墳)의 형태이다. 봉분 앞에는 묘표·상석·향로석이 있고, 하단에는 망주석만 1쌍이 있으며, 석인은 조성하지 않았다. 묘표는 일반적인 원수방부형(圓首方趺形)이고, 17세기의 형식을 보인다. 묘역의 입구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1878년(고종 15)에 건립한 것이다. 약 50m 떨어진 곳에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우하영(禹夏永)의 묘소가 있다. 2003년 4월 21일 '추연 우성전 묘역(우하영 묘역 포함)'으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121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788년 이조참판으로 증직되고, 1791년에는 이조판서로 가증(加贈)되었다. 1793년에는 '충강(忠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순조 연간 『승정원일기』에는 우성전문강공(文康公)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밖의 다른 기록에는 충강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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