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6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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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妓生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임혜영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춤 및 풍류로 참석자들의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여성.
[개설]
기생은 교양 있는 지식인이었다. 기생들은 노래·춤·악기·학문·시·서화에 능숙하고, 말씨나 행동이 고상하여야 했다. 장악원[조선 시대에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 들어가 몇 년에 걸쳐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했다. 교육은 일정 나이가 지나거나, 출산 등의 이유로 은퇴한 퇴기들이 주로 맡았다. 기생은 선배인 퇴기로부터 기본적인 춤과 노래, 시조 등을 배웠으며, 높은 관리를 대하는 예절도 배웠다.
기생은 대개 소녀 때부터 교육을 받으며, 15세가 되면 성년식을 치르고 본격적인 기생의 업무에 종사하게 된다. 기생은 보통 정년이 50세였다. 20세가 넘어도 활동하는 기생도 있었다고 하지만 20대 중반만 해도 이미 노기로 취급받았다.
조선 시대의 기생은 법적 신분으로는 양민[다만 관노로서 기생이 된 경우는 천민]이었지만, 직업의 특성상 생활은 중산층 이상의 수준을 향유했고, 사회적으로는 천민으로 대우받았다.
기생들은 천민이었지만, 주로 양반을 상대했으므로 격에 맞게 가무(歌舞)·시(詩)·서(書)·화(畵)의 재능과 지조(志操)·지략(智略)·의협(義俠)의 덕목을 두루 갖춘 교양인이었다.
기생이 머무는 곳인 기방에는 원칙적으로 양반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다만 풍류를 즐기기 위해 기생들을 양반이 노는 곳에 불러올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일부 양반과 왕족들은 기생집에 자유롭게 출입했고, 조선 후기에는 중인과 평민, 상인들도 기방에 자유롭게 출입하였다.
[기생 조합의 설립과 변천]
일제는 식민지 이전인 1908년 기생들의 관리를 장악원에서 경시청으로 이관하고 경시청령 제5호 ‘기생 단속령’을 발포하였다. 이에 따르면 기생으로 영업하려면 경찰청에 신고해서 허가증을 받아야 하고, 경찰청의 지시에 따라 기생 조합을 설립해야 했다.
1915년을 전후하여 기생 조합은 권번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권번은 군산에 두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군산 권번이고, 또 하나는 군산 소화 권번이다. 군산 소화 권번의 경우, 입교하면 4년 과정으로 시조·가곡·판소리·춤 등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군산에서는 권번에서 가무와 글을 익힌 기생들이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요릿집이었던 명월관과 근화각에서 모임의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하였다.
[소화 권번의 기생 장금도]
장금도는 일제 강점기 군산에 있던 권번 중 하나인 군산 소화 권번에 소속된 기생이었다. 12살 때 권번에 들어가서 소리를 먼저 배우고 춤을 배웠다. 권번에서 4년간의 교육을 마친 장금도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기에 소리와 춤으로 이름을 날리던 뛰어난 명기였다. 특히 장금도는 명주 수건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추는 민살풀이춤을 스승 도금선[1907~1979]으로부터 사사하였다. 장금도가 추는 춤은 권번 시절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