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3월 21일부터 1919년 4월 11일까지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1919년 서울에서 비롯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영주 지역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영주 지역의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1919년 4월 11일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
-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영주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된 남한과 북한 간 전쟁.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종결되었다. 6.25전쟁 기간 영주 지역에서 치러진 주요 전투로는 풍기영주지구 전투와 남대리지구 전투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38...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목사이자 학자. 강병주(姜炳周)[1882~1955]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일제강점기 때 국내 기독교 목사로서는 유일하게 한글학자로 활동하였다. 강병주는 1882년(고종 19) 지금의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내매마을에서 아버지 강기원(姜祺元)과 어머니 이성곡(李星谷) 사이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10년 기독교 재단인 대구 계성학교(啓...
-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의 목사. 강신명(姜信明)[1909~1985]의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소죽(小竹)이다. 목사이자 교육가로서 활동하였다. 강신명은 1909년 6월 13일 지금의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내매마을에서 아버지 강병주(姜炳周)[1882~1955] 목사와 어머니 최영주(崔榮周) 사이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내매마을에 있는 내명학교(乃明學校...
-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의 독립운동가. 강택진(姜宅鎭)[1892~1926]은 1917년부터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고려공산청년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에서 활동하였다. 강택진의 호는 하연(何然)이다. 아버지 강재기(姜在琦)[1857~1938]와 어머니 김열(金烈)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풍기소작조합 위원장을 지낸 강응진(姜應鎭)이 형...
-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10년 대한제국기까지 영주 지역의 역사. 1876년(고종 13) 2월 일본과 강제로 체결한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안으로는 봉건사회를 극복하고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하며, 밖으로는 제국주의 침략을 극복하여 자주적인 사회를 건설해야만 하는 반제 반봉건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안...
-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영주 지역에서 전개된 국권회복운동. 계몽운동(啓蒙運動)은 갑신정변과 독립협회운동으로 대표되는 개화자강계열의 민족운동을 계승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개화자강계열의 지식인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전국적으로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 등이 있다. 또 계몽운동의 유형으로는 국권 회복을 위...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갑봉(權甲奉)[1924~2002]은 1943년 여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미군 공습에 맞추어 일제 봉기를 선전하고 동지를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권갑봉은 1924년 12월 25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평은리에서 출생하였다. 권춘갑(權甲春) 또는 판갑태(板甲奉)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상수(權相銖)[1873~1941]는 1916년부터 1918년 사이에 영주 지역에서 국외 독립운동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베이징[北京]에서 유림단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는데, 주로 무기 및 자금조달과 고문 역할을 하였다. 권상수는 권상수(權相洙) 또는 권우송(權又松)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권석규(權錫奎)[1883~?]는 정미의병이 한창 일어나고 있던 1907년 9월부터 김성운(金成雲) 의진에 참여하였다. 여기에서 권석규는 영양군 일대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 등의 의병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권석규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는 권호균(權浩均),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 송대춘(宋大春)이다....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석환(權錫煥)[1907~1971]은 영주농민조합과 영주청년동맹에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 영주 1차 격문 투쟁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권석환은 1907년 8월 14일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백리에서 출생하였다. 권봉상(權鳳象)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1929년 3월 9일 제3회 풍기농우동맹 정기대회에서 풍기농...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영목(權寧睦)[1884~1935]은 1915년 대한광복회의 상업 조직인 영주 대동상점(大同商店)을 설립하여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상하이[上海]와 베이징[北京] 등지를 전전하며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권영목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집(敬緝), 호는 동도(東島)이다. 이명으로 배량(裵梁)·...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창수(權昌銖)[1892~1970]는 1919년 4월 4일 은산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권창수는 경상도 풍기군 하리면 금곡동[지금의 예천군 은풍면 금곡리]에서 출생하였다. 권창수는 평소 농사를 지으면서도 인근 시장에서 어물장사를 하였기에 세상 물정에...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태동(權泰東)[1912~1962]은 1929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서 일제의 교육정책에 반대하는 동맹휴교 투쟁을 벌였으며, 1932년에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권태동은 1912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에서 출생하였다. 권태동은 1926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를...
