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12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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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滄浪亭 |
영어공식명칭 | Changrangje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혁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60년 - 성해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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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39년 - 성해응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40년경 - 「창랑정」 성해응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 수록 |
배경 지역 | 창랑정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정연리 |
성격 | 한시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성해응이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정연리의 창랑정을 소재로 하여 지은 한시.
[개설]
「창랑정(滄浪亭)」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정연리의 창랑정(滄浪亭)을 소재로 하여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성해응(成海應)[1760~1839]이 지은 한시이다. 성해응은 폐쇄적인 성리학의 연구 방법을 비판하고 고증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의 결합을 주장하였으며, 경학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1783년(정조 7) 진사가 되었고, 1788년에는 규장각검서관(奎章閣檢書官)이 되었다.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각종 서적을 광범위하게 섭렵하였고, 이덕무(李德懋)[1741~1793]·유득공(柳得恭)[1748~1807]·박제가(朴齊家)[1750~1805] 등의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하여 학문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790년 정조(正祖)[1752~1800]가 규장각에 명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편찬하였는데, 여기에 깊이 참여하여 권수의 범례를 작성하였다. 1813년 정조의 어제(御製)를 간행할 때 세 차례 규장각에 들어갔으며, 1815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창랑정」의 배경인 철원군 갈말읍 정연리의 창랑정은 조선 시대 문인인 월담(月潭) 황근중(黃謹中)[1560~1633]이 세운 정자이다. 금강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이라서 많은 문인이 운집하는 명소였다. 그러나 병자호란(丙子胡亂)[1636] 때 전소되었고, 이후 재건되었지만 6·25전쟁 당시 다시 격전지가 되어 이제는 터만 남아 있다.
[구성]
「창랑정」은 오언절구(五言絶句)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해응이 쓴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애애황씨정(藹藹黃氏亭)[무성한 숲속 황씨의 정자]
정하즉창랑(亭下卽滄浪)[정자 아래는 푸른 물이네]
일야류불식(日夜流不息)[밤낮 쉬지 않고 흐르니]
강수유저망(江水有底忙)[강물은 뭐가 그리 바쁜가]
[특징]
「창랑정」은 조선 시대 문인인 황근중이 지은 정자인 창랑정을 읊은 한시이며, 언덕 위 숲속에 있는 정자의 모습과 정자에서 내려다본 강물을 묘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창랑정」의 배경인 창랑정에 대하여 『강원도지』는 ‘수석(水石)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찾아드는 시인 묵객들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으며, 감사(監司) 황근중이 퇴임하여 연양(燕養)하던 장소’라고 하였다. 병자호란 때 불타 없어진 정자의 모습을 한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