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성재는 농사일에 종사하는 독실한 천도교인이었다. 1919년 3월 2일 천도교 남원교구장이었던 유태홍으로부터 독립 선언서를 넘겨받아 남원 요소요소에 게시하였다. 유석, 최병현과 함께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 게시판과 사람이 많이 읽을 수 있는 곳에 부착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 해 4월 8일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보안법 위...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김익복은 순흥안씨 사재당(思齋堂) 안처순(安處順)의 손자사위가 되어 남원 지역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후손들이 대대로 남원에 세거하여, 지금은 전라북도 남원시 남골[木洞]과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사창(社倉)에 살고 있다. 아들 김유(金瀏)는 정유재란 때 운량관(運糧官)으로 공을 세워 교관(敎官)에 증직(贈職)되었고,...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양경(揚卿), 호는 추곡재(楸谷齋). 참찬(參贊) 김충익(金冲益)의 후손이며,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된 김신추(金愼樞)의 아들이다. 김익웅은 어버이를 효로 섬겼고 담력이 있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의 상중인데도 의병을 일으켜 나라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지숙(止叔), 호는 수성재(守性齋).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이며, 감정(監正) 김취련(金就鍊)의 아들이다. 김정은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았고, 옳지 못한 것을 보면 분함을 참지 못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였으며,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시묘를 극진히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진경(眞卿), 호는 담암(澹庵), 또는 용암(舂岩). 문정공 김구(金坵)의 후손이고, 충경공 김익복(金益福)의 손자이며, 재간당(在澗堂) 김화(金澕)의 아들이다. 김지순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서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득상(得祥), 호는 우송(友松). 문정공(文貞公) 김자지(金自知)의 9세손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승경(金承慶)의 손자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조정에서 내려온 5현(五賢)의 격문을 보고 아우 김진웅(金震雄)·김진용(金震龍)·김진표(金震彪)에게 말하기를 “지금은 바로 몸을 버리고 임금의 은...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득운(得運), 호는 명암(明庵). 문정공(文貞公) 김자지(金自知)의 9세손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승경(金承慶)의 손자이며, 병자호란 의병 김진영(金震英)의 아우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형 김진영을 따라서 의병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가, 의병을 이끌고 수원으로 올라갔다. 수원에 도착...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청(子淸), 호는 월호(月湖). 고려에서 판서를 지낸 수은(樹隱) 김충한(金冲漢)의 후손이며, 장사랑(將仕郞) 퇴한재(退閑齋) 김천로(金天老)의 아들이다. 정유재란 때 순절한 판윤(判尹) 김경로(金敬老)의 조카이기도 하다. 김집은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폄재(砭齋) 최온(崔薀), 해서(海西) 오정길...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김해(金海). 학성군(鶴城君) 김완(金完)의 후손이다. 김축은 위풍이 당당하였으며 뜻이 고결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금남(錦南) 정충신(鄭忠信)과 함께 전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여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 조정에서는 김축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증직(贈職)을 내렸다....
-
고려 말기 전라북도 남원으로 유배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수은(樹隱). 대제학(大提學) 김인경(金仁鏡)의 고손자이다. 본래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이나 남원으로 귀양 와서 살게 되었다. 관직은 봉익대부예의판서(奉翊大夫禮議判書)에 이르렀다. 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 두신리에 신도비와 세거비가 있고, 두남사(杜南祠)에 제향되었다....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독립 운동가. 1919년 4월 4일 남원읍 장날에 방극용, 형갑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광한루 광장에 모인 1,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남문을 거쳐 시장으로 시위 행진을 전개하였다. 시위 군중이 헌병 검문소에 도착하여 만세 시위를 벌이자 일제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도원(道源), 호는 재간당(在澗堂). 문정공 김구(金坵)의 후손이고, 충경공 김익복(金益福)의 아들이다. 김화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천거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의병을 이끌고 여산까지 올라갔으나,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
통일신라시대 남원태수를 역임한 귀족.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泰). 태종무열왕의 9세손이며, 왕위를 원성왕(元聖王)에게 빼앗긴 김주원(金周元)의 증손이다. 시중(侍中) 김장여(金璋如)의 아들이며, 김양(金陽)의 사촌형이다. 김흔은 822년(헌덕왕 14) 당나라의 국자감에 가서 수학하고, 1년 뒤 당나라 목종(穆宗)으로부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시태상경(試太常...
