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후기의 효자. 강천복의 후손들은 현재 진도에 살고 있으며 예인 활동가가 많다. 강천복은 무당 천소사(千召史)의 남편으로 무부(巫夫)였다. 강천복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상황에 처하자 자기 넓적다리를 베어 먹여 연명하게 하는 효행을 했다. 1789년(정조 10)에 정조는 그의 효행을 높이 사서 복호(復戶: 세금을 면제받는 조치)를 내렸다....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에 있는 효열비각. 강헌각은 효자와 열녀의 정신을 기리고 사회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진도읍 동외리에 세운 효열비각이다. 1922년 군민과 사회의 기강을 진작하고자 세웠으며, 비각 설립에 관여한 인물은 조경신, 박원배, 감역(監役) 이경욱, 이병수이다. 강헌각을 조성하기 위해 강헌계가 조직되었다. 진도읍 동외리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헌각 내부에는...
-
특별한 인물이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碑). 비(碑)는 어떤 인물이나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므로 진도에 소재하는 비(碑) 전부는 기념비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충(忠)·효(孝)·열(烈)과 관련된 비는 삼강비(三綱碑)로, 학문·교육과 관련된 비는 학행비(學行碑)로, 치적과 관련된 비는 선정비(善政碑)·불망비(不忘碑)로 따로 구분될 수 있다. 따라서...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김해. 자는 백이(百而), 호는 성재(誠齋). 아버지는 김만도(金萬道)이고 어머니는 박종관의 딸이다. 부인 창녕조씨와의 사이에 4형제를 두었다. 1679년(숙종 5)에 태어났으며 1744년(영조 20)에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련벽은 7세에 아버지를 여의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3년 시묘를 살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모친이 병이 들어 유자를...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에 세워진 단군을 배향(配享)하는 사우(祠宇)·묘당(廟堂). 고대인들은 노거수 아래에 돌을 쌓아 단군에 향사하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발해에서는 보본단과 대숭전을 수축하였다. 고려에서는 단군묘, 숭령전, 단군릉과 단군묘를 설치하고, 삼성사를 세웠다. 조선에서는 단군묘와 삼성사를 수리하는 등 국조숭배를 계승해 왔다. 그러나 일제는 우리 민족의 단일민족정신을...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에 세워진 단군과 기자를 모신 사우.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단군전을 모두 폐지시켰다. 이에 뜻있는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단군전 건립을 극비리에 암중모색하여 오던 중 1919년 3·1 운동을 기점으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진도군에서는 1922년 1월 15일 100여 명의 유림들이 단기사 건립을 위해 기성회(회장 박진원)를 발족시켰다. 한승복(...
-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에 있는 조선후기 문신 정민익을 배향한 사우. 묵제 정민익(丁民翼)[1781~1861]은 금호도에 머물면서 평생 벼슬을 탐하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는 것에 뜻을 두었다. 금호도는 섬의 크기는 작지만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정민익은 이곳에 관해정(觀海亭)이라는 정각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해남과 진도에서 22명의 제자가 모였다고 전한다.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
-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에 정려가 있는 조선 중기 효자.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박총룡(朴叢龍)[1494~1532]이고, 어머니는 장흥임씨(長興任氏) 임처경(任處京)의 딸이다. 박대형의 12세손으로 박천재(朴薦在)가 있다. 박대형(朴大泂)[1532~1590]은 5세에 자신이 유복자임을 알고 부친의 묘를 찾아 조석으로 통곡했으며, 편모 임씨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했다. 편모가 병을 얻어...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밀양. 자는 후옥(厚玉), 호는 구절재(九節齋). 박용(朴容)의 둘째 아들 박정(朴挺)의 11세손이다. 아버지 박유징(朴宥徵), 어머니 현풍곽씨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1818년 10월 10일 진도군 의신면 가단리에서 태어났다. 창녕조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에는 박진종(朴震宗)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진종은 1800년...
-
고려 후기 대몽항전을 이끈 삼별초의 장수 배중손을 기리기 위한 사당. 고려 1270년(원종 11)에 몽고 침략에 대항하여 거병한 삼별초 항쟁의 지도자 배중손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제향일은 6월 15일이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임회면 굴포리 마을에는 당(堂)이 있어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는 농악을 연주하고 배중손 장군과 삼별초군, 고산 윤선도 제를 모시는 전통이 있었다. 195...
-
전라남도 진도군에 유배되었던 노수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던 서원. 진도에 귀양살이를 하던 유학자들이 진도 군민들을 가르쳐 문풍을 일으켰으므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세워 모시는 전통이 생겼다. 봉암서원에 대한 첫 기록은『영조실록』에 나오며 1759년 간행한『여지도서』 진도 「단묘(壇廟)」 항목에도 나온다. 1791년『진도군읍지』에 따르면 원생이 60명이었다고 한다. 이 서원은...
