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20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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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然雨 |
영어공식명칭 | Ku Yeonu |
이칭/별칭 | 금우(琴愚),문극(文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구본욱 |
출생 시기/일시 | 1843년 1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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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3년 12월 - 구연우 통정대부 홍문관 시학 겸 승정원 좌승지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914년 5월 6일![]() |
출생지 | 구연우 출생지 -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 |
거주|이주지 | 구연우 거주지 -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 |
거주|이주지 | 구연우 이주지 -
대구광역시 동구 신평동 ![]() |
묘소|단소 | 구연우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죽정동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능성 |
대표 관직 | 통정대부 홍문관 시학|승정원 좌승지 |
조선후기부터 개항기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신평동에서 활동한 유학자.
구연우의 자는 문극(文極), 호는 금우(琴愚),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아버지는 처사 구욱조(具郁祖)이고 어머니는 성주도씨(星州都氏)이다. 아들은 돈와(遯窩) 구태서(具泰書)이다.
구연우는 어릴 때부터 문재(文才)로 이름이 났었다. 구경(九經)과 삼사(三史)에 통하였으며 삼례(三禮)와 삼전(三傳) 공부를 잘했다. 성균관에서 『중용』과 『대학』의 문목(問目)을 강론할 때 재상들이 교남(嶠南)[경상도]의 대유(大儒)[큰 선비]라고 하고 자제들의 교육을 부탁하였다. 1887년(고종 24)에 관찰사 이호준(李鎬俊)이 실시한 낙육재(樂育齋) 재생(齋生) 시험에 합격하였다. 1893년(고종 30)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 시학(弘文館 侍學) 겸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에 제수되었으나 시사(時事)[세상 일]가 날로 그릇됨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1896년(고종 33)에 판서 엄세영(嚴世永)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공을 관직에 천거하려고 하였으나 사양하였다.1896년 대구광역시 북구 무태 동변동에서 대구광역시 동구 신평동[속명: 신덕, 설무산] 돈지봉(遯趾峯) 아래로 이사하였다. 이렇듯 구연우는 대구광역시 동구 신평동에서 은거하면서 20여 년간 신덕서당(新德書堂)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구연우는 「성균관(成均館)」, 「중용문목(中庸問目)」, 「대학문목(大學問目)」, 「금우자서(琴愚自序)」를 지었고, 문집으로 『금우집(琴愚集)』, 『금우속집(琴愚續集)』이 있다.
구연우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있었으나, 도시가 확장하면서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죽정동으로 이장하였다.
구연우의 묘비는 가선대부(嘉善大夫) 규장각 부제학(奎章閣 副提學) 완산(完山) 이순하(李舜夏)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