-
1929년 영주 지역에 설립된 근우회 산하 지회. 근우회(勤友會)는 1927년 5월에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의 자매기관으로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이라는 과제를 목표로 활동하던 단체였다. 근우회 영주지회는 1929년 4월 2일 신간회 영주지회 강당에서 창립대회를 열고 조직되었다. 근우회는 조선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 향상’을 목표로 하였는데, 근우회 영주지...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금달연(琴達淵)[1874~1914]은 순흥 지역에서 김낙임(金樂任) 등과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1907년 일본군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는 등의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1909년 순흥헌병분경소의 순사대에 체포되어 종신징역을 받고 옥사·순국하였다. 금달연의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아버지는 금석주(琴錫周),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18...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 김계등(金季登)[1907~?]은 1920년대 영주청년동맹·영주농민조합·신간회 영주지회에서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30년대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통해 혁명적 농민조합운동과 반제동맹을 추진한 독립운동가이다. 김계등은 1907년 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김익영(金益榮)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계진(金季鎭)[1907~2000]은 1920년대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32년에는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김계진은 1907년 1월 24일 지금의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서 출생하였다. 김계진은 1920년대 후반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에서 사회운...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낙임(金樂任)[1881~1914]은 의병장 이강년(李康年)[1858~1908]을 찾아가 종군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병약하여 거부당하였다. 이후 순흥 일원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낙임의 본관은 예안(禮安)[선성(宣城)], 자는 사일(士一)이다. 아버지는 이강년 의진의 소모장을 지낸 김영시(金永詩)로 188...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동진(金東鎭)[1867~1952]은 1914년 임병찬(林炳瓚)[1851~1916]이 조직한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대한독립의군부의 활동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19년 3월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 때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1925년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벌인 군자금 모집에 관여하여 1926년 5월 이른바 제2차 유림단...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두갑(金斗甲)[?~1909]은 이강년(李康秊)[1858~1908]이 1907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 7월 이강년이 체포된 뒤에는 의진의 지휘권을 인계받은 김상태(金尙台)[1864~1912]의 의진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김두갑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 출신이다....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두배(金斗培)[1909~1928]는 1927년 만주 독립운동단체 참의부원 김용재(金用才)[1900~1928]가 이끄는 독립운동단체의 군자금 모집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8년 소백산 형제봉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전사하였다. 김두배는 지금의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에서 출생하였다. 김두배는 1927년 영주 지역에...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명진(金命鎭)[1908~1955]은 1920년대 후반 영주청년동맹 평은지부에 가입하였으며, 1932년에는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김명진은 1908년 12월 15일 지금의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서 출생하였다. 김명진은 1928년 2월 7일 설립된 영주청년동맹 평은지부에 가입하여 청년운동을...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봉정(金鳳政)[?~1909]은 1907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재기한 이강년(李康秊)[1858~1908] 의진에서 활동한 항일 의병이다. 이강년이 순국한 후에는 중군장이었던 김상태(金尙台)[1864~1912] 의진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김봉정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에서 출생하였다. 김봉정은 1905년 을사늑...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봉호(金鳳鎬)[1884~1950]는 1920년대 영주 지역에서 농민운동과 신간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통해 혁명적농민조합과 반제동맹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김봉호는 1884년 11월 9일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김동필(金東弼)이다. 김봉호는 어린...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선이(金仙伊)[1878~?]는 1909년 5월부터 9월경까지 김상태(金尙台)[1864~1912] 의진에 가담하여 수십 명의 병사와 함께 경상북도 영천군(榮川郡)과 봉화군, 강원도 영월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선이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 덕거촌(德巨村)에서 출생하였다. 김선이는 1909년 김상태...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성규(金性奎)[1904~1946]는 1927년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에 가입해 활동하였으며,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일어난 영주 격문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성규의 본관은 예안(禮安)[선성(宣城)]으로 1904년 2월 7일 지금의 영주시 하망동에서 출생하였다. 1927년 11월 24일 영주청년동맹이 창립되었는데...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성진(金聲振)[1857~1915]은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전해 듣고 통분하였으며, 1915년 단식·순국하였다. 김성진의 본관은 예안(禮安)[선성(宣城)], 자는 명옥(鳴玉), 호는 야옹(野翁)·어야(於野)이다. 김륵(金玏)[1540~1616]의 후손으로 1857년 11월 29일 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에서 출생하였...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수갑(金守甲)[?~1909]은 1907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일어난 이강년(李康秊)[1858~1908] 의진에 투신하여 활동하다 이강년이 순국한 뒤에는 김상태(金相台)[1864~1912] 의진에서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수갑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 출신이다. 김수갑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외...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승기(金勝基)[1924~2017]는 1944년 10월 영주 지역에서 야학운동을 전개하고, 일제의 징병 영장 발부를 거부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승기는 1924년 10월 20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서 출생하였다. 김승기는 대구 대륜중학교 재학 중 교사 이규동(李揆東)과 선배들의 영향으로 항일민족의식을...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시백(金時伯)[1887~1950]은 1907년 이강년(李康秊)[1858~1908] 의진 중군장 김상태(金尙台)[1864~1912] 진영의 좌선봉에 이어 김상태 의진의 소모장으로 활동하였다. 김시백의 본관 김해(金海), 자는 삼궁(三弓), 본명은 김현세(金顯世)이다. 본적지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이며, 1887년 10...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영기(金榮基)[1905~?]는 1926년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순종황제 국장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영기는 1905년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에서 출생하였다. 김영기는 1926년 연희전문학교 1학년에 재학 중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가담하...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영하(金永河)[1919~2015]는 1939년 경성(京城)에서 학생대표 12명을 규합하여,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준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영하는 1919년 3월 3일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출생하였다. 김영하는 1939년 12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민족 독립에 뜻...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용준(金容俊)[1873~1932]은 1919년 4월 9일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에서 일어난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김용준은 1873년 6월 13일 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다. 김용준은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성내동의 풍기장터에서 열린 풍...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유창(金瑬昌)[1900~1945]은 일본으로 건너가 비밀결사단체인 건달회(建達會)에서 활동하였다. 김유창은 1900년 3월 27일 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김완(金莞)·김자진(金子進)·김창하(金昌河)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김유창은 1922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7년에 관동자...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은석(金恩錫)[1905~1988]은 기독교 목사이다. 1940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기독교 포교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은석은 1905년 6월 6일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에서 출생하였다. 다른 이름으로 김전은석(金田恩錫)을 사용하였다. 김은석은 1...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재명(金載明)[1885~1977]은 1910년 경북 북부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김재명의 본관은 의성(義城), 이명은 김재명(金在名)이다. 아버지는 김정한(金鼎翰)이다. 김재명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소룡리에서 1885년 7월 13일 출생하였다. 의병활동 당시에는 예천군 승...
