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1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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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槿友會 大邱支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 설립된 여성 단체 근우회 소속 지회.
[개설]
1927년 신간회가 민족유일당을 지향하면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민족 협동 전선을 구축하여 전국 단위로 지회와 분회를 조직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신간회의 조직은 여성 운동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활란(金活蘭)·유영준(劉英俊)·유각경(兪珏卿)·최은희(崔恩喜)·현신덕(玄信德) 등 민족주의 계열과 정칠성(丁七星)·박원민(朴元玟)·정종명(鄭鍾鳴)·주세죽(朱世竹) 등 사회주의 계열이 함께 주도하여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 향상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봉건적 굴레와 일제 침략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고자 1927년 5월 27일 근우회를 설립하고, 이후 전국적으로 지회를 세웠다.
[설립 목적]
근우회 대구지회(槿友會大邱支會)는 부인 교육, 남녀 차별 철폐, 여성 교양 육성, 부인 산업 기관 설립 등을 통하여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여성해방을 위한 활동을 펼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변천]
1928년 2월 근우회 대구지회 발기 준비위원회를 개최하고 임시의장과 설립 대회 준비 위원들을 선출하였다. 임시의장은 이춘수, 규약 작성 위원은 견신희·김일조·최순애, 의안 작성 위원은 하정순·최정옥·강정임·이한순·이춘수, 재정부 위원은 서덕완·조영수·채옥자였다. 이춘수·조영수 등은 대구여자청년회, 조영수는 대구여자기독청년회에 소속된 회원들이었다.
근우회 대구지회는 1928년 2월 25일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설립되었는데 대구여자청년회 간부이자 근우회 대구지회 준비 위원인 조영수가 사회를 맡았고, 근우회 본부에서 파견된 정칠성이 취지를 설명하였다. 근우회 대구지회 설립 당시 조직은 의장, 부의장, 서기로 구성되었다. 임시 집행부 의장은 이혜경, 부의장은 최정옥, 서기는 강점임·진현해가 선출되었다. 전형 위원에는 조영수·최종옥·이춘수, 대의원에는 조영수·최정옥·이춘수·나순금·노진옥·강정임, 기타 임원에는 한귀순·윤경옥·서명옥·서옥수·나순금·장두연·주복남·서덕완·노진옥이 선출되었다.
조영수와 이춘수는 대구여자청년회, 나순금은 대구청년동맹, 조영수는 대구부인상회에서도 활동하였다. 이처럼 대구여자청년회, 대구여자기독청년회, 대구부인상회, 대구청년동맹 등이 근우회 대구지회의 설립과 운영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었다. 1931년 2월 ‘근우회 해소론’이 대두되기 시작하다가 정식 해산 발표도 없이 해체된 것으로 보아 근우회 대구지회도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근우회 대구지회는 근우회 본부와 동일하게 서무부, 재무부, 교양부, 선전조직부, 조사부, 정치문화부로 조직되었다. 설립 당시 근우회 대구지회의 회원은 95명이며 가정부인 60명, 농민 9명, 학생 7명, 전문 직업여성 10명, 무직 여성 9명이었다. 연령은 19세에서 44세까지였다.
근우회 대구지회에서는 1928년 단오절에 원유회를 개최하여 회원 간 친목 도모와 회원 수를 늘려 조직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불화의 원인은 남자에게 있는가 여자에게 있는가’라는 논제로 조영수와 강정임으로 편을 나누어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1928년 12월 여자 편물 강습회를 후원하여 2주간 매일 3시간씩 편물 강습을 하였다.
1929년 2월에는 설립 1주년을 기념하여 조양회관에서 조선일보 대구지국 후원으로 ‘조혼 및 이혼’ 등을 주제로 기념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근우회 대구지회는 부인 교육, 남녀 차별 철폐, 여성 교양 육성, 부인 노동자 보호, 부인 산업 기관 설립 등 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여성해방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근우회 대구지회는 대구청년동맹과 신간회 대구지회와 연대하여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근우회 대구지회는 1920~1930년대 대구 지역 여성의 지위 향상과 여성운동 확산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