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6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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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炳雲 |
영어공식명칭 | Song Byeong Un |
이칭/별칭 | 손병운(孫丙雲)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성환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송병운 의병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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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09년 - 송병운 사망 추정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송병운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출생지 | 율어면 - 전라남도 보성군 율어면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황두일 의진 참모장 |
[정의]
개항기 해남 일대에서 활동한 항일 의병.
[개설]
송병운(宋炳雲)[?~1909]은 전라남도 보성군 율어면 출신으로, 해남에 거주하며 항일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손병운(孫丙雲)으로도 알려져 있다.
[활동 사항]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이후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본은 항일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1909년 9월 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라는 명칭으로 항일 의병의 최후 격전지였던 전라남도 지역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송병운은 이 당시 해남 일대에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던 의병이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손병운이 황두일(黃斗一) 의병장의 참모장으로 해남 일대에서 활약하던 중 일본군의 추격으로 1909년 8월 체포되어 순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09년 10월 19일 경무국장 이름으로 된 『폭도에 관한 편책』에도 “손병운(孫丙雲)은 황두일 참모장”으로 명기되어 있다. 또한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에는 당시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가 주소이며, 나이가 33세인 동명 인물의 기록이 남아 있다.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은 1909년 12월 17일에 작성된 것으로 폭동강도 죄명으로 징역 7년형을 주문한 내용이다. 이를 토대로 보면 송병운은 호남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8월에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일본이 1910년에 발행한 『남한폭도대토벌 기념사진첩』에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의병 16인의 단체사진이 실려 있는데, 단체사진의 앞줄 좌측 인물이 송병운으로 추정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91년 대한민국 정부는 송병운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