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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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嶺營築城碑 |
영어공식명칭 | Yeongyeongchukseongb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팔현길 248[만촌동 9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욱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684년 - 민응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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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737년 2월 - 영영축성비 건립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750년 - 민응수 사망 |
이전 시기/일시 | 1980년 - 영영축성비 이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2년 3월 4일 - 영영축성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6월 29일 - 영영축성비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현 소재지 | 영영축성비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팔현길 248[만촌동 산90] |
원소재지 | 영영축성비 - 대구 남문 영남제일관 밖 |
성격 | 비석 |
양식 | 대석(臺石)|비신(碑身) |
관련 인물 | 민응수 |
재질 | 오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260㎝[높이]|90㎝[너비]|44㎝[두께] |
소유자 | 대구광역시 |
관리자 | 대구광역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조선 후기 경상감영의 성을 축성하고 건립 경위를 기록한 비석.
[개설]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는 1735년(영조 11) 3월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민응수(閔應洙)[1684~1750]가 조정에 건의하여 축성하였다. 1736년 1월 착공하여 11월 성을 완공하였다. 영영축성비 비문은 관찰사 민응수가 지었다. 영영축성비는 1982년 3월 4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으나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건립 경위]
영영축성비는 경상감영을 방어할 성벽(城壁)이 없는 것을 우려하여 조정에 건의하여 축성하게 되었다.
[위치]
영영축성비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산90번지에 있다.
[형태]
영영축성비는 대석(臺石)과 비신(碑身)이 있는 형태이다. 재질은 오석이며 높이는 260㎝, 너비는 90㎝, 두께는 44㎝이다.
[금석문]
영영축성비의 비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대구부는 실제로 영남의 중앙에 있는데, 달성(達城)이 폐지된 후 이곳에 유영(留營)을 옮겨 와 두었으니 실로 영남의 큰 도회지이다. 그런데도 막고 지킬 수 있는 조그만 성벽조차 없었다. 감영의 북쪽에 토성(土城)의 남은 터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시대에 쌓았는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지금은 또한 거의 허물어졌다. 