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8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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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煥容 |
영어음역 | Jo Hwanyong |
이칭/별칭 | 복행(福行),환복(煥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채수환 |
[정의]
조선 후기 김제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김제(金堤). 자는 복행(福行), 휘(諱)는 환복(煥福). 아버지는 조익성(趙翊成)이다.
[활동사항]
조환용(趙煥容)은 1823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났다. 그가 활동하던 조선 후기에는 지방의 납세 물품을 납세자들이 직접 지정된 창고가 있는 데까지 운반하게 되어 있었다. 배를 이용하여 물품을 운반하는 군현민은 그나마 고통이 덜하지만 김제와 금구, 만경, 태인, 고부, 정읍 지역 주민들은 육로로 군산까지 물품을 운반해야 했기에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 대해 지방 관원들은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힘든 사정을 듣기 위하여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였으나, 수비 관원의 제지가 심하여 감히 신문고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에 조환용은 위험을 무릅쓰고 몇 통의 상소문을 가지고 친척 한 명과 상경하여 신문고를 치려다가 수비 관원에 발각되어 혹독한 곤욕을 당하고 상소문마저 빼앗겼다. 그러나 필사적인 노력 끝에 신문고를 두드리게 되었고, 상투 밑에 숨겨 둔 상소문을 궐 안으로 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김제시 죽산면 해창에 창고가 세워지게 됨으로써 김제, 금구, 만경, 태인, 고부, 정읍 등 6개 군현 지방민이 큰 고통을 면하게 되었다.
[상훈과 추모]
1878년 조환용이 세상을 떠나자 주민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해 4월에 ‘유학조환용영세불망비(幼學趙煥容永世不忘碑)’라고 쓰인 송덕비를 세웠다. 송덕비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위험한 형벌을 피하지 아니하고 주민의 사정을 상부에 전하였다. 빈자를 구하고 도와주니 김제시민은 다 그 덕을 입었도다. 읍리 사람은 그 덕을 칭송하여 세 바칠 때마다 말하여 이 밝은 덕을 비에 새겨 그 공을 길이 보존하리라. 길이길이 잊지 않으리[不避斧鑽 陳達隱情 恤貧狹悔 能被碧地 德訟邑里 貢物道程 鉻功一憲 永世不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