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제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853
한자 閔濟章
영어공식명칭 Min Jejang
이칭/별칭 회백(晦伯),삼금당(三錦堂),충장(忠莊)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바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71년연표보기 - 민제장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05년 - 민제장 무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11년 - 민제장 통신사 일행과 함께 일본 파견
활동 시기/일시 1728년 - 민제장 안성군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28년 - 민제장 황해도병마절도사 임명
몰년 시기/일시 1729년연표보기 - 민제장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96년 - 민제장 화담사 배향
묘소|단소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구수리
사당|배향지 화담사 - 광주광역시 서구 화운로 156번길 17-8[화정동 718-23]지도보기
성격 무신
성별
본관 여흥(驪興)
대표 관직 황해도병마절도사

[정의]

조선 후기 전라도 광주 출신의 무신.

[가계]

민제장(閔濟章)[1671~1729]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회백(晦伯), 호는 삼금당(三錦堂)이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문경공(文景公) 민영모(閔令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민담령(閔聃齡)이다. 아버지는 민후경(閔後慶)이고, 어머니는 함안박씨(咸安朴氏)이다. 네 번 결혼해 부인이 넷인데, 전주최씨(全州崔氏), 남양홍씨(南陽洪氏), 당진한씨(唐津韓氏), 덕수이씨(德水李氏)이다. 전주최씨만 세 명의 딸을 낳았다.

[활동 사항]

민제장은 1671년(현종 12) 전라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민제장은 키가 9척(尺) 장신이었으며, 힘이 아주 세어 5석(石)의 활을 당길 정도로 무예도 탁월하였다. 1705년(숙종 31)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1711년(숙종 37) 통신사 조태억(趙泰億)[1675~1728], 임수간(任守諫)[1665~1721] 등을 따라 일본에 가던 중, 7월 22일 대마도에서 풍랑을 맞아 배가 표류하는 위기에 빠졌는데, 직접 바다에 뛰어들어 배를 끌고 나와 일행을 구출하였다. 일본을 다녀온 이후 무산부사(茂山府使)가 되었으며,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제주목사(濟州牧使), 전라병사(全羅兵使), 충청병사(忠淸兵使) 등을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에 안성군수가 되었는데, 이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람을 모집하여 적세(賊勢)를 정탐하여 순무(巡撫)에게 알렸으며, 선봉이 되어 동생 민제만(閔濟萬)과 함께 싸워 적을 거의 섬멸하였다. 그 공으로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그해인 1728년 황해도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로 부임하였고, 이듬해인 1729년 6월 7일 사망하였다.

[묘소]

민제장의 묘소는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구수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민제장은 1796년 광주향교(光州鄕校) 유회소(儒會所)의 발의로 화담사(花潭祠)에 배항되었다. 화담사는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여 충절을 지킨 정희(鄭熙)와 그의 아들 정초(鄭招), 손자 정수충(鄭守忠) 3대와 정오도(鄭吾道)·민제장(閔濟章) 등 5위(位)를 배향하는 사당으로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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