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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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東日 |
영어공식명칭 | Seo Dongil |
이칭/별칭 | 서동일(徐東一),천구(天球),춘파(春波)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세윤 |
출생 시기/일시 | 1893년 12월 25일 - 서동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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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3년 1월 - 서동일 중국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6월 - 서동일 국민당 재무부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서동일 다물단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서동일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서동일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서동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65년 4월 26일 - 서동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서동일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공평동 -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동 |
거주|이주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거주|이주지 | 베이징 - 중국 베이징시 |
활동지 | 중국 - 중국 |
활동지 | 경상북도 - 경상북도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다물단 군자금 모집 특파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서동일(徐東日)[1893~1965]은 1893년 12월 25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동에서 태어났다.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국민당(國民黨)과 다물단(多勿團)에 가입하였으며, 1924년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서동일(徐東一)로도 알려졌으며, 호는 천구(天球)·춘파(春波)이다.
[활동 사항]
서동일은 1923년 1월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김자중(金自重)의 집에서 기거하였다. 3월 하순 베이징에서 배천택(裵天澤)·김창숙(金昌淑)·남형우(南亨祐) 등 경상도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독립운동 조직 국민당을 결성하였는데, 서동일은 6월에 국민당에 가담하여 재무부장을 맡았다. 1924년 겨울 김창숙 등이 참여하여 무정부주의 계열 비밀조직인 다물단을 강화하였는데, 이때 서동일도 함께하였다. 다물단은 군대를 양성하고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국내에서 거액의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고, 서동일은 남형우·배천택 등과 협의한 뒤 경상북도 경산 일대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서동일은 1924년 1월과 2월 사이 경산·청도 일대에서 1,400여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뒤 베이징으로 돌아가 다물단에 전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서동일은 1925년 1월 다물단의 군자금 모집 특파원 신임장과 군자금 모집 선언서, 다액 제공자 표창기휘장(表彰記徽章) 등을 지니고 국내에 다시 잠입하여 경산·청도 등 내륙지방에서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3월경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서동일은 1925년 5월 22일 다물단의 선언서 및 특파원 신임장 각 1매를 휴대하고 베이징을 출발하여 세 번째로 경산·청도 일대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5월 30일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서동일이 체포된 뒤 청도의 윤영섭(尹瑛燮)·윤병래(尹炳來)·윤병일(尹炳馹)·최성희(崔聖熙)·이종호(李鍾昊) 등도 함께 체포되어 다물단은 큰 타격을 받았다. 서동일은 1926년 3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서동일은 1965년 4월 26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서동일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