-
조선 중기 전라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입부(立夫), 호는 홍재(弘齋). 참판(參判) 노숙동(盧叔同)의 고손자이며, 신고당(信古堂) 노우명(盧友明)의 손자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촌 아우인 진사(進士) 노사상(盧士尙)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1,000여 명을 모았다. 팔량치에서 왜적 수십 명을 참살한 후 의병장 김면(金沔)을 좇아 지례(知禮)에서...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문중(文仲).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손자이며,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 노사심(盧士諗)의 아들이다. 노욱은 1627년(인조 5)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파신하였던 인조가 적들의 포위상태에서 내린 비통한 교서를 보고 분연히 일어났다. 동생인 찰방(察...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문신. 노형하는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의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으로 이사하였다. 일찍이 이름과 말이 세상에 알려져 ‘팔미군자(八美君子)’라는 별호가 붙었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장경(長卿). 고려 국자진사(國子進士) 노유(盧裕)의 후손으로, 고조부는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신고당(信古堂) 노우명(盧友明), 증조부는 문...
-
일제강점기에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한 활동가들. 일본 제국주의는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하며 조선 식민지 지배를 노골화했고, 결국 조선은 1910년 주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선 양반 사대부 사회의 중심축이었던 남원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여 일제에 항거하고 국권 회복과 민족 자주성을 되...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선비.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한여(漢汝). 아버지는 증좌윤(贈左尹) 모득익(牟得益)이다. 모한추는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입는 것에 감사하여 제단을 만들어 놓고 북두칠성에게 임금이 장수하기를 기도하였다. 숙종이 승하했을 때는 부모가 상을 당했을 때처럼 소복을 입고 삼년상을 지냈으며, 흉년에 곡식 백 석을 바쳐 국가의 쓰임에 보탬이 되게...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중율(仲律).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의 후손이고, 진사(進士) 문치주(文致周)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문형(文炯)이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등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 때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의 중군(中軍)이 되어 남원성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순절하였다. 정유재란 당시 사촌 아...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이술(而述), 호는 초곡(草谷). 관찰사(觀察使) 행촌(杏村) 박자량(朴子良)의 후예로 참의(參議) 박숭조(朴崇祖)의 손자이다. 박계성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예(禮)로써 몸을 다스려 당세에 이름을 떨쳤으며, 관직은 사직(司直)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7)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산을 털어 병기를 주...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독립 운동가. 박권영은 형 박기영과 함께 1919년 3월 19일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을 지휘, 지도하였다. 산서면의 독립 만세 운동에는 박정주, 이길선, 정봉수, 정호현, 이상일 등이 가담, 주동을 하였는데, 박권영은 이들에게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보내주면서 거사를 지도하였다. 3월 23일 남원 천도교가 주최한...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절도사(節度使) 박대손(朴大孫)의 후손이며, 밀산군(密山君) 박춘성(朴春成)의 손자이다. 박기수는 힘이 세고 병서를 두루 읽어 통달하였다. 1592년(선조 7)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의 형 박흥남(朴興男)과 함께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장군을 따라 이치(梨峙) 싸움에 나아가 많은 공적을 세웠다. 박기수는...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19일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장터에서 유생 박정주, 안성섭 등의 주동으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해 8월경 서울에서 이충모, 김형준, 양재명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박기영은 장병준을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국내의 제반 정세를 보고하게 하고, 상호 연락을 갖...