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1432
영어공식명칭 The Biggest Tongil Bhaisajyaguru Sutra in the World of Donghwasa Temple
이칭/별칭 통일약사여래대불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35]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주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2년 11월 27일연표보기 - 세계최대 동화사 통일약사대불 통일약사여래대불 점안 대법회
동화사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35]지도보기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에 위치한 동화사에 있는 세계 최대 석조약사여래불.

[개설]

불상은 재료면에서 석조(石造), 소조(塑造), 동조(銅造), 목조(木造) 등으로 분류하며, 형태면에서 입상(立像), 좌상(坐像), 와상(臥像) 등 종류가 있다. 통일약사대불은 돌로 만들어져 서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석조 입상에 해당한다.

[대불을 필요로 한 민중]

불상(佛像)은 말 그대로 깨달은 자의 형상이라는 의미로서 대중들이 꾸준히 기도드릴 수 있는 대상으로 조성되어 왔다. 그 가운데 대불(大佛)은 특별히 거대하게 만든 불상으로 일반적으로 높이가 4.8m 이상인 불상을 지칭한다. 이때 4.8m라 함은 옛 문헌에 남아 있는 1장 6척의 크기를 오늘날 수치로 환산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의 키가 1장 6척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그런 연유로 흔히 장육불상(丈六佛像)이라 일컫는 크기의 불상은 동경할 만한 대불로 여겨졌다. 장육불상을 비롯한 우리 전통 대불을 기준으로 할 때 30m 높이에 달하는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의 규모가 얼마나 장엄한지 짐작할 만하다.

대불을 세우기 시작한 풍습은 일찍부터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지에서 유행했다. 손오공 이야기로 유명한 현장법사(玄奘法師)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도 대불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 나올 정도이다. 대표적으로 5세기에 7m 크기로 제작된 인도 카시아의 열반상(涅槃像), 아프가니스탄 바미얀에 있는 두 구의 마애대불(磨崖大佛)이 각각 40m, 60m의 크기로 유명하고, 돈황 용문 석굴에 있는 7세기 중국 천봉사비로사나대불이 17m 높이의 위용을 자랑한다.

한국의 대불은 세련된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고루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삼릉계 마애불좌상이 5m 높이의 대불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에도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18m 거대 석불상으로 세워져 보물 2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도 충청북도 괴산에 있는 10미터 크기의 미륵석불입상이 보물 제96호,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에 있는 10m 높이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보물 제217호, 경기도 파주군 용미리의 17m에 달하는 석불입상이 보물 제93호로 각각 지정되어 거불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전북 김제군 금산사에 위치한 10m 크기의 미륵삼존상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름나 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국가의 어려움을 부처님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대규모 불사를 거행하곤 하였다. 이러한 명맥을 1992년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에 조성된 33m 높이의 약사여래입상이 이어가고 있다.

예로부터 대불을 조성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존중과 경외심을 드러내고, 멀리서나마 불상을 향해 예를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부처님의 자비심이 먼 데까지 미침을 의미한다.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에 위치한 팔공산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의 경우 민족통일에 대한 염원을 널리 퍼뜨리고자 조성되었다. 그 웅장함에서 알 수 있듯 세계 최대 석조약사여래불로서 대구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동화사에 세워진 높이 33미터나 되는 세계 최대 석조약사여래불로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국민적 기원이 담겨 있는 불상이다.

[우리나라 불교성지 중 한 곳 팔공산 동화사에 세워진 약사대불]

대구광역시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나들목 중에 대표적으로 팔공산 나들목이 있다. 대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팔공산이라는 사실과 대구 사람들이 팔공산에 대해 갖는 애정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곳 나들목에서 15㎞ 동북쪽으로 올라가면 팔공산 동화사가 자리 잡고 있다. 팔공산은 신라 때 나라의 제사 대상이 되었던 다섯 산악[오악] 중에 중악으로 불릴 만큼 신성시되던 곳으로 경주 남산과 더불어 불교성지로 불렸다. 고려 때에도 변함없이 국가적 제사의 대상이 되었고, 숭유억불 정책이 있던 조선시대에도 그 영향력이 막강하여 불교명산으로서 위세를 떨쳤다. 그로 인해 유서 깊은 사찰과 불교 유적이 한 데 모여 있는데 파계사, 은해사, 부인사, 갓바위, 제2석굴암 등이 대표적이다.

동화사는 대구광역시 및 경상북도지역을 관리하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9교구 본사로서 역사가 깊다. 동화사는 선원이라는 참선수행기관, 강원이라는 경전교육기관, 율원이라는 계율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모두 갖추고 있어 총림사찰이라고도 불린다. 사찰 입구에 있는 높이 33m의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은 동화사의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거대한 불상이 내뿜는 기운에 누구나 압도당할 만하다. 그런데 동화사성보박물관 2층 법당에 들어서서 약사대불을 바라보면 불상이 의외로 소박하게 보이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대형 통유리창이 자연스럽게 액자 역할을 하고, 약사대불과 뒤편 팔공산 병풍바위가 하나의 그림이 된다.

