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4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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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北面赤木里反共鬪爭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혁 |
전개 시기/일시 | 1950년 7월 15일 - 반공투쟁을 위한 의혈대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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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950년 7월 19~20일 - 북면 적목리 반공투쟁 |
발생|시작 장소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
종결 장소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
성격 | 반공투쟁 |
[정의]
6·25전쟁 때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에서 전개된 반공투쟁.
[개설]
가평군 북면 적목리와 인근 지역에서 인민군의 점령 시기와 1951년 1·4 후퇴를 전후한 시기까지 의혈대와 결사대, HID대원 등의 다양한 반공투쟁이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삼거리에 있는 논남기마을과 임산(林山)마을에서 1950년 7월 15일 반공투쟁을 위한 의혈대가 조직되었다.
[경과]
의혈대는 임산마을에 ‘논남청년자위대’라는 허위 간판을 내걸고 붉은 완장을 차고 다녀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이들은 1950년 7월 19일과 20일에 마을 자위대원 5명을 살해하였고 좌익 활동을 한 사람을 생포, 처단하는 활동을 하였다. 8월 초에 이르러 노획한 무기는 소련제 장총 20여정, 따발총 8정, 수류탄 30여 개에 달했다.
의혈대와 결사대로 활동한 이들은 임산과 논남기 등 명지산 일대에 국군 1개 중대가 있다는 낭설이 퍼질 정도로 소수지만 큰 전적을 남겼다. 이로 인해 가평내무서에서는 인민군 2개 중대 병력 이상이 동원되기까지 하였다. 9·28 서울수복이 임박한 어느 날 인민군 1개 소대가 귀목고개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혈대는 고개 정상에 지뢰 2개를 매설하여 폭발시켰다. 이 폭발로 인민군 20여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지만 후미에서 따라오던 인민군의 총격으로 의혈대원 2명이 전사하였다.
한편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미처 피하지 못한 13명의 HID대원들이 가평군 북면 적목리 계곡에 숨어 있었다. HID대원들은 창 28개로 무장하고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을 생포, 처단하였다. 이들은 후에 의혈대에 합류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1951년 1·4후퇴 때 의혈대원과 결사대원은 국군 2사단을 따라 경북 영양군에서 3개월간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한 후 다시 가평으로 돌아와 공비 토벌에 나섰다. 특히 청계산에 공비 출현 소식을 접한 대원 전원이 상판리 귀목마을 고비골을 기습하여 공비 5명을 사살하고 각종 무기를 노획하였다.
[결과]
가평군 북면 적목리와 인근 지역에서 전개된 반공투쟁은 희생이 컸지만 대치하고 있는 인민군이 위협을 느낄 정도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의의와 평가]
가평군 북면 적목리 일대에서 전개된 반공투쟁은 인민군 점령지에서의 활동과 1·4후퇴를 전후로 공비 토벌 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반공투쟁은 이념의 장벽과 분단의 깊은 상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