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1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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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The Origin of Jimyo-d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석배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9년 - 「지묘동의 유래」『문화공간 팔공산과 대구』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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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3년 - 「지묘동의 유래」『대구 동구의 오래된 이야기』수록 |
관련 지명 | 「지묘동의 유래」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왕건|신숭겸|견훤|경애왕 |
모티프 유형 | 사찰유래담|지명유래담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의 유래에 관하여 전해오는 이야기.
[채록/수집 상황]
정우락, 『문화공간 팔공산과 대구』(글누림출판사, 2009)
김기현, 『대구 동구의 오래된 이야기』(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문화원, 2013)
[내용]
후백제 견훤(甄萱)[867~936]은 현재 경상북도 영천시를 습격한 뒤 당시 신라 수도인 경주를 침입해 경애왕(景哀王)[924~927]을 자결하도록 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고려 왕건(王建)[877~943]은 견훤이 경주를 함락한 소식을 듣고 직접 고려군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왕건은 팔공산 동수지역에서 후백제군과 건곤일척[흥망, 승패를 걸고 단판 승부를 겨루는 것]의 일전을 벌이게 된다. 그런데 왕건의 군사들은 후백제의 군대에 포위되면서 형세가 위급하게 돌아가 왕건마저 죽을 위기를 맞았다. 이때 신숭겸(申崇謙)[?~927] 이 왕건의 전복으로 바꾸어 입고 결사항전을 하다가 지금 표충사 앞 순절단 자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견훤의 군사들은 신숭겸이 왕건인 줄 알고 머리를 잘라 갔다고 한다.
그 후에 본진으로 돌아온 왕건은 신숭겸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어서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왼쪽 발아래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을 보고 신숭겸의 시신을 찾았다. 왕건은 몹시 애통하여 나무로 신숭겸의 머리를 만들어 후하게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자신을 대신해 죽은 신숭겸과 그 집안에 여러 가지 보답을 했다. 우선, 신숭겸의 동생인 신능길과 아들 신보장에게 원윤(元尹)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또한 신숭겸이 전사했던 장소에 지묘사(智妙寺)와 그 주변에 미리사(美理寺)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지묘동이라는 지명은 지묘사라는 사찰로 인해 생겨난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모티프 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