-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의 정치가. 김정식(金正植)[1915~1989]은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영주군 단장과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김정식은 1915년 지금의 영주시에서 출생하였다. 김정식은 일본 오사카대학교 약학대학 약학과를 졸업한 후 일본에서 제약회사를 경영하면서 악귀가극단(樂貴歌劇團)을 운영하였다. 또 3년간 신문기자로도 활동하...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종진(金鍾鎭)[1904~1952]은 1920년대 안동 지역에서 안동청년동맹 활동을 하였고, 1932년에는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종진은 1904년 9월 15일 지금의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서 출생하였다. 김종진은 영주 출신이지만, 1920년대에는 안동청년동맹 와룡지부와 신간회...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준상(金俊相)[1910~?]은 1920년대 후반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 영주 1차 격문 투쟁에 참여하였다. 1930년대 전반기에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김준상은 1910년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서 출생하였다. 김정상(金禎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찬규(金燦奎)[1866~1929]는 1919년 조선민족대동단, 1920년부터는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통해 중국과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찬규의 본관은 예안(禮安)[선성(宣城)], 자는 사협(士夾), 호는 석연(石然)이다. 별명으로 혁규(赫奎) 혹은 보량(普亮)을 썼다. 1866년 6월 13일...
-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의 정치가이자 관료. 김창근(金昌槿)[1930~1991]은 영주를 지역구로 두고 4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창근의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우봉(友峰)으로 1930년 지금의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에서 출생하였다. 김창근은 영주농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민주학생연맹을 결성하여 우익 청년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57년 서울...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치순(金致順)[?~1909]은 1907년 이강년(李康秊)[1858~1908] 의진과 김상태(金尙台)[1864~1912] 의진에서 활동한 의병이다. 김치순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에 거주하였다. 김치순은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 되고, 군대마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침략이 갈수록 심해지자, 충청북도...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택진(金澤鎭)[1874~1961]은 1919년 3월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 영주지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김택진의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원중(源仲), 호는 동려(東黎)이다. 문절공 김담(金淡)[1416~1464]의 17세손이며, 백암(栢巖) 김륵(金玏)[1540~1616]의 13세손...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한룡(金漢龍)[1927~1998]은 1943년 4월 안동농림학교 제9기생 권오봉(權五鳳)[1930~1999] 등과 함께 비밀결사 명성회(明星會)를 결성하고, 1944년 10월 대한독립회복연구단과 연합하여 무장봉기를 계획하다가 1945년 3월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한룡의 본관은 선성(宣城), 자는 운오(雲五), 호는 청...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화진(金華鎭)[1904~1946]은 1920년대 후반 영주 지역에서 영주청년동맹·신간회 영주지회·영주농민조합에서 활동하였으며, 1932년에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김화진은 1904년 10월 17일 지금의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서 출생하였다. 김화진은 1922년 3월 영주...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 김효식(金孝植)[1920~?]은 1941년 2월 대구사범학교의 비밀결사 다혁당(茶革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김효식은 1920년 10월 18일 지금의 영주시 가흥동에서 출생하였다. 다혁당은 1941년 2월 15일 김효식을 비롯한 권쾌복(權快福)[1921~?]·최영백(崔榮百)·김성권(金聖權)[1922~...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휘정(金輝珽)[1841~1901]은 1896년 순흥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과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항전하였다. 김휘정의 본관은 예안(禮安)[선성(宣城)], 자는 정옥(廷玉)이다. 1841년 경상도 순흥도호부 도탄(桃灘)[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에서 김낙표(金樂驃)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휘...
-
1951년 1월 14일부터 19일까지 한국군과 북한군이 영주 부석면 남대리 일대에서 벌인 전투. 남대리지구 전투는 6·25전쟁 중인 1951년 1월 14일부터 19일까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 일대에서 국군 제3군단과 인민군 제9사단 및 제31사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남대리 일대는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의 분기점으로 인근 지역으로 진출...
-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 정착한 의병. 남두희(南斗熙)[1850~1924]는 1896년 청송의진(靑松義陣)의 우익장으로 활약하였다. 남두희의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극중(極中), 이명으로 남두희(南斗凞)를 사용하였다. 1850년 1월 29일 지금의 청송군 현동면 거성리에서 남태치(南泰雉)와 선산김씨(善山金氏)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남상필(南相弼)[1891~1972]은 1919년 4월 9일 안용호(安容鎬)[1884~1942] 등이 주도한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남상필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 출신이다. 남상필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성내동 풍기장날에 같은...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남영진(南永鎭)[1894~1920]은 같은 마을의 최성원(崔盛源)[1894~1926]·안용호(安容鎬)[1884~1942]와 함께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남영진의 본관은 영양(英陽), 본적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보계리이나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
1920~1930년대 영주 지역에서 전개된 농민운동. 1910년대 일제는 근대법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 아래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해 식민지 지주제를 확립시켰다. 이어 1920년대에는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하는 한편, 농업 수탈을 가속화되면서 농민층의 몰락은 빨라졌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농민은 수확물의 50~80%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 지세·호세·지세부가...
-
1930년대 영주 지역에서 전개된 혁명적 농민운동. 세계 대공황 이후 점증하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대대적인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식민지 조선에서는 농민운동이 1920년대 후반부터 민족운동으로 확대·발전하는 가운데, 일제의 정책에 대응하여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전개되었다. 영주의 농민조합운동은 1931년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시작으로...