「동화사사적비(桐華寺事跡碑)」(1931)의 연기설화에 따르면, 493년(소지왕 15)에 극달(極達)화상이 팔공산 남쪽 기슭에 세운 절의 최초 이름은 유가사(瑜伽寺)였다. 봉황이 알을 품는 봉소포란형(鳳巢抱卵形)의 명당터에 세운 절이다. 832년(흥덕왕 7)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유가사를 다시 세울 때 겨울임에도 오동나무가 활짝 피어난 것을 기이하고 상서롭게 여겨 동화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동화사는 조선시대에 또 한 번 그 이름을 떨치는데 임진왜란 시기 사명대사에 의해서였다. 선조 때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승군을 일으킨 사명당동화사에서 영남승군사령부를 지휘한 까닭이다. 보물 제1,505호로 지정된 사명당 초상화인 「사명당대장진영」동화사에 보관되어 있고, 봉서루 현판에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라 쓰여 있어 지금도 사명대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현존하는 대부분 건물들은 조선 영조 때 중창한 건물들이며 동화사는 총 여덟 번의 중창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대가람의 위치를 고수해 오고 있다. 이렇듯 예로부터 나라의 중대한 일이 있을 때 중심지 역할을 해온 곳이 바로 동화사이다. 어쩌면 동화사에 통일약사대불이 세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며 동화사가 우리민족의 역사에 차지는 위상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통일약사여래대불의 조성은 팔공산 동화사 일대가 다시 한번 우리민족에게 호국·통일 불교의 성지이자 본산임을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마지막 과제인 통일 성취를 이루기 위한 대불 조성은 불교사상과 통일정신이 하나로 뭉쳐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족 대화합을 염원하기 위한 통일약사대불을 대구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동화사에 건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 최대 규모 통일약사대불을 만나러 가는 108계단길]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을 보기 위해 동화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두 곳이다. 자동차를 이용하여 팔공산 집단시설지구 쪽 동화문을 통해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방법과 도보를 통해 동화천 쪽으로 오르는 방법이다. 두 곳 모두 놓치기 아까운 풍경을 선사하므로 한 바퀴 모두 둘러보는 것이 가장 좋다. 일반적으로 서쪽의 일주문으로 진입하여 절의 전체 가람 배치를 온전히 보는 것을 권장한다. 대웅전과 부도탑까지 걷다보면 전각 60여 개와 불탑을 관람할 수 있어 넓고 탁 트인 가르침의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을 만나러 가는 길에 해탈교라는 작은 다리를 만나는데, 해탈교를 건넘으로써 다사다난한 속세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품으로 들어감을 실감할 수 있다. 다리 아래로는 팔공산 깊은 개울이 흐르고 있어서 사시사철 푸르고 시원한 인상을 준다. 명산의 고찰답게 동화사 경내 곳곳에는 나무가 울창하고, 맑기로 유명한 계곡이 쉼 없이 흘러간다. 이윽고 동화사 통일약사대불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는데 폭 12m의 108개 층계로 이루어져 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고뇌를 한 가지씩 버림으로써 백팔번뇌를 견뎌냄을 상징하고 있다. 그 과정을 다 거치고 올라선 33,058㎡[1만평]의 도량에는 맨 먼저 통일대불전이 눈에 띄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3층의 동탑과 서탑 사이로 장엄한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동화사 통일약사대불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불상과 조화를 이룬다.

현대사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는 민족통일을 염원하기 위해 세워진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은 그 조성과정 또한 극적이어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치 웅장한 석불은 원래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던 황등석이었다. 불상 원석의 무게가 무려 2,000t이고 이를 받치고 있는 좌대 원석의 무게는 3,000t에 달하는데 108명의 석공이 장장 7개월간 다듬어 완성되었다. 각계 전문가들의 고증과 조언을 거쳐 예술적으로도 높이 평가받는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은 원석을 8등분하여 조성하였다.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출발한 각각의 대불 작품이 대형트럭에 얹힌 채 거북이걸음으로 300㎞ 거리의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에 있는 동화사까지 운송된 장면은 지금도 불교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이로써 완공된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의 규모는 가히 기록적이다.

부지면적 3만 3,050㎡에 1990년 10월 26일부터 불사를 착공하여 대불 점안 대법회를 1992년 11월 27일에 가졌으니 25개월의 기간이 소요된 대대적인 공사였다. 이목을 집중시킨 석조대불의 높이는 17m에 좌대 높이가 13m, 지하암반에서 참배단까지가 3m여서 총 33m 높이다. 대불의 최대 둘레 또한 16.5m여서 거대한 크기를 더욱 실감할 수 있다. 대불의 부속시설 또한 국내 최대로 꼽히는데 두 삼층석탑의 높이가 각각 17m이며 원석 2,000t에 달한다. 또한 두 석등 역시 7.6m의 높이에 200t의 원석으로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좌대 난간, 참배단, 배면 병풍석에 원석 5,000t이 쓰였다.동화사 통일약사대불 점안식을 거행한 1992년 11월 27일 당시는 때마침 대통령 선거기간이어서 쟁쟁한 대통령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0만 명이 넘는 불교 신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성황을 이룬 자리에 민자당 김영삼 후보, 민주당 김대중 후보, 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한 자리에 참석하였다. 따라서 이날은 정치계의 이슈와 불교계의 이슈가 맞물려 분위기가 더욱 고조된 날로 기록에 남아 있다.