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성(密城). 호는 백헌(栢軒). 증조부는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 조부는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박이(朴頤), 부는 박경(朴慶)이다. 박기화는 성품이 굳세고 절개가 꿋꿋하였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학식이 깊었다. 농암(聾庵) 이현보(李賢輔)와 교제하였다. 정유재란을 당하여 남원성이 위험에 처하...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중옥(仲玉). 송암(松菴) 충현공(忠顯公) 박문수(朴門壽)의 10세손이고, 임진왜란 때 순절하여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된 초곡(草谷) 박계성(朴繼成)의 증손이며, 처사(處士) 박유양(朴惟讓)의 아들이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아...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인숙(仁淑). 승지(承旨) 강수(江叟) 박훈(朴薰)의 후손이며, 박태성(朴泰成)의 아들이다. 박상채는 천성이 굳세고 무예가 뛰어났다. 1728년(영조 4)에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숙부 박태정(朴泰貞)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진사(進士) 오상복(吳尙福)을 찾아가 “적이 팔량치(八良峙)를 넘어오면 남원의...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1891년(고종 28) 통사랑(通仕郞)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벼슬을 지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박석규는 일단의 동지들을 이끌고 일본군 헌병대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았다. 빼앗은 무기로 무장하고 그 길로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으나 불행히 체포되었다. 이후에도 계속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1919년 3·1운동 때에...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군극(君極). 부원군(府院君) 박언부(朴彦孚)의 후손이며, 참판(參判)에 증직된 박검종(朴檢宗)의 아들이다. 박세중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용기가 있었으며,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사(僉使)에 이르렀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상화(尙和), 시호는 충정(忠靖). 밀성군(密城君) 박언침(朴彦沈)의 고손자이고, 예조참판(禮曹參判) 박광영(朴光榮)의 손자이며. 군수(郡守) 박난(朴蘭)의 아들이다. 외조부는 나성령(羅城令) 이지(李漬)이고, 처부(妻父)는 조언국(趙彦國)이다. 박숭원은 1564년(명종 19)에 문과(별시 병과)에 급제하...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성빈(聖彬), 호는 지은당(智隱堂). 정유재란 때 순절한 박계성(朴繼成)의 후손이며, 박사현(朴思賢)의 아들이다. 1728년(영조 4)에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박시채는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동 수십 명을 거느리고 사재를 털어 군량을 마련하여 남원성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같은 고을의 의사 70여 명...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경부(敬夫).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9촌 조카인 사간(司諫) 박린(朴璘)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고향에 돌아와 벼슬길을 단념하며 살았다. 세상에서는 박유홍과 박린을 ‘일문의 쌍절’이라 칭송하였다....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칙(士則). 헌납(獻納) 박증영(朴增榮)의 고손자이며, 이조판서에 증직된 박훈(朴薰)의 증손이다. 박은종은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장(部將)에 이르렀다. 이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적이 하동으로 침입해오자, 장사 300명을 모아 무기를 갖추고 구례 석주(石柱)로 나아가 막았다...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예경(禮卿). 정국공신(靖國功臣) 좌찬성(左贊成) 밀원부원군(密原府院君) 박건(朴楗)의 7세손이고, 진사(進士) 박용현(朴庸賢)의 증손이다. 대동찰방(大同察訪) 박석봉(朴碩鳳)의 손자이며, 훈련부장(訓練部將) 박응사(朴應士)의 아들이다. 아들 박우춘(朴遇春)은 공조좌랑(工曹佐郞)이었고, 손자 박승원(朴昇元)은 생원(...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익서(翼瑞). 부사(府使) 박호(朴瑚)의 고손자이며, 참봉(參奉) 박인손(朴仁遜)의 아들이다. 박필남은 힘이 좋고 일찍부터 병서에 통달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적병들이 숙성령을 넘어오자, 의병을 거느리고 용추동(龍湫洞)으로 들어갔다. 박필남은 낮에는...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석윤(錫胤), 호는 구암(龜巖). 절도사(節度使) 박대손(朴大遜)의 후손이며, 밀양군(密陽君) 박춘성(朴春成)의 손자이다. 박흥남은 어려서부터 담력이 있고 병서에 통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장군을 따라 이치(梨峙) 싸움에 나아가 많은 공을 세웠다....
