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1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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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加平儒敎文化資源, 李廷龜遺跡 |
영어공식명칭 | Confucian cultural resources in Gapyeong, Lee Jung-gu's remains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 산115-1 |
시대 | 조선시대/현대 |
집필자 | 주혁 |
[정의]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위치한 이정구(李廷龜)를 비롯한 연안이씨 가문의 유교문화 유적.
[개설]
이정구 유적은 가평군 상면 태봉리의 이정구 묘역을 비롯하여 연안이씨(延安李氏) 가문과 관련된 유교문화의 원형과 형식을 간직한 유적이다. 조선의 전 과정은 한마디로 유교이념의 강조, 제도 및 법제화, 그리고 각종 정책이 실현되는 흐름으로 관철되었다. 이를 통해서 양반을 비롯한 전 계층이 유교를 수용하고 삶의 형식과 내용에서 이를 준수하고 내면화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사서삼경을 경전으로 하는 유교는 ‘유학(儒學)’을 종교 관점에서 이르는 말이고, 유교이념이란 충효와 ‘인의예지신’을 구현하며 새로운 이상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는 일체를 의미한다. 삼강오륜을 덕목으로 삼아 생활양식과 주택 구조까지 영향을 미친 유교적 가치관은 조상숭배사상, 내외사상에 의한 남녀유별, 장유유서, 신분제도에 의한 상하 계층의식 등을 통해 심화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전 계층의 생활과 내면까지 파고드는 조선 중기 이후 더욱 두드러진다. 가평군 곳곳에서도 조선시대 500년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문관, 무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물의 묘역과 사당 및 사우, 고문서 등이 전한다.
많은 유교문화와 유적 중 월사(月沙) 이정구[1564~1635]를 비롯하여 연안이씨에 주목하는 이유는 관료와 문장가로서 존경받은 이정구의 삶, 대제학을 연이어 배출했던 양반가로서의 위상, 묘와 신도비, 사당, 정문(旌門)과 비각 등 수백 년에 걸친 각종 유적의 분포, 그리고 유교이념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집과 월사집장판각 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정구의 묘역이 들어선 이후 연안이씨의 집성촌이 정착, 확산되는 역사적 변화과정도 확인된다. 이정구를 비롯한 연안이씨의 문화유적은 가평을 대표하면서 또한 상징적인 유교문화 자원으로 자랑할 만하다는 것이다.
[관료로서의 이정구 생애]
이정구는 호가 월사(月沙),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으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1415~1477]의 5대 손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재질을 보여 8세에 벌써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를 차운(次韻)할 정도였다고 한다. 1590년(선조 23)에 병과에 급제한 후 1592년에는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세자에게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는 설서(設書)에 올랐다. 이듬해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을 강론하였는데 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601년(선조 34)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뒤에 대제학에 올랐다. 실무와 문장 모두에서 인정을 받아 병조·예조·형조 판서 등 6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면서 큰 족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군국의 방책을 정비하고, 국가 재정을 튼실하게 하는 각종 정책을 실행하여 백성의 고충을 줄이는 데 전념하였다. 1628년(인조 6)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을 지냈다. 그의 명성은 후대에도 이어져 사망한 지 120년이 지난 1754년(영조 21)에 특명으로 공이 있는 인물의 신주를 영원히 모시는 ‘부조전’을 하사 받을 정도였다. 특히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어전통관(御前通官)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을 접대할 때 조선 조정을 대표하여 전면에 나선 경우가 많았다. 명나라를 네 번이나 다녀오는 등 외교적 소임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던 인물이다.
[이정구의 문장과 국내외 평가]
이정구는 신흠(申欽)·장유(張維)·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 중기 한문학 4대가로 불린다. 월사는 어려서부터 탁월한 문재를 보였다. 이른 나이에 승전보시, 진사시를 거쳐 문과에 합격하자 조선 초기 이석형의 문한을 이어갈 문재가 출현했다고 가문 모두가 기뻐하였다. 월사의 문장은 나라에 위기가 닥쳤을 때 더욱 두드러졌다. 월사는 조선이 일본과 거병해 명나라로 쳐들어간다는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에 적극 대응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조선의 조정은 변무주문(辨誣奏文)을 작성한 월사의 글에 주목하여, 월사를 참판으로 승진시키면서 부사 자격으로 명나라에 파견하였다. 월사의 조선국변무주문은 조선의 친명정책과 함께 정응태의 무고에 일일이 논박하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명나라 황제를 움직여 정응태에게 벌을 내리고 조선에 위로의 글을 보내는 성과로 이어졌다. 월사의 예리한 현실인식과 탁월한 문장이 집약된 1598년(선조 31)의 변무주문은 명문으로 애송되는 한편, 명나라에서 월사에게 ‘선생’이란 칭호를 부여할 정도로 인정받았다. 그 후 명나라에서 조선의 사신을 보면 월사의 안부를 묻곤 하였고, 병자호란 당시에는 포로 중 월사 가문의 사람을 골라 방면할 만큼 신뢰를 보였다고 한다.