-
1915년 경상북도 영주 지역의 대한광복회 회원 박제선·권영목 등이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사건. 대동상점사건(大同商店事件)은 영주에 설립된 상업 조직인 대동상점에서 펼친 독립활동이 발각된 사건이다. 1915년 8월 박제선(朴濟璿)·권영목(權寧睦) 등이 영주시장에 대동상점을 세웠으며, 그 과정에서 유명수(柳明秀)·정응봉(鄭應鳳)·이...
-
1913년 영주 지역에서 채기중이 주도하여 조직한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은 1913년 1월 채기중(蔡基中)을 비롯해 전원식(全元式)·정성산(鄭星山) 등 10여 명이 경상북도 풍기군[지금의 영주시 풍기읍]에서 결성한 비밀결사조직이다.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의병투쟁이나 계몽운동을 전개했던 민족지사들은 국권 회복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을 잃어...
-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영주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족해방운동. 영주 지역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은 1895년(고종 32) 을미의병에서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895년 을미의병기 영천(榮川)·풍기·순흥에서는 의병진이 결성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5년 이후 을사의병과 1907년 이후 정미의병에서 대일항전이 전개되었다. 1910년대...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단의 활약상.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가 결성되었다. 대한광복회는 영주의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된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이다. 대한광복회는 국외 독립운동 단체 지원 및 독립군 양성에 목적을 두고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에 전력하였으며, 이를...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계양(朴啓陽)[1888~1937]은 1919년 봉화군 봉성면에서 독립군 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혁신공보(革新公報)」라는 제목의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려다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박계양은 지금 영주시 고현동에서 출생하였다. 박계양은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품었으며, 민족의 독립을...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병성(朴炳星)[1904~?]은 1920년대 후반 영주청년동맹·신간회 영주지회·영주농민조합에서 활동하였으며, 1932년에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한 사회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박병성은 1904년 지금의 영주시 하망동에서 출생하였는데, ‘박병성(朴炳成)’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박병성은 1920년 3월 영주...
-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의 정치가. 박용만(朴容萬)[1924~1996]은 4선 국회의원으로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박용만의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영암(嶺巖)이다. 1924년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박은식(朴殷植)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박용만은 1942년 김천고등보통학교을 졸업하였다....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제선(朴齊璿)[1878~1938]은 1915년 대한광복회의 상업 조직인 대동상점(大同商店)을 설립하여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베이징[北京]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제선의 본관은 반남(潘南), 이명은 박학제(朴學齊) 혹은 박선옥(朴旋玉), 별명은 박엽(璞曄)이다....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제형(朴齊衡)[1882~1948]은 제2차 유림단의거에 참여하고, 신간회 영주지회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박제형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순칠(舜七), 호는 철오(鐵塢)이다. 1882년 7월 5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에서 박운수(朴雲壽)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제형은 일찍이 김휘철(金輝轍)[1842...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진양(朴震陽)[1909~1940]은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진양의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1909년 2월 24일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박제선(朴齊璿)[1878~1938]은 대동상점사건(大同商店事件) 주도자였으며,...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태양(朴泰陽)[1914~1965]은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 한국인 훈련반에서 특수임무 수행 교육을 받았으며,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애국장정 모집과 일본인 암살, 군사 기밀 탐지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박태양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이택민(李澤民)·이동...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변성출(卞聖出)[1881~?]은 1910년 안동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22~1923년에는 영주 지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변성출은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 정라동에...
-
1970~1980년대 경상북도 영주시를 포함한 전국에서 실시된 지역 사회 개발 운동. 1970년 4월 22일 한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소집된 대통령 주재 전국 지방장관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농민, 관계 기관, 지도자 간의 협조를 전제로 한 농촌 자조 노력의 진작 방안을 연구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1970년 5월 6일 ‘국토 보존에 관한 지시’를 통해 새마을운동이 시...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서재승(徐在承)[1876~1915]은 1907년 정미의병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15년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고문 끝에 총살당하였다. 서재승의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성서(聖瑞), 호는 죽림(竹林)이다. 1876년 11월 25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사천리에서 서목렬(徐穆烈)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재승은...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학자. 송상도(宋相燾)[1871~1946]는 한학자로서 『기려수필(騎驢隨筆)』을 저술하였다. 송상도의 본관은 야로(冶爐), 자는 성소(聖韶), 호는 기려자(騎驢子)·미헌(眉軒)·연파(蓮坡)이다. 시조 송맹영(宋孟英)의 26세손으로 1871년 4월 12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광승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송상도는 어려서부터...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송영호(宋永祜)[1903~1968]는 1925년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주도한 제2차 유림단의거에 참여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김창숙과 함께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였다. 송영호의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보경(普卿), 호는 창주(滄洲)이다. 1903년 7월 22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에서 아버지...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송위길(宋渭吉)[1909~1989]은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광주학생운동에 영향을 받아 1930년 격문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송위길은 1909년 11월 24일 지금의 영주시 영주동에서 출생하였다. 송중섭(宋仲燮)이라고도 한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은 영주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광...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송재호(宋在祜)[1906~1974]는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 때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이후 신간회 영주지회와 영주청년동맹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송재호의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1906년 10월 12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에서 아버지 송인상(宋仁相)과 어머니 류하회(柳河回)의 2남 중 차남으로 태...
-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의 학자. 송지향(宋志香)[1918~2004]은 경북 북부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사학자로 40여 년 동안 향토사 연구에 전념하였다. 『영주향토지(榮州鄕土誌)』, 『유계일기(幽溪日記)』 등을 저술하였으며, 금계중학교 교사와 대한광복단기념비건립추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송지향의 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유계(幽溪)이다. 1918년 평안...
