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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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魯炳熹 |
영어음역 | No Byeonghui |
이칭/별칭 | 명중(明仲),호정(壺亭)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대흥리 31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정성미 |
성격 | 의원|의병|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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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대흥리 31 |
성별 | 남 |
생년 | 1850년 9월 22일 |
몰년 | 1918년 3월 28일 |
본관 | 함평 |
대표경력 | 전의 |
[정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고창 출신의 의원, 의병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함평(咸平)이며, 자는 명중(明仲), 호는 호정(壺亭)이다. 1850년(철종 1) 9월 22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대흥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노병희(魯炳熹)는 1888년(고종 25)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1903년(고종 40) 전의(典醫)가 되었다. 1905년(고종 42)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구국 투쟁에 일신을 바치기로 결의하고, 1906년(고종 43) 최익현 의진(義陣)에 참가하였다. 이후 군자금을 모집하고 모금된 한전(韓錢)을 직물로 바꿔 활용하게 하였다. 또한 포고문의 인쇄 제작과 배포를 도왔다. 한편으론 최익현이 압송되자 보석 운동을 벌였으며, 한의(漢醫)로서 대마도에까지 가서 치료에 임했으나 최익현이 사망하자 영구를 부산 초량까지 운구하였다. 1918년 구국 활동을 계속하다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