-
진도군 지역에 있는 선현이나 조상의 신주, 영정을 모셔두고 배향하는 곳. 한말 이전에 사원(祠院)을 설립하려면 나라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이를 어길 때에는 엄중하게 다스렸다. 다만 가문의 선조의 신위를 모시는 가묘(家廟) 형태의 사당은 둘 수 있었고, 제사를 목적으로 하는 묘소 주변에 재각(齋閣)을 둘 수 있었다. 가묘식 사당은 위패를 모시는 곳이고 재각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에 있는 충·효·열을 실천한 사람을 기리는 비. 삼강비 또는 충효열비는 충·효·열을 실천한 사람, 즉 국가에 충성을 하거나 부모에게 효도를 한 사람, 부부간에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킨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을 말한다. 1945년 이전에 세워진 충효열 비석 중에서 현재 확인이 가능한 비석은 12기인데, 이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비는 삼강비(三綱碑)이다....
-
선정을 베푼 관리를 위해 진도 지역에 세운 비석. 불망비라고도 하는데, 선정을 베푼 관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그 덕을 기리기 위해 고을사람들이 세워주는 비석이다. 1976년에 발간된 『진도군지』에 따르면 1945년 이전까지 진도에 세워진 선정비는 총 52개로 보고되었으나, 2006년 현재 확인 결과 그 중에서 6개는 소재를 파악할 수 없다. 기존에 보고되지 않은 2기, 즉 임...
-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송산리 송산마을에서 지내는 마을 시제(時祭). 마을 시제를 동네 시제라고도 부르고 있다. 자식이 없던 송산마을 출신의 경주이씨, 원주이씨, 장흥임씨, 유인 청주한씨, 유인 밀양박씨, 강릉유씨, 유인 창령조씨, 장흥임씨 등이 마을에 재물을 기부하고 제사를 지내달라고 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들의 기부한 재물의 규모는 논 2400평, 밭 300평, 임야 1정 등이...
-
위난을 당하여 목숨으로 정조(貞操)를 지켰거나 또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난과 싸우며 수절(守節)한 부녀자.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의 기본단위이고 근간인 부부의 도리인 부위처강(夫爲妻綱)을 3대 강령의 하나로 삼았다. 부부란 성적 결합 이전에 자녀 생산과 가문 계승의 사회 기초단위였으며, 가정의 안정은 지역공동체 안정질서의 바탕이었다. 그렇다고 조선 사회...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에 있는 유림 조직. 유도회는 향교와 더불어 유교의 구심체 역할을 하는 유림의 조직이다. 유도회 진도군지부는 인·의·예·지·신을 주체로 효 사상과 형제간의 화목을 교육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유도회 진도군지부의 주요 사업은 유교의 대중화·현대화·세계화, 도덕성 회복 및 전통문화 육성, 유교윤리의 연구·홍보 및 교육, 환경보호운동 등 건전사회 육성, 정기...
-
지역의 충신, 효자, 열녀, 지식인, 선행인 등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건축물. 비각(碑閣)은 안에 비를 세워 놓은 집이며, 정려(旌閭)는 충신, 효자, 열녀 등에 대하여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기리는 것이다. 진도군에는 약 20개가 전해지고 있다. 1945년 이전에 건립되어 현존하는 정려·비각은 [표1]과 같다. @@[표1] 진도군 정려, 비각 현황(1945년...
-
특정인물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 진도에는 충효열비, 선정비, 학행비, 기념비 외에도 추도비 또는 추모비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비(碑)들이 있다. 문익점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문익점 추모비가 있으며, 전향교장을 역임했던 인물인 김희남을 추모하는 비도 있다. 한편 진도의 간척에 많은 역할을 한 일본인 복도이랑[福島二郞]이 간척사업을 하다 사고로 죽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
-
이충무공과 진도에 공이 큰 인물들을 배향하기 위하여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에 건립하였던 사우.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전라남도 진도에서는 종전의 한명복의 가묘를 폐하고 그 자리에 덕풍부원군, 이충무공을 주벽으로 하여 좌측에 소위장군(昭威將軍) 김수생(金水生), 주부(主簿) 박린수, 참판(參判) 박린복, 수문장(守門將) 하수평을 종향(從享)하였다. 우측에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이천...
-
학행과 학덕이 높은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서 새운 비석. 공립학교가 세워지기 이전에도 진도의 교육열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각 마을에서는 서당을 세워 선생을 모셔다가 양식과 월사금을 모아서 경영했다는 기록이 있다. 해당 마을에서는 학행과 학덕이 높은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학행비를 세웠다. 현재 진도군에는 10기의 학행비가 전해지고 있다. 1945년 이전에 진도지역에 세워진 학...
-
전라남도 진도의 창군(創郡), 설읍(設邑)에 공이 있는 인물을 배향한 사우. 일반적으로 향현사는 고을에 공이 있는 사람들을 모시는 사당을 말한다. 진도의 향현사는 창군 설읍 유공자인 팔위(八位, 즉 박연, 박근손, 조복명, 김석곤, 박인복, 박정, 김중연, 조맹문)와 박근무, 하극창, 박의경, 최민명, 조복리, 임은, 김백균 등을 제향하고 있다. 전라남도 진도군의 향현사는 1868...
-
진도군 일대의 지역에서 역대로 부모를 섬김에 있어 효를 극진히 한 자식. 유교를 이념으로 성립한 조선왕조는 지배체제와 사회질서의 요체를 예(禮)에 두었다. 예 중에서도 특히 자연적인 혈연관계에서의 효제(孝悌)를 기본 덕목으로 삼아 인위적인 정치체제에 중첩시킴으로서 치국(治國)의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조선왕조에 있어 효는 가정 질서의 기본이면서 사회 질서의 기둥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