-
1895년부터 1914년까지 경상북도 영주시 일원에 있었던 지방행정구역. 순흥군(順興郡)은 1895년부터 1914년까지 현 영주시 순흥면·부석면·단산면 및 봉화군 봉화읍·물야면 일부 지역에 있었던 지방행정구역이다. 1895년(고종 32) 조선 정부는 제2차 갑오개혁의 하나로 효율적인 지방 통치를 위한 23부제(二十三府制)를 실시하였다. 아울러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1871년 흥선대원군이 외세를 배척하고자 세운 비석. 순흥 척화비(順興斥和碑)는 1871년(고종 8) 4월 신미양요를 겪은 직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명에 따라 한양 종로를 비롯하여 전국 주요 도로변에 건립된 척화비 가운데 하나이다. 순흥 척화비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1991년 5월 14일 경상북도...
-
1927년 영주 지역에 설립된 신간회 산하 지회. 신간회(新幹會)는 일제강점기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통일전선에 의해 성립된 민족운동 단체이다. 1927년 2월 신간회가 결성된 후 전국의 사회운동 단체들이 지지 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족운동이 활성화되었고, 이는 전국적인 지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영주 지역에서도 1927년 8월 29일 영주청년회관에서 신간...
-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영주 지역에서 근대교육을 배우려는 움직임과 학교 설립 운동.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의 요체는 ‘실력’과 ‘힘’을 길러 일본제국주의로부터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으로는 언론계몽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 국채보상운동, 신문화운동, 신문학운동, 국학운동, 민족종교운동, 해외독립기지건설운...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신봉균(申鳳均)[1866~1907]은 1895년 경상도 풍기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80여 명의 군사와 함께 주흘산(主屹山)에서 적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후기의병 시기인 1907년 10월 유인석(柳麟錫)[1842~1915] 의병장의 행방을 추궁하는 일본군에 항거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신봉균의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학암(鶴庵)...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안기석(安基錫)[1897~1968]은 풍기기독청년회·풍기소작조합에서 활동하였으며, 신간회 영주지회의 간사 및 회원을 지냈다.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1930년 영주 1차 격문 투쟁을 전개하다가 투옥되었다. 안기석은 1897년 3월 25일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서 출생하였다. 안기석은 1920년 8월 18...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안봉익(安鳳翼)[1896~1951]은 1919년 3월 21일 경상북도 안동의 편항장터에서 열린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안봉익의 본적지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인데, 3.1운동 당시에는 청송군 진보면 세장동에서 살고 있었다. 안봉익은 1919년 3월 다른 지역에...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안용호(安容鎬)[1884~1942]는 1919년 4월 3일 일어난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안용호는 1884년 12월 17일 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출생하였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안용호는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와 경제적 침탈에 불만이 컸다. 그러던...
-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서 전개된 교육 운동.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인과 일본인 교육을 엄격히 차별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초등교육기관을 4년제와 6년제로 구분한 뒤, 조선인 초등교육기관은 대부분 4년제로 설립 인가하였다. 6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해야 상급 교육기관인 중학교[오늘날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러한 차별을 통해 조선인의 교육 기회를 제한하였다....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일대에 있는 근대역사문화거리. 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는 영주 지역의 철도 역사와 그 배후에 형성된 철도관사, 정미소, 이발관, 근대 한옥, 교회 등 지역의 근대 생활사 요소를 간직한 건축물이 집적되어 있다. 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는 2018년 8월 6일 등록문화재 제720호로 지정되었다. 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는 영주시 영주동 관사골에서...
-
1929년 영주 지역에 설립된 농민단체. 영주농민조합(榮州農民組合)은 1929년 3월 개최된 제3차 풍기농우동맹 정기대회에서 풍기농우동맹을 해체하고 창립하였다. 영주농민조합은 군 단일 농민조직으로 이후 지부 설치에 집중하였다. 영주농민조합은 영주 지역 내 단일 농민조직을 결성하고, 그 과정에서 기존 소작인 조합을 농민조합으로 확대·개편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
1961년 7월 11일 영주 지역에서 발생한 자연재해. 영주 대홍수(榮州大洪水)는 1961년 7월 11일 새벽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일대에서 일어난 자연재해이다. 이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발생하였고, 대대적인 복구작업이 이루어졌다. 특히 복구작업 과정에서 서천(西川)의 유로가 변경되면서 현재의 영주 시내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 영주청년회와 풍기청년회가 연합으로 결성한 군 단위 청년단체. 영주청년동맹(榮州靑年同盟)은 조선청년총동맹의 부군 청년동맹 결정 방침에 따라 영주청년회와 풍기청년회가 통합되어 1927년 11월 24일 결성된 청년운동 조직이다. 영주청년동맹은 창립 후 지부 설치 활동을 통해 영주 청년운동의 통일적 조직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또한, 민족협동전선운동 차원에...
-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서 설립된 청년단체. 영주청년회(榮州靑年會)는 1920년 6월 영주에서 조직된 실력양성론 입장에서 청년운동과 문화운동을 전개한 청년단체이다. 영주청년회는 적성 함양, 학문 증진, 체육발전, 의사교환, 풍속 교정 등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영주청년회는 1927년 11월 24일 전국적인 청년운동 혁신에 조응해 풍기청년회와 연합하여 영...
-
1914년부터 1980년까지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행정구역. 영주군(榮州郡)은 1914년부터 1980년까지 지금 영주시 일대에 두어졌던 지방행정구역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하여,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한 방대한 국토 자료를 바탕으로 1914년 3월 1일 전국을 13도 12부 220군으로 개편하였다. 특히 기존 군의 경우 면적·인구...