내가 을묘년(1735)에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 일을 탄식하며 축성할 방안을 급히 강구하자 모두 돌이 없다고 어렵게 여겼다. 겨울에 돌이 있는 곳을 두루 찾아보고 의논한 끝에 결정하여 조정에 아뢰었다. 다음 해 정월 8일 계미일(癸未日) 돌을 캐기 시작하였고, 4일 뒤 정미일(丁未日)에 드디어 성터를 닦았고, 4월 25일 체성(體城)이 완성되었고, 6월 6일 성 위의 담이 모두 이루어졌다. 네 정문은 무지개처럼 둥글게 하고 성문 위에 누각을 설치하였으며, 두 개의 암문(暗門)은 동남과 서북으로 두었다. 둘레는 옛 성터를 조금 넓혔는데 총 넓이가 2,124보(步)이고, 담의 숫자는 819첩(堞)이다. 성의 높이는 서남쪽이 18척, 동북쪽이 17척이다. 후축(後築)은 넓이가 7보, 높이는 3급(級)이다. 인부를 모으고 경비를 마련하는 일은 두 도청(都廳)을 설치하여 주관토록 하였고, 각각 한 명씩 감독관을 두어 담당하게 하였다. 체성(體城)은 100패(牌)로 나누고 각 패에 패장(牌將)을 두었는데, 넓이를 살펴 구역을 나누었다. 사방을 동소(東所)·서소(西所)·남소(南所)·북소(北所)로 나누었고, 4문(四門)에 또한 각각 도청부감(都廳副監)을 두어 감독하게 하였다. 돌을 캐고 기와를 굽는 일은 모두 감독관을 따로 정하여 주관하게 하였고, 나 또한 매일 일의 결과에 따라 상줄 사람은 상을 주고 벌줄 사람은 벌을 주니, 사람들이 더욱 힘써 게을리 노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일이 빨리 끝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감영에 부속된 고을의 속오군을 동원하였다가 장계를 올려 농사일을 끝낸 백성의 동원을 청하였고, 봄철 농사가 바빠질 때는 모두 돌려보냈다. 이어서 승군(僧軍)을 동원하였고, 감영의 관리에게 도내의 장인, 각 점(店)의 연군(鉛軍), 장리(將吏), 예속(隷屬)을 모으게 하였는데, 모두 급료를 넉넉히 주고 일을 시켰다. 철(錢)·숯·석탄·목재·기계 등 필요한 물품도 또한 모두 후한 값을 지급하고 사들였고 운반비를 지불하고 옮겨 왔다. 소요되는 경비가 매우 많았으나 감영의 재정을 절약하고 물건을 전매하여 남은 이익에서 충당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머지 재물을 모두 사용하여 수성계(守城械)를 제작하였고, 수성창(修城倉)을 세워 군량을 비축하고 전포(錢布)를 저장하여 불시의 어려운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공사가 끝나자 장사(將士)들과 함께 구정(龜亭)에 모여 활쏘기를 하고 남문(南門)에서 크게 잔치를 열어, 공로에 따라 상을 주었다. 가을이 돌아오자 여러 고을의 장교들 가운데 축성에 공로가 있는 자를 모으고 활쏘기를 하여, 구정(龜亭)의 경우와 같이 상을 주었다. 10월에 장계를 올려 상을 청하자 공로에 따라 높낮이를 헤아려 도청(都廳)으로 부터 아전과 예속(隷屬)에 이르기까지 모두 품계를 올린다는 임금의 전교와 쌀과 베가 하사되었다. 임금의 은전이 매우 두터웠고 포상도 또한 넉넉하였다. 11월 신축일에 선화당에서 잔치를 열어 낙성식을 행하니, 자리에 모인 사람이 모두 820여 명이나 되었다. 무사(武士)와 승려, 늙은이와 어린아이가 모두 발을 구르고 춤을 추며 축하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 이 축성의 공사는 매우 거창하고 노고 또한 매우 컸습니다. 일을 담당한 장교들은 머리 빗고 목욕하면서 정성을 다하였고, 발바닥에 못이 박히는 괴로움을 참아 내었으니, 그 수고를 잊을 수 없습니다.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기록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축성의 전말을 간략히 서술하고 사람들의 성명을 아래에 새긴다. 숭정(崇禎) 이후 두 번 지난 정사년(1737) 2월 상순에 세우고, 관찰사 민응수(閔應洙)가 짓다.”