-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선유(善由), 호는 삼괴(三槐). 봉사(奉事) 방덕이(房德駬)의 아들이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는 담양 출신으로 등재되어 있다. 『호남절의록』에는 천계(天啓) 갑술년에 무과에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우후(虞候)로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을 따라...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공거(公擧). 직제학(直提學) 방사량(房士良)의 후손이며, 주부(主簿) 방후령(房後齡)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봉해진 현감 방복령(房復齡)이 백부이다. 사촌 동생인 방명달(房明達)은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방명선은 1627년(인조 5) 무과에 급제하였다....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중(興仲), 호는 구일(九一). 직제학 방사량(房士良)의 후손이며, 좌승지에 증직된 방덕린(房德驎)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자원하여 호위하였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비변랑(備邊郞)에 제수되었다. 이후 선전청선전관(宣傳廳宣傳官)을 지내고, 훈련원습독(訓練院習...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4일 남원읍 장날을 이용하여 방극용, 형갑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 날 정오경 광한루 광장에 모인 1,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남문을 거쳐 시장으로 시위 행진을 하였는데, 일 군경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방극용, 방명숙, 방진형 등과 함께 순국하였다...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후잠(后潛), 호는 만회(晩悔). 직제학(直提學) 방사량(房士良)의 7세손이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수찬(修撰) 방귀온(方貴溫)의 종증손(從曾孫)이다. 참판에 증직된 방덕유(房德騟)의 아들이다. 방원량은 조찬한(趙讚韓)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중겸(仲謙). 직제학 방사량(房士良)의 7세손이고, 사계(沙溪) 방응현(房應賢)의 손자이며, 방덕화(房德驊)의 아들이다. 방원익은 관직이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과 1624년(인조 2)의 이괄의 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형 방원진(房元辰)과 아우...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이정(而淨), 호는 지족와(知足窩). 직제학(直提學) 방사량(房士良)의 7세손으로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수찬(修撰) 방귀온(房貴溫)의 증손이며, 사계(沙溪) 방응현(房應賢)의 손자이다. 방원정은 해서(海西) 오정길(吳廷吉)의 문인으로, 문장과 행의(行誼)로 이름을 떨쳤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이 난...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이성(而省), 호는 만오(晩悟). 현감(縣監) 방구성(房九成)의 후손이며, 사계(沙溪) 방응현(房應賢)의 손자이다. 방원진은 오정길(吳廷吉)·장경세(張經世)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임진왜란 때 16세의 나이로 양대박(梁大樸)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아버지 상을 당하여 중지하였다....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남양(南陽). 직제학(直提學) 방사량(房士良)의 후손이다. 일찍부터 무예에 뛰어났던 방응언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사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하였다. 방응언은 난이 끝난 뒤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극지(克智), 호는 하천(下川). 직제학 방사량(房士良)의 후손이며, 방덕일(房德馹)의 아들이다. 방처인은 한강(寒崗)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천거로 참봉(參奉)과 수령(守令)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에 들어갔으나,...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분성(盆城), 자는 군보(君甫). 판서(判書) 배흥립(裵興立)의 후손이며, 포도대장(捕盜大將) 배시량(裵時亮)의 고손자이다. 1728년(영조 4)에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켜 경상남도 함양에 본거지를 두고 남원으로 넘어오려고 하였다. 이 때에 남원의 진장(鎭將) 손명대(孫命大)는 정치(釘峙)를 지키다가 팔량치(八良峙)로 옮겨 적의 공격에...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고승. 본관은 수원(水原). 법명은 진종(震鍾), 속명은 상규(相奎), 법호는 용성(龍城). 아버지는 백남현(白南賢)이며 어머니는 손씨이다. 백용성은 16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한용운과 함께 불교 대표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
전라도 남원 출신의 임진왜란 의병장 본관은 장연(長淵), 자는 중간(仲幹), 호는 도탄(桃灘). 참판(參判)을 지낸 수정(水亭) 변처후( 邊處厚)의 5세손이며, 생원(生員) 변호(邊灝)의 아들로 1529년(중종 24) 남원에서 출생하였다. 남원의 운봉(雲峰) 도탄(桃灘)에 살았으므로 도탄선생이라 칭하였다. 일재(一齋) 이항(李恒)과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
전라북도 남원시 지역에 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설치되었던 특수행정구역. 향(鄕)·소(所)·부곡(部曲)은 지방 행정의 말단 단위로, 군현 밑에 있는 하부 조직이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양민과 달리 그 신분이 노비·천민에 가까운 열등 계급이었다. 군현의 사람들이 부곡민과 혼인하면 그 소생 또한 부곡민에 편입시켰다. 부곡은 향과 더불어 호장과 같은 토착 관리들의...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일 아침 유태홍이 남원군 덕과면 사율리의 천도교인 이기원으로부터 독립선언서 40여 장을 수령하여 자신의 아들인 유석과 김성재, 최병현 등 5명의 천도교인을 불러 선언서의 내용을 알려주고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 게시판 등 공공기관의 게시판에 붙이도록 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유태홍은 징역 1년, 유석과 김성재는 각각...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스무 살을 전후하여 동학에 입교하여 옥고를 치른 후 천도교 남원교구장이 되었다. 1919년 당시 나이 53살 때 아들 유석 등과 함께 공공기관의 게시판에 독립선언서를 붙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광복 직후 남원군민들은 그를 남원군 건국위원장으로 추대하였는데,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으로 1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1950년...