-
1919년 3월 21일 경상북도 영주 지역의 영주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영주장터에서 일어났다.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박인서(朴仁緖)·오하근(吳夏根)·권태중(權泰中)이 주도했다. 박인서·오하근·권태중은 준비해 간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출동한 일본군 헌병들에게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에 있는 전국농민회총연맹 경북도연맹 산하 영주 지역 농민단체. 영주시농민회(榮州市農民會)는 1989년 설립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정부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을 내세워 농업 개방의 불가피론을 강조하면서 수입자유화 예시 계획을 발표해 농산물 수입을 기정사실로 하였다. 그 결과 전국적인 농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9년부터 농축산물...
-
1980년부터 1994년까지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었던 지방행정구역. 영풍군(榮豊郡)은 1980년부터 1994년까지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이산면·평은면·문수면·장수면·안정면·봉현면·순흥면·단산면·부석면 등 1읍 9면 지역에 두어졌던 지방행정구역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1995년 도농통합시가 등장할 때까지, 우리나라의 행정구역 조정은 기본적으로 중심도시[시·읍]와...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하근(吳夏根)[1897~1963]은 1919년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오하근의 본관은 고창(高敞), 호는 농고(聾故)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오응철(吳應澈)이며, 1897년 10월 15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조암동 사일마을에서 태어났다. 오하근은 농촌에서 농사를...
-
개항기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서 유림이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전개한 운동.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은 “중화(中華)의 명맥을 보전하여 조선이 금수가 되는 것을 막고, 세계의 중심은 화맥을 계승한 조선에 있다.”라는 위정척사론의 기치로 19세기 후반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유림이 집단으로 전개한 상소운동이다. 특히 영주 지역 유림은 1881년(...
-
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영주 지역 유림 대표들이 국제사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청원한 독립운동.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1846~1919]을 대표로 한 영남 유림과 김복한(金福漢)[1860~1924]을 대표로 한 호서 유림 등 137명이 유림단의 이름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독립청원서」를 보냈다. 이때 영주 지역 출신으로 참가한 인사는 김동진(金東鎭...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윤석오(尹錫五)[1870~?]는 1908년 2월부터 김상태(金尙台)[1864~1912] 의진 소속의 이용구(李容九)[1868~1912] 부대에 투신하여 경북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을 하였다. 1909년에는 충청북도 제천에서 김상태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윤석오는 다른 이름으로 ‘윤석오(尹石...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윤영구(尹永九)[?~1909]는 1907년 정미의병기에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 및 김상태 의진(金尙台義陣)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다 순국하였다. 윤영구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에서 출생하였다. 윤영구는 1907년 이후 이강년(李康秊)[1858~1908] 의진에 참여하여 충청북도 제천·영...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윤영석(尹永錫)[?~1909]은 정미의병기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 및 김상태 의진(金尙台義陣)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 피살당하였다. 윤영석의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에서 출생하였다. 윤영석은 1907년 고종 황제가 퇴위당하고, 정미7조약으로 군대마저 해산되자, 충청북도 제천에서 창의한 이강년 의...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윤우석(尹遇錫)[?~1909]은 정미의병기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 및 김상태 의진(金尙台義陣)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 피살당하였다. 윤우석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에 따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 이에 반발한 많은 군인이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이때 이강년은 제...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교덕(李敎悳)[1895~1955]은 1915년 대한광복회가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위해 개설한 영주 대동상점을 경영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등 여러 단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교덕의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인겸(仁兼), 호는 동...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이교영(李敎永)[1873~1911]은 1907년 문경 지역 김상한(金商翰)[1842~1917] 부대의 좌익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에는 소모장 이명상(李明相)[?~1909] 휘하에서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 등지에서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교영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노곡리에서 살았다. 의병활동을 전개하는 동안 이경영...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을(李相乙)[1907~1944]은 1920년대 후반 영주청년동맹, 신간회 영주지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에는 영주 2차 격문 투쟁에 가담하였다. 1932년에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이상을은 1907년 12월 22일 지금의 영주시 휴천동에서 출생하였다. 이동식(李東軾)이라는 이름도 사용...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승직(李承稷)[1889~?]은 1915년 건북유한공사(建北有韓公司)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승직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출신이며, 다른 이름으로 이선규(李善奎)를 사용하였다. 이승직은 1915년 음력 6월경부터 서울에 있으면서, 익선동의 차진원(車鎭源),...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용헌(李容憲)[1880~1934]은 1919년 4월 4일 은산장터 만세운동을 주동하다 체포되었으며, 징역 8월형의 옥고를 치렀다. 이용헌은 경상도 풍기군 하리면 금곡동[지금의 예천군 은풍면 금곡리]에 거주하였다. 이용헌은 평소 농사를 짓고 살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응락(李應洛)[1924~1945]은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되었지만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군을 거쳐 1945년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1945년 6월 창사작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하였다. 이응락은 1924년 4월 4일 영주군 영주면 영주리에서 출생하였다. 이응락은 1944년 징용 1기로 징집되어 일본군에 배속되었다....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재덕(李宰德)[1866~?]은 은산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재덕은 경상도 풍기군 하리면 금곡동[지금의 예천군 은풍면 금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이재덕은 평소 농사를 지으며 한학을 공부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던 중에 고종황제의...
