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빨치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1430
영어공식명칭 Palgongsan Mountai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해방공간기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전개된 공산 비정규군[유격대 활동, 빨치산].

[개설]

빨치산은 유격대원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온 것으로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은 좌익의 무장 유격 부대 활동의 주요 근거지였다. 6.25전쟁 이전에는 초기적 형태의 좌익 무장 유격대인 야산대 활동이 전개되었다. 1949년 6월 조선노동당의 창당 직후인 1949년 7월 남한내 유격대를 지도하기 위해 조선인민유격대의 제3병단이 활동하였다. 제3병단에는 대구[대구광역시] 주둔 6연대 군인 80명이 6연대> 사건 이후 팔공산에 은신해 있다가 합류하기도 하였다. 또 남도부 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제3병단은 팔공산을 비롯해 태백산, 일월산, 보현산 등 경북 북부 산악지대가 주요 활동 거점이었는데, 김달삼과 남도부가 중심이 되어 유격투쟁을 이끌었다. 이호제의 인민유격 제1병단도 경북 북부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육이오전쟁 이후에는 팔공산을 비롯한 경상북도에는 조선노동당 경북도당의 유격대 활동과 남도부 부대의 유격 활동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조선노동당 경북도당은 전쟁 이후 당 사업을 수습하고 외곽 단체를 지하로 이동시키면서 무장 유격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체계로 전환하였다. 당시 경북도당은 경상북도 의성 출신의 박종근 위원장, 함남도당 출신의 이영섭 부위원장이 지도하고 있었다. 여기에 인민군 주전선 지원을 위해 파견된 강철삼 부대가 합류하여 ‘인민유격 경북병단’을 결성했다. 강철삼 부대는 주전선의 전투에도 참가해 전투력이 강했던 유격대였다.

1951년 1월 중국공산군의 참전 후 인민군이 공세에 나설 때 북한 당국이 남한 내의 유격대를 인민군 남하 지원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북한은 1951년 1월 2일,「적후에 있는 유격들의 활동을 확대 발전하는 데 한 명령」[최고사령부 명령 002호]을 발하여 윤상칠로 하여금 우선 제6지대를 결성해서 서울특별시, 경기도 일원에서 활동하게 했다. 이 명령은 후방의 유격대가 인민군 남하에 협조하여 ‘적의 조직적 후퇴를 불허’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와 같은 명령은 각 지방당의 조직 체계를 보류하고 군사 활동만을 목적으로 하는 8개 지대로 유격대를 재편성하라는 결정이었다. 1951년 1월 변화된 유격 활동의 임무에 맞추어 조선노동당 경북도당은 제3지대로 개편되고, 경북도당 위원장 박종근이 제3지대장이 되었으며, 활동 범위가 넓어져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까지 포함하였다. 1951년 6월 ‘인민유격 경북병단’을 박종근의 지도하에 있는 제3지대에 편입시켰다.

1951년 8월 조선노동당은 기존의 도당 조직을 해체하고 그 대신에 남한 전역을 6개 지구당으로 재편한다는 목적에서 경북도당과 동해남부지구당을 합쳐 제4지구당으로 개편하였다. 제4지구당 관할 구역 내의 유격대를 제3지대로 개편하였다. 제3지대의 대장은 조선공산당 경북도당의 박종근이 맡았고, 부지대장은 동해남부전구의 남도부가 맡았다. 박종근은 경북을 관할하고, 남도부는 경남과 낙동강 동쪽을 관할하였다. 제4지구당은 1952년 2월 경상북도 포도산 전투에서 위원장 박종근이 사망하자 그에 따른 지도부 개편이 이루어져 이구형이 위원장이 되었다는 견해와 신불산에서 열린 제4지구당 조직위원회에서 위원장에 남도부가 선출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박종근은 경상북도 의성군의 명문가 출신으로 서울에서 남로당 활동을 벌이다가 1947년 미군정의 남로당 탄압을 피해 월북하였다. 이후 모스크바 유학을 거친 뒤 조선인민유격대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이구형은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면 출신으로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대구시당 위원장이 된 김일식으로부터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 일본에서 반제동맹 활동을 벌이다 조선건국동맹 달성군 조직을 만들었고, 해방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달성군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또 조선 노동조합 전국 평의회에 가입 활동하다 조선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46년 전반기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조직책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8월부터 10월까지 남조선노동당 경북도당 위원장을 지내다 남조선노동당 경기도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또 이구형의 뒤를 이어 배철이 남로당 경북도당 위원장이 되었다.

1953년 1월 제4지구당은 대구지구를 비롯하여 부산·동래지구, 울산·밀양지구, 북부지구 등 4소지구로 구성하였다. 특히, 대구지구는 유응재부대로서 대구와 팔공산을 관할하였고, 부대명도 팔공산부대라 불렀다. 그 뒤 조선노동당 결정서가 도착했다. 그 내용은 도심에서 비밀 지구당을 재건하고 지하공작을 실시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남은 인원은 37명에 불과하였다.

한편, 1952년 12월 조선노동당은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를 통해 박헌영·이승엽등 남로당 숙청을 실시한다. 남한의 무장 유격