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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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月岩部落 遺蹟碑 |
영어공식명칭 | Woram-burak Yujeokbi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공단로22길 25[월암동 1-18]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신현정 |
건립 시기/일시 | 1998년 5월 10일 - 월암부락 유적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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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성서체육공원 -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공단로22길 25[월암동 1-18] |
성격 | 마을 유적비 |
재질 | 석재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23㎝[너비]|84.5㎝[높이]|30㎝[두께]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암동에 있는 마을 유적비.
[개설]
월암부락 유적비는 1994년 11월 세워진 마을 유적비이다. 월암동 마을의 역사, 주민 성씨, 지명, 비를 세운 이유 등이 새겨져 있다. 유적비는 사라진 마을과 선인들의 자취를 기리고자 세운 비를 말하는데, 마을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곳은 유래비로 이름이 붙여졌고, 월암부락처럼 마을이 완전히 사라진 곳은 유적비 또는 유허비로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 대구광역시 달서구에 속하는 월암부락은 조선시대에는 대구부 화원현(花園縣) 조암면(租岩面) 소속이었다. 1958년 대구시로 편입될 때, 대구 지역에 같은 지명이 있어 월배면과 달성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월암동’으로 제정하였다. 현재 월암동은 법정동이고 행정동은 월성1동과 월성2동이다.
[건립 경위]
1984년에서 2012년까지 5차에 걸쳐 성서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월암동을 비롯한 성서 일대는 과거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공단과 관공서, 아파트 단지 중심의 신도시로 변화하였다. 성서 일대 마을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마을이 공단에 편입되는 등의 이유로 마을의 해체, 변화, 이주 등을 겪으면서, 옛 마을을 기리는 마음에서 마을 유래비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1992년 망정부락 유적비를 시작으로 신당동 유래비, 갈미 유허비, 선원마을 유래비, 사령봉 유래비 등 열 기 이상의 유래비가 세워졌다.
이 중에서 월암부락 유적비는 1994년 성서2차산업단지에 편입되면서 신당동 등 이웃 동네로 이주하게 된 월암부락 주민들이 조상들의 삶의 자취와 유래를 후세에 전하고자 1998년 5월 10일 건립하였다.
[위치]
월암부락 유적비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암동 1-18 성서체육공원 내에 있다.
[형태]
월암부락 유적비는 너비 123㎝, 높이 84.5㎝, 두께 30㎝이며 기단 위에 표지석을 올린 형태이다.
[금석문]
앞면에는 한자로 ‘월암부락 유적비(月岩部落 遺蹟碑)’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마을 유래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다. 뒷면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구 평야 가운데 자리잡은 介上 덤은 東에서 西쪽으로 퉁두꼬-우뚬-잘래기-알뚬-등거티로 연결된 고만고만한 능성이들로 이어져 둘러싸인 온화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약 150年前 이곳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淸州韓氏가 처음 터를 마련하였고 그 뒤 慶州崔氏, 密陽朴氏, 星州 全州李氏, 丹陽禹氏, 達城徐氏, 金海金氏, 東萊鄭氏, 仁同張氏, 坡平尹氏, 綾城具氏 등 약 50여 가구가 올망졸망 모인 農村으로 생활해오다 1980年代 産業化의 물결에 따라 이주해 온 주민을 합하여 70여 家口로 불어났다.
行政名은 月岩洞으로 介上洞은 조암의 아래쪽이라 下同이라 하였으며, 1981年 7月 1日 慶尙北道에서 大邱直轄市로 편입되었다가, 1994年 十一月에 城西 2次 産業團地에 編入되어서 新堂洞을 중심으로 다른 곳으로 移住하게 되었다.
故鄕을 잃었으나 당산나무와 이 碑가 있음으로 우리 마음 속에는 故鄕이 永遠히 남아있지 않겠는가!
1998년 5월 10일”
[현황]
성서체육공원은 체육시설뿐 아니라 휴양 시설도 갖춘 공원이다. 공단 지역 내에 있어 일반 시민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인근 주민이나 근처 직장인들에게는 건강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월암부락 유적비는 공원의 산책로에 서 있다.
[의의와 평가]
월암부락 유적비에는 옛 지명이나 지역의 변천을 확인할 수 있어 사료로서도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