-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의 교육자이자 정치가. 이정희(李正熙)[1903~1981]는 일제강점기 때에는 교육자,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관료와 정치인으로 활동한 재선 국회의원이다. 이정희의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맹실(孟實), 호는 효산(曉山)·만정(晩汀)이다.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1435~1528]의 16대손으로, 아버지는 이원춘(李元春)이다...
-
개항기 영주 지역에 정착한 의병. 이현구(李賢求)[1862~1940]는 을미의병기 선성의진(宣城義陣)에 참여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때에는 창씨개명에 항거하여 단식을 진행하다 순국하였다. 이현구의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희겸(希謙), 호는 혜인(兮人)이다. 이황(李滉)[1501~1570]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명호(李命鎬), 어머니는 권연하(權璉夏)[1813~...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 이화백(李和伯)[1884~1968]은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이화백은 1884년 4월 3일 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출생하였다. 이화백은 1919년 4월 9일 안용호(安容鎬)[1884~1942]·최성원(崔盛源)[1894~1926]·남영진(南永鎭)[1894~1920]...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효종(李孝鍾)[1900~1974]은 1933년 예천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재직 중 비밀결사조직인 예천무명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이효종은 1900년 10월 8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에서 출생하였다. 이효종은 1920년 3월 봉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5월 경상북도 임시교원양성소에 들어가...
-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에게 식민통치를 당했던 영주 지역의 역사.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은 식민지 수탈 상황 속에서 전개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정치적으로 영주 지역은 일제의 식민정책 기조에 따른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영주군이 새로 생겼으며, 1940년 영주면이 영주읍으로 승격되었다. 또 1910년대 일제의 무단 폭압정치 하에서...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봉주(林鳳柱)[1879~1921] 대한광복회에서 친일 부호 암살 및 군자금 모집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임봉주의 본명은 임세규(林世圭)이며, 임동근(林東根)이라는 이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1879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에서 출생하였다. 임봉주는 일찍이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풍기광복단(豊基光...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장복규(張復圭)[1826~1896]는 1896년 1월 서상열 의진(徐相烈義陣)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나, 태봉전투(台峰戰鬪)에서 패전한 후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장복규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성삼(聖三), 호는 사이재(四而齋)이다. 아버지는 장원진(張元鎭),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세조 때 적개공신에 녹훈된 연복군...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사건(張師健)[1919~1951]은 1941년 6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한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장사건의 본관은 인동(仁同)으로 1919년 12월 30일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식 이름으로 송평정육(松平精育)을 사용하였다. 장사건은 1...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석창(張錫昌)[1924~1973]은 1944년 일본군에 강제 징병되었다가 탈출한 뒤,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들어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장석창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인서(仁瑞)이며, 아버지는 장재덕(張載德)이다. 1924년 11월 16일 지금의 영주시 안정면 오계리에서 출생하였다. 장석창은 194...
-
1919년 4월 11일 영주의 장수면 호문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4월 11일 영주군 장수면 호문리에 있는 청년 손달익(孫達翼)이 호문리 마을 서당에서 같이 공부하는 장윤덕(張潤德)·송득용(宋得龍)·손용백(孫龍伯)·황학명(黃學明) 등과 함께 호문리 마을 앞산으로 올라가서 벌인 만세운동이다. 그러나 호문리를 순찰 중이던 헌...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전정석(全正錫)[1913~1972]은 광주학생운동에 영향을 받아 1930년 영주 지역에서 격문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전정석은 1913년 3월 4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상망동에서 출생하였다. 전정석은 1928년 1월 6일 영주 언론인을 대표해 김천청년동맹회관에서 개최된 경북기자대회에 참석한 뒤, 집행위원...
-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의 군인. 정병주(鄭柄宙)[1926~1989]는 육군 특전사령부 사령관을 지낸 군인으로 전두환의 12.12군사반란 때 반기를 들다 강제 예편당하였다. 정병주의 본관은 봉화(奉化)이며,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1342~1398]의 방계 후손이다. 1926년 영주군 이산면 용상리 배해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정병주는 19...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응봉(鄭應鳳)[1895~1947]은 1910~1920년대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자금 마련과 신간회(新幹會)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응봉은 1895년 5월 15일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서부리에서 출생하였다. 다른 이름으로 정의극(鄭義極)과 정건중(鄭健中)을 사용하였다. 정응봉은 1915년 영주에서 대동상점(大同商...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태진(丁泰鎭)[1876~1960]은 경술국치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와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활약하였다. 1919년에는 국내에서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태진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노수(魯叟), 호는 외재(畏齋) 또는 서포(西浦...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해붕(鄭海鵬)[1924~1991]은 안동농림학교 제8·9·10회 학생들을 중심으로 1944년 10월 조직된 대한독립회복연구단의 단원으로 1945년 2월 27일 무장봉기를 결행할 계획을 세우고 자금 조달과 동지 규합에 진력하다가, 1945년 3월 10일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해붕은 1924년 12월 9일 영주군 영주면...
-
1925년에서 1926년 사이 영주를 비롯해 경상북도 일대에서 전개된 유림 대표들의 군자금 모집 활동. 제2차 유림단의거는 1925년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시작되었다. 송영호(宋永祜)를 비롯해 영주 지역 출신으로는 송재호(宋在祜)·김동진(金東鎭)·김제직(金濟稷)·권상수(權相銖)·박제형(朴濟衡) 등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6년 관련자들이 체포...