-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통시대에 외적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나선 민간인. 의병이란 순수한 민간인 신분으로, 국가의 운명이 위급할 때에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가리지 않고 의를 위하여 과감하게 일어선 의용병이다. 의병의 전통은 삼국시대에 비롯되었으며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한말에 이르고 있다. 특히 한말 의병은 항일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남원 출신 의...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천도교인이던 이기원은 임실군 오수리에 있는 천도교당의 전도사인 이기동(李起東)과 친분이 두터웠다. 1919년 3월 2일에 이기동이 가져다준 독립선언서 40여 장을 같은 마을의 황동주와 황석현에게 배포하였고, 남원군 금리에 있는 천도교 교구실로 유태홍을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독립선언서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도록 조치를 취...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1929년 18살의 이두석은 우리나라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문맹 퇴치와 농촌 경제 건설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형 이두현(李斗鉉)과 함께 수양전진계(修養前進稧)를 조직하였다. 40여 계원들과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를 확장하고 청년들의 체력을 단련시키는 한편 야학을 열어 문맹 퇴치와 독립 사상 고취에 전력을 기울였다. 천황...
-
1392년 조선 건국에서 1910년 한일합방까지의 전라북도 남원 지역의 역사. 현재의 남원은 조선시대 남원도호부와 운봉현이 통합된 것이다. 남원부는 조선 건국 후인 1413년(태종 13) 남원도호부로 바뀌었으며, 운봉현은 남원부의 속현으로 있다가 조선 건국 후인 1392년(태조 원년)에 독립되었다. 이후 남원도호부는 1739년(영조 15) 양찬규(梁纘揆)의 반란으로 인하여 일신현(...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협계(陜溪).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수문장(守門將) 태윤민(太潤民)의 아들이다. 태천생은 어려서부터 궁마(弓馬)를 좋아했으며 재지(才智)가 뛰어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태귀생(太貴生)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도 의병을 일으켜 남원성을 지키다가...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협계(陜溪), 자는 기팔(起八).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현감(縣監) 태석(太碩)의 아들이다. 태팔회는 천성이 순후하고 용모가 단정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련(太福連)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군량도 모아 공주(公州)로 인조를 호가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난이 평정된...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유원(流遠). 하연해(河漣海)의 아들이며, 양진당(養眞堂) 하만리(河萬里)와는 칠촌 간이다. 하득도는 성품이 우아하고 지조가 있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당숙 및 같은 고을의 의병들과 밤낮으로 북진하여 청주에 이르렀다. 화의(和議)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서 동지 8명과 단구(丹...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 자는 자장(子長), 호는 양진(養眞). 안렴사(按廉使) 하중용(河仲龍)의 후손이며, 도사(都事) 하극윤(河克潤)의 아들이다. 하만리는 학행이 뛰어나고 언 강에서 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할 만큼 효성이 지극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폄재(砭齋) 최온(崔蘊), 당촌(塘村) 황위(黃暐) 등과 함께...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청주(淸州). 문양공(文襄公) 한계미(韓繼美)의 후손이며, 승지(承旨)에 증직(贈職)된 한언윤(韓彦胤)의 손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에 돌아왔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公州)로 달려가 인조의 어가를 호위하였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진무원종공신(振...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기팔(起八), 호는 율촌(栗村). 참판 안양공(安襄公) 한종손(韓終孫)의 후손이며 한범기(韓範箕)의 아들이다. 한동섭은 1728년(영조 4)에 향교의 책임자로 있었다. 이인좌의 반란이 일어나 고개 너머에서 반군들의 세력이 크게 떨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우 한동헌(韓東憲)과 집안의 노비 6명을 이끌고...