[민족의 숙원 통일을 이룩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은 통일약사대불]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은 설악산 신흥사에 있는 청동좌불,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청동미륵불과 더불어 3대 통일약사대불로 불린다. 이들 통일약사대불은 이름 그대로 부처의 자비와 평화가 온누리에 펼쳐지기를 열망한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동화사의 경우 특히 약사여래대불로 조성한 이유가 있다. 원래 팔공산 일대는 약사여래신앙이 왕성한 지역이었다. 저마다 개인 건강을 지키고 큰 재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원하기 위해 약사여래불을 모셔왔다. 건강과 안녕을 비는 신도들이 많이 찾는 약사신앙의 중심지인 팔공산 곳곳에는 이미 수많은 약사여래상이 조성되어 있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고통과 질병이 없는 이상세계를 완성하고자 하는 부처님으로 오랜 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약사여래는 과거세에 약왕이라는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해 발원했다고 한다. 원래 동화사는 극달화상이 창건한 이래 고려말까지 미륵신앙 사찰이었으나 약사신앙의 영향과 ‘남북의 통일 성취’라는 발원으로 거대한 석조통일대불이 조성됐다.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은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하루빨리 성취하여 분단의 아픔을 해소하고 민족 대화합을 이루어 내는 데 그 조성 이유가 있다. 통일에 걸림돌이 되는 갈등을 치유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속히 이루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다.

동화사 약사여래대불은 연화 위에 서 있는 입상으로서, 왼손에는 약함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시무외인이란 다섯 손가락을 들어 어깨까지 올린 손 모양으로, 중생이 갖고 있는 두려움을 부처의 힘으로 없애 준다고 해석된다. 명호를 외우고 기도하면, 신체의 질병과 마음의 근심까지 낫게 된다는 동화사 통일약사여래대불 앞에는 오늘도 수많은 신자가 “약사여래”를 부르며 절을 올린다.

1992년 11월 27일 동화사 통일약사대불 점안법요식(點眼法要式)에서 원로의장 서암은 법어(法語)를 통해 “중생의 병을 치유하는 약사여래가 우리 민족의 아픔인 분단의 병을 치유함으로써 민족통일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해 그 의미를 더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극복해야 할 이 점은 「통일약사대불 봉안 연기문(統一藥師大佛 奉安 緣起文)」에도 적혀있다. “두 손 모아 부처님께 기원하옵나니 불사에 정성 모아 동참한 인연공덕으로 국토는 우순풍조(雨順風調)하고 중생은 고통과 번뇌를 초월하여 불국정토를 성취하게 하옵시며 우리 모두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 되어 통일되게 하옵시어 영겁(永劫)의 시간 흐르고 또 흘러도 자손만대 통일조국에서 복락 누리게 하옵소서.”

[다양한 불교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통일약사대불]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의 지하전시관에서도 볼거리가 무궁무진하다. 국제관광선체험관[불교문화관]이라고 이름한 전국 유일의 테마전시관이 통일약사대불 지하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한국 선불교 정신과 역사를 느낄 수 있으며 참선의 기본자세부터 중심사상까지 초행자가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불교문화재를 낳게 한 불교정신에 보다 편히 다가갈 수 있도록 마련해놓은 곳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통일대불 뒤쪽 조각들은 호법무사인데 부처의 세계를 지키는 호법무사들은 제각기 위엄있는 자태와 표정으로 서 있어 부처님을 보호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통일대불 주변은 여름 더위를 피하면서 불교문화재를 관람하기 위해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대불의 몸체 안에는 미얀마 정부에서 기증받은 진신사리 2과가 있다. 사리란 화장한 유골에서 발견되는 작은 구슬로서 참된 수행의 결과로 상징된다. 대불 바로 아래에서 불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목을 최대한 뒤로 젖혀야 가능할 정도로 불상의 크기는 실제로 봐야 실감이 난다. 불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한참 앞으로 걸어 나와야 할 정도이니, 어느새 통일약사대불은 대구광역시에 가면 반드시 보고 와야 할 명소로 자리 잡았다. 현재 통일약사대불은 웅장미와 예술성을 모두 갖추어 팔공산 동화사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시민의 품으로 다가온 통일약사대불]

현재 동화사동화사 통일약사대불과 통일약사대불전 공간을 24시간 개방하고 있다. 또한 봉황문을 통해 올라오는 길을 새로 정비하여 동화사 대웅전을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약사여래불로 갈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특히 야간에 이 길을 오를 불교도 및 관광객들을 위해 동화사는 각별히 가로등을 정비해 통일약사대불을 보러오는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통일약사대불전 구역은 기도객과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하되, 대웅전에서 설법전까지는 수행공간으로 따로 분리해 입장시간을 통제하고 있다. 동화사는 통일약사대불 24시간 개방을 기념하기 위해 2014년 7월 19일 팔공산 산사음악회를 갖기도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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