-
일제강점기 영주에 우거하던 강택진 등이 조선13도총간부라는 단체에서 독립활동을 하다 체포된 사건. 조선13도총간부사건(朝鮮十三道總幹部事件)은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13도총간부에서 군자금과 인력을 모집하다가 조직원들이 체포된 사건이다. 1919년 10월 강택진(姜宅鎭) 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조선13도총간부를 결성하였다. 이후 영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재하(趙在夏)[1872~1937]는 대한광복회가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15년 설립한 영주 대동상점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1918년 대동상점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재하는 1872년 1월 16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서부리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조용구(趙龍九)이다. 1913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채기중(蔡基中)[1873~1921]은 1913년 대한광복단과 1915년 대한광복회의 결성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채기중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극오(極五), 호는 소몽(素夢)이며, 채기중(蔡基仲)이라고도 한다. 상주시 이안면에서 아버지 채헌락(蔡獻洛)과 어머니 곡부공씨(曲阜孔氏) 사이 5남으로 출생하였다....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채동진(蔡東鎭)[1878~1967]은 1919년 4월 4일 은산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 일로 체포되어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채동진은 경상도 풍기군 하리면 금곡동[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은풍면 금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채동진은 농사를 지었으며, 평소 한학을 공부하였다. 채동진은 일제 식...
-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서 전개된 청년운동.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청년운동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마련되었다. 이에 1920년대 초반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청년 단체들이 폭발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청년 단체들에 의한 청년운동은 1920년대 민족운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1920년대 초 청년운동은 지역의 유지와 지식인, 청년층을 중심으로 지식 계발·문화 창달·체력증진을 목적으...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봉환(崔鳳煥)[1895~1937]은 1918년 만주 장백현(長白縣)에서 군자금과 의류 등을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제공하였다. 1923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최봉환의 본적지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이다. 최봉환은 영주에서 만주 장백현 14도구로 이주하였다....
-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의 정치가. 최석홍(崔錫洪)[1909~?]은 반공주의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영주군 단장과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최석홍은 1909년 지금의 영주시에서 출생하였다. 최석홍은 대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영주군 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하다가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후 만주 잉커우[營口], 진저우[錦州], 판산[盤...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성원(崔盛源)[1894~1926]은 같은 마을의 안용호(安容鎬)[1884~1942]·남영진(南永鎭)[1894~1920]과 함께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최성원은 1894년 8월 12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출생하였다. 최성원은...
-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서 설립된 농민단체. 풍기소작조합(豊基小作組合)은 1923년 3월 풍기·봉현·안정 등 3면을 중심으로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 집행위원장 강응진(姜應鎭)을 비롯해 각 동 대표 40명의 집행위원이 선출되었다. 풍기소작조합은 소작농의 경제적 이익 옹호와 농민계몽 등을 설립 목적으로 삼고 있다. 풍기소작조합은 1925년에 “세계 조류에...
-
1950년 7월 14일부터 23일까지 영주 지역에서 국군과 북한군이 벌인 전투. 풍기영주지구 전투는 1950년 7월 14일부터 23일까지 오늘날 경상북도 영주시 일대에서 국군과 북한 인민군 간에 치러진 전투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개전 이후 인민군은 빠른 속도로 남하하였고, 1950년 7월 6일 무렵에...
-
일제강점기 영주 풍기 지역에서 설립된 청년단체. 풍기청년회(豊基靑年會)는 1923~1924년경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일대에서 조직된 청년운동 단체이다. 풍기청년회는 1923년 1월 창립된 풍기소작조합과 활동 노선을 함께하고, 조선청년총동맹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활동하였다. 풍기청년회는 설립 시기가 명확하지 않아, 설립 당시 목적을 파악하기가 쉽...
-
1919년 4월 9일 영주 지역의 풍기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영주군 봉현면 농민 안용호(安容鎬)·남영진(南永鎭)·최성원(崔盛源)이 주도하였다. 안용호·남영진·최성원은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장터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가지고 오후 3시 무렵 만세시위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군 헌병들에 의해 안용호 등 주도자들이...
-
1894년부터 1909년까지 영주 지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민중의 자발적인 무력 항전. 한말 의병운동은 1894년부터 1910년 경술국치 직전인 1909년 말까지 펼쳐졌는데, 그 특성에 따라 전기의병[1894~1896], 중기의병[1904~1907. 7.], 후기의병[1907. 8.~1909.]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의병은 1894년에 일어난 갑오의...
-
1945년 8·15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경상북도 영주시의 역사. 영주시는 소백산·도솔산·어래산 등 산들이 어우러진 소백산맥에 안긴 지역으로 전통시대 영천·풍기·순흥의 세 고을이 모여 1914년 새롭게 형성된 곳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1945년 영주군으로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6.25전쟁 때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196...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홍사구(洪思九)[1878~1896]는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스승 안승우(安承禹)[1865~1896]를 도와 제천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896년 제천 남산전투에서 순국하였다. 홍사구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우용(又容), 호는 하포(下浦)이다. 아버지는 홍성유(洪聖裕)이며,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홍훈(洪薰)의 종손이...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 황정흠(黃政欽)[1881~1949]은 1919년 4월 9일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황정흠의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도민(道敏), 이명은 황정흠(黃正欽)이다. 아버지는 황재훈(黃在薰)이다. 황정흠은 어려서부터 신체가 강건하고 힘이 매우 세었으며, 무인의 기질이 있었다고...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 황정흠(黃鼎欽)[1889~1955]은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황정흠의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이경(耳敬), 호는 후송(後松), 이명은 황승흠(黃昇欽)이다. 대사헌을 지낸 황섬(黃暹)[1544~1616]의 11대 종손이며, 아버지는 황재석(黃在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