이정구의 문장에 대해서 명나라의 양지원(梁之垣)은 호탕하고 세속의 때가 없으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문장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한편 장유도 그의 문장에 대해 내용이 알차고 세련되면서도 신속하고 정확한 창작능력을 인정하였고, 정조 역시 그의 문장을 높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독창성을 중시하는 문학적 측면보다는 이정구가 평소 강조한 ‘도문일치론(道文一致論)’의 실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도를 실현하고 표현하는 도구로서의 문장이라는 세계관에 입각한 그의 일관된 삶과 문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월사를 구국의 문장가로 인정한 당대인들의 평가는, 자신의 삶과 문중을 빛냈을 뿐만 아니라 종묘와 사직을 구한 그의 삶 전체에 대한 예우와 존중의 표현일 것이다. 사후 그에게 내린 ‘문충(文忠)’이란 시호는 문장으로 나라에 헌신하여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친 월사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월사 가문]
월사는 문장으로 연안이씨(延安李氏) 가문을 격상시킨 주인공이다. 월사의 4대조 이석형은 조선 초기 3장원[생원·진사시·문과 장원]의 기록을 세운 인물로 세종에서 성종 연간에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런데 월사는 이석형과 달리 대제학에 올랐고, 이후 이명한과 이일상으로 이어지는 3대제학 배출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3대제학 배출은 영조 때 풍산김씨(豐山金氏) 가문 외에는 나오지 않을 정도로 드문 가문의 영광이었다. 월사 사망 이후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급습에 따른 순절 혹은 전염병으로 일가 중에 5명이나 죽는 가문의 위기도 있었다. 전란이 진정되고 월사의 묘를 가평으로 이장하면서 안정을 찾은 월사 가문은 다시 일어나 문한(文翰)의 가통, 즉 대대로 글과 글씨의 재주가 있는 집안을 이어갔다. 월사의 장자 이명한은 여러 벼슬을 거쳐 대제학에 올랐고 시조문학에도 큰 자취를 남겼으며, 차자 소한 또한 형조참판에 오르는 등 명가의 저력을 발휘하였다.
월사 가문에서 인상적인 존재가 ‘8상’이다. 월사의 두 아들에게 각각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상’자 돌림이라 ‘8상’으로 불렸다. 명한의 아들은 일상·가상·만상·단상이고, 소한의 아들은 은상·홍상·유상·익상이었다. 월사의 장손이자 맏형인 일상은 문과에 합격한 후에 대제학이 되어 3대제학의 가통을 완성하였다. 일찍 죽은 가상과 만상을 제외하고, 8상은 관운도 만개하여 은상·홍상·유상·익상 모두가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일상·단상·은상·익상에게는 시호가 내릴 정도로 큰 업적을 남겼다. 이렇듯 월사 가문은 큰아들 이명한, 큰손자 이일상과 더불어 조선 최초의 3대제학이라는 문형(文衡)의 길을 트기 시작하여, 조선 말기까지 수많은 후손들이 학자로서 인정받거나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역임하는 등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묘역]
이정구의 묘역은 가평군 상면 태봉리 산 115의 1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79호이다. 묘는 부인 권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아랫부분에는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우에는 동자상·망주석·문인석이 각각 1쌍씩이 있다. 묘역 초입 정문(旌門)을 지나 보이는 현재의 묘역은 선영인 용인 문수산에 있던 묘를 옮겨와 만든 것이다. 큰 아들인 이명한의 꿈에 월사가 나타나는 등 여러 번의 암시가 있어 장소를 오랫동안 물색한 끝에 장례를 치르고 4년 뒤에 현재의 위치로 분묘 이장을 했다고 한다. 이정구와 아들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손자 청호(靑湖) 이일상(李一相) 등 3대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묘역 입구에는 이정구를 배향하는 경덕사(景德祠)가 있다. 묘역 좌측의 삼세비각(三世碑閣) 안에는 신도비가 3기 있는데, 좌측이 아들 명한, 우측에 손자 일상의 비가 있다. 월사 신도비는 김상헌(金尙憲)의 글에 이경석의 글씨로 1656년(효종 7)에 세운 것이고, 묘지는 이식, 묘표는 장남 명한이 찬하였다. 이명한 신도비는 김상헌이, 이일상 신도비는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것이다.
[월사 문집]
월사 문집은 68권 22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정구의 문인인 최유해(崔有海)가 편간한 것이다. 월사 문집의 간행을 위한 목판본은 월사집장판각(月沙集藏板閣)에 소장되어 있는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3호이다.
목판본은 모두 947판 77권 22책으로 이루어졌다. 장판각에는 월사 외에 손자 은상(殷相) 동리공 문집 목판본과 5세손 천보(天輔) 진암공 문집 목판본도 함께 있다. 월사의 목판본은 첫 간행본이 병자호란 때 소멸된 후, 1688년(숙종 14)에 손자 이익상과 증손자 이희조가 중간한 것이다. 원래는 대구광역시 용연사에 있다가 1928년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옮겼다가, 후손들이 1987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장판각 내부의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랜 세월 속의 역사 향기가 가득한 목판본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월사를 비롯하여 연안이씨의 명성을 이은 문장가들이 남긴 목판본은 조선 유교문화의 전범임과 동시에 이를 보존하고 지킨 후손들의 경외감이 더해진 산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