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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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世鎬 |
영어공식명칭 | Kim Seho |
이칭/별칭 | 치현(稚賢),수재(修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충희 |
출생 시기/일시 | 1806년 - 김세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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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43년 - 김세호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46년 - 김세호 문과 중시 을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46년 - 김세호 부교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50년 - 김세호 경상좌도암행어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69년 - 김세호 경상도관찰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874년 - 김세호 유배 |
추모 시기/일시 | 1874년 - 김세호추사불망비 건립 |
활동 시기/일시 | 1879년 - 김세호 해배 |
활동 시기/일시 | 1880년 - 김세호 한성부판윤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884년 - 김세호 사망 |
부임|활동지 | 경상감영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포정동 21] |
유배|이배지 | 중화 - 북한 평안남도 중화군 |
사당|배향지 | 김세호추사불망비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92번지 |
성격 | 문관 |
성별 | 남성 |
본관 | 청풍(淸風) |
대표 관직 |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 |
[정의]
개항기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문관.
[가계]
김세호(金世鎬)[1806~1884]의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자는 치현(稚賢), 호는 수재(修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택휴(金宅休)이고, 할아버지는 김희신(金熙臣)이다. 아버지는 황주목사를 지낸 김진교(金晉敎)이다.
[활동 사항]
김세호(金世鎬)는 1806년(순조 6)에 태어났다. 1843년(헌종 9)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846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850년(철종 1)에 지방관들의 수탈이 심하여 민란이 많았던 경상좌도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탐관오리들을 숙청하였다. 그 후 사간원대사헌·이조참의·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김세호는 1869년(고종 6)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저지대에 위치하여 수해가 잦았던 영일현과 진보현의 관청을 고지대로 옮기고 청천진(晴川鎭)을 없앴으며, 포항진(浦項鎭)을 다시 설치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금호강 변의 왕옥산 기슭에 있는 압로정(狎鷺亭)을 방문하여 차운시 한 수를 남겼는데 『소유정 회화록(小有亭會話錄)』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김세호는 1874년에 경상도암행어사 박정양(朴定陽)이 민정의 규찰을 태만하게 하고 변방에서 다툼질을 일으켰다고 탄핵하여 중화(中和)[현 북한 평안남도 중화군]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향리로 추방된 다음 1879년에 방면되었고, 1880년 다시 기용되어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1884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세호의 저서로는 『논어석의(論語釋疑)』, 『강화설제편(講話說諸篇)』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김세호의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 치적을 기리기 위하여 1874년(고종 11)에 감역(監役) 송인곤(宋仁坤)과 색리(色吏) 이완영(李完英) 등이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92번지에 김세호추사불망비(金世鎬追思不忘碑)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