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654 |
---|---|
한자 | 許誠 |
영어공식명칭 | Heo Seong |
이칭/별칭 | 맹명(孟明),신암(愼菴),공간공(恭簡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환 |
[정의]
조선 전기 하양이 관향인 문신.
[개설]
허성(許誠)[1382~1442]은 문과 급제 후 병조 좌랑(兵曹佐郎)·지평(持平)·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냈다.
[가계]
허성의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맹명(孟明), 호는 신암(愼菴),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아버지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낸 허주(許周),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합천 이씨(陜川李氏), 할아버지는 판도 판서(版圖判書)를 지낸 허귀룡(許貴龍), 증조할아버지는 도관 정랑(都官正郎)을 지낸 허윤창(許允昌)이며, 부인은 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의 딸 정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활동 사항]
허성은 1402년(태종 2)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1407년(태종 7) 병조 좌랑 재임 중 관청 하인을 죽게 하여 유배되었다. 1411년(태종 11) 지평으로 있으면서 불법을 저지른 우정승(右政丞) 조영무(趙英茂)를 강하게 탄핵하였는데, 태종이 노하여 허성을 파직시켰다. 하지만 1421년(세종 3) 상왕이 된 태종은 낙천정(樂天亭) 연회에서 허성에게 춤을 추라 명하고는 세종을 돌아보며 “이 사람은 나의 어진 지평이다"라고 말하였다.
1425년(세종 7)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1427년(세종 9) 우사간(右司諫)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참찬(參贊)이 되어 기복(起復)[부모 상중에 있는 자를 관리로 기용하는 것]이 그릇된 것임을 강론하였다. 또한 우대언(右代言)이 되어 승려들을 부역시켜 관청을 수리하고, 벼슬로 상주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아뢰었다. 1429년(세종 11)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였다. 이후 대사헌(大司憲)·형조 좌참판(刑曹左參判)·예조 우참판(禮曹右參判)·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1435년(세종 17)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랐다. 이듬해 관직을 사직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제수되었다. 이후 이조판서에 올랐는데,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사람들이 사사로운 청탁을 하지 못하였다. 1438년(세종 20)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문형(文衡)을 관장하였다.
[묘소]
허성의 묘소는 경기도 풍덕현(豊德縣) 채련동(採蓮洞) 태산(兌山)[지금의 북한 개성특별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