영영축성비 전면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大丘府實據一路中央 自達城廢後 移置留營則斯誠嶺以南大都會 而尙闕一片障蔽 治北有土城遺址 不知剏於何代而毁亦殆盡矣 余以乙卯歲來按是邦爲之 慨然亟講取豫之義 多以無石難之 迺於是冬 遍視石所卽議定 而聞于 朝 翌年正月八日癸卯 始伐石 越四日丁未 遂開基 四月廿五日 體城成 六月初六日 女堞畢 四正門則衰虹而譙褸也 兩暗門則居巽而位乾也 周遭則視構而稍拓之 摠二千一百二十四步 女墻八百十九堞 城高西南十八尺 東北十七尺 後築廣七步 高三級 槩其計徒役 辦需費則置兩都廳幹之 各以一監董副焉 體成分爲百牌 牌各有將 按步授切 四面劃爲四所 倂四門 亦各有都廳副監 以董其役 採石及燔瓦 俱別定任掌 以尸其事 余亦日巡 其功而賞罰之 人益勸勵 岡敢怠玩 此所以告功遄也 始以附邑偏伍之卒 啓請停操輪役 及東作殷則悉罷遣 繼以緇髡卒 以營屬招募道內匠手 及各店鉛軍 並將吏隷 皆豊其廩料而役之 鐵炭石灰木物器械之需 亦皆給厚値以 貿酬脚價以運 所支費拯廣 以無非取辦於營需之 卽縮販殖之奇羨矣 斥其餘備守城械 作修城倉 儲糧餉積錢布 爲不虞圖役 既訖 與諸將士 會射於龜亭 大饗於南門 施賞有差 暨秋巡 又會列邑軍校之有勞於幹板者 試射頒賞如龜亭例 十月請賞 啓 本始準下上 自都廳 下逮吏隷超資承 傅賜米給布 恩典優渥賞賚便蕃 乃以十一月辛丑設宴於宣化堂 以落之 會者凡三百二十餘人 韎韐緇衲白叟黎童 莫不蹈舞而賀成 僉曰 今玆版築工甚鉅而勞亦大執役 諸校櫛沐 跰之苦有不可忘 請竪石以識之 遂略叙其顚末 仍刻各人姓名於下云爾 崇禎紀元後再
丁巳二月上浣立
영영축성비 후면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築城貟役
都差員中間減中
二都廳追後加設
都差使員前水使 李守身
一都廰前府使 金 垕
二都廰折衝 趙克亮
策應都廰前僉使 權順性
東所都廰嘉善 申 智
西所都廰前僉使 李 淯
南所都廰嘉善 李彦命
北所都廰折衝 白商輝書
東門都廰折衝 閔興肇
西門都廰折衝 李惟天
南門都廰折衝 鄭 理
北門都廰折衝 李光新
都廰監董嘉善 李茂實
策應監董折衝 許 榏
東所監董閑良 張萬維
西所監董折衝 金克協
南所監董嘉善 文在徵
北所監董閑良 河道文
東門監董司果 徐彦成
西門監董閑良 李百齡
南門監董嘉善 洪致雲
北門監董折衝 尹衡老
燔瓦監官周知 洪禹鼎
各所牌將
東
徐必梯 朴致恒 裵聖彬 鄭浚杰 丁道興 崔擎崙 白厚儉
金基必 尹萬柱 葛世茂 徐熙世 文聖贊 卞益漢 宋以文
金汝三 金希建 崔孟世 張鳳元 金載亨 田得疇
西
許 澄 許 鐔 洪萬源 鄭必龍 車命載 李泰新 尹聖大
吳信三 田夏成 裵遇章 河天澄 金汝雄 金雲瑞 許 鏶
宋龜甲 白文菜 鄭雄朝 趙持璧 李泰命 李相燁 文德昌
羅進益 徐奎徵 金應泰 白鳳老 崔命泰 白夢龍 鄭雄道
宋碩泰 裵再望
南
徐倍彩 夏尙海 李廷植 鄭震華 趙德三 許 橚 辛必和
鄭仁建 孔仁齊 石泰崙 崔碩瞗 鄭安世 文在衡 文邦彦
金命基 崔東岌 宋道興 丁道明 白元采 白鳳采 金慶斗
田宅基 李國樑 徐師積 崔慶泰
北
李東煥 金最潝 李時彬 李文貴 卞時明 金進弼 尹益彩
黃龍澄 柳井老 李淂春 裵世華 白泰周 殷時業 趙萬澄
黃龍瑞 朴萬迪 金鼎泰 許有碩 鄭世大 徐世泰 金汝聖
徐益泰 羅元甲 宋履泰 趙夏胤
各所浮石監官
東司果 徐信明 西閑良 徐命贊
南折衝 金重鎰 李鳳彩 北折衝 張相翼
虹 霓
東閑良 河愛文 南折衝 吳遂績
埋炭監官
閑良 金益燁
貿鐵監官
折衝 朴順明
都 廳
營吏 金必恒 金龍孫 金夏成
色 金就傑 金爾鼎
策應
營吏 權運龍 金重獜
色 吳遂謙
書寫 韓聖益 徐德垕
木物色 鄭泰弘
東所色 金有獻
門色 李世沆
浮石色 金千均
西所色 韓維信
門色 徐就豪
浮石色 姜渭濱
南所色 金遇平
門色 秦日平
浮石色 郭泰元 申彦樹
北所色 徐慶鳳
門色 金處□
浮石色 姜謂漢
燔瓦色 金大婻
虹 霓
浮石色 鄭昌姬 丁聖夏
埋炭色 金麗觀
僧軍 都領 僧海淑
東領 僧善椘
西領 僧策蓮
南領 僧永
北領 僧載心
書記 僧良敏
等牌 僧爾玧
都刻手 僧歸允
[현황]
1737년(영조 13) 2월 상순에 대구 남문(南門)인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밖에 세워졌는데, 감영이 폐지된 후 일제강점기인 1932년 대구향교 경내에 옮겨 보존하였다. 1980년 수성구 만촌동에 영남제일관이 복원되면서 원래 위치로 옮겼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