-
고려 후기 남원부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대흥(大興). 평장사(平章事) 한유충(韓惟忠)의 아들이다. 한문준은 인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재주 있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외직으로 나가 장주(長州)·장흥(長興)·남원(南原) 세 고을의 부사(副使)와 남경부유수(南京副留守)를 역임하면서 자비로운 정치를 베풀었다. 그의 제자 오세재(吳世材)가 시를 지어 “남녘에서는 세 군(郡...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고(士高), 호는 수석정(漱石亭). 안양공(安襄公) 한종손(韓終孫)의 후손이며 한흥보(韓興補)의 아들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청주와 영남에서 적이 세력을 크게 떨친다는 말을 듣고 남원부로 달려갔다. 남원부사 심정붕(沈廷鵬)을 만나서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격문을 지어 전주감영으로 보냈...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인.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상오(相五). 증조부는 승지(承旨) 한복(韓輹), 조부는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한응문(韓應文), 아버지는 수운판관(水運判官) 한경생(韓庚生)이며, 외조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조효원(趙孝元) 장인은 병조참판(兵曹參判) 이경헌(李景憲)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산현감(定山縣監)으로 있...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한응성은 장성한 뒤에는 처가인 순창 귀미(龜尾)로 옮겨 살았다. 호가 귀와(龜窩)인 것은 귀미에서 따온 것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기(景期), 호는 귀와. 청성군(淸城君) 한종손(韓終孫)의 고손자이고, 대호군(大護軍) 한축(韓軸)의 아들이다. 한응성은 중봉(重峰)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이(士爾). 삼중대광(三重大匡) 한난(韓蘭)의 후손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 한신재(韓信栽)의 아들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나이 20세였던 한팔기는 숙부 한신필(韓信弼)과 함께 좌영장(左營將) 손명대(孫命大)를 찾아갔다. 손명대는 그를 장하게 여기고 부장으로 삼아 군졸 100여 명을...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수이(受而). 안양공(安襄公) 한종손(韓終孫)의 6세손이며 어모장군(禦侮將軍) 한응록(韓應祿)의 아들이다. 아저씨뻘인 한경생(韓慶生)과 함께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어버이의 병환에 살을 베어 구환하여 고을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적병에게 포위된 상태에...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중구(仲久), 호는 고산(孤山). 별좌(別坐) 허사익(許思益)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4) 34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 등을 역임했다. 1616년(광해군 10)...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대옥(大玉). 판서(判書) 형규(邢珪)의 후손이며, 진사(進士) 형우안(邢友顔)의 증손이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남원성이 포위당하자 입고 있던 비단옷에 “죽어도 난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 된 직분(死不避亂 臣子職分)”이라는 여덟 글자와 이름을 혈서로 쓴 뒤 성으로 달려갔다. 남원부사 임현(任...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여원(汝願). 세종 때 재상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증직(贈職)된 황경구(黃慶龜)의 아들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형 황함(黃諴)과 조카 황익계(黃翼繼), 동지 장우정(張于井)·최여대(崔輿垈) 및 의사 70여 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남원성을 지켰다. 1735년...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정숙(正叔). 양정공(良靖公) 황사효(黃事孝)의 증손이다. 황대중은 효성이 지극하여 효건(孝蹇)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참봉(參奉)에 천거되었다. 임진왜란 때 장사(壯士)로 뽑혀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병사(兵使) 황진(黃進)을 따라 진주성 싸움에도 참가하였다. 성이 함락되면서 겨우 빠져나온 그는 통제사(...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字)는 자휘(子輝), 호는 당촌(塘村).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의 손자이며 현령(縣令) 황정열(黃廷說)의 아들이다. 아들중에 학행이 높았던 황신구(黃信龜)와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된 황임구(黃任龜)가 있다. 황휘는 어려서부터 시 쓰기를 좋아하였으며, 기암(畸菴) 정홍명(鄭弘溟)의 문인이다. 1636...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사술(士述).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황함(黃諴)의 아들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숙부 황대(黃戴)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집안의 노비를 이끌고 남원성으로 달려가 여러 의사들과 함께 동문과 북문을 지켰다. 고종 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追贈)되었고, 충신의 정려(旌閭)가...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군익(君翊).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의 아들이다. 황정직은 음직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무과에 급제하여 1606년(선조 39) 수의부위(修義副尉)가 되었다. 1607년(선조 40) 전주병마절제도위(全州兵馬節制都尉), 1608년(선조 41)에 옥구현감(沃溝縣監), 1611년(광해 3) 제주목판관(濟州...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명보(明甫), 시호는 무민공(武愍公). 황희(黃喜)의 5세손이며, 황윤공(黃允恭)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황위(黃暐)는 황진의 손자이다. 1576년(선조 9) 27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이듬해 종계변무(宗系辨誣) 일로 사신 황림(黃琳)을 보좌하여 군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