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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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州靑年同盟 |
영어공식명칭 | Gwangju youth un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손영님 |
[정의]
1927년 11월 26일 광주광역시에서 결성된 청년 운동 연합체.
[개설]
1927년 제 3차 조선공산당의 성립과 함께 사회주의 인식은 더욱 팽창되었고, 시대를 변혁하는 주체로서 상정된 대상은 특정 노동자 계급만이 아니라 대중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인식 하에 청년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1927년에 청년단체의 연합조직인 광주청년동맹이 창립되었다.
[설립 목적]
1920년대 다양한 청년단체가 결성되면서 이를 통합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조직을 정치화하려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어 설립되었다.
[변천]
광주청년동맹은 1927년 광주 지역에서 청년단체의 연합조직의 필요성을 바탕으로 결성된 단체이다. 1928년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으로 활동 인사들이 검거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광주청년동맹은 경쟁 관계였던 광주청년회 및 종교적 청년단체들이 가입하여 통일적 조직으로 출범하였다. 광주를 비롯해 전라남도의 함평, 영광, 강진 등 여러 군에서도 청년동맹이 결성되었고, 기존 청년회는 자진 해산하여 자연스럽게 흡수되었다.
광주청년동맹은 면에 지부를 설치하려 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간부들은 당과 공청, 전청련, 신간회 등에서 활동했지만 광주청년동맹 자체의 독자적인 사업의 성과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광주청년동맹 간부인 강해석과 장석천이 ‘독서회 중앙본부’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청년·학생 등의 의식화 교육 및 일상적 투쟁을 지도하는 형식으로 활동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광주청년동맹은 민족협동전선을 표방한 신간회와 연대하는 등 통일적 청년운동을 전개했지만, 지도부의 분열, 분파투쟁 등으로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한 점이 한계로 남는다. 결국 1928년 2월부터 시작된 제 3차에서 4차에 이르는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으로 활동 인사들은 검거되었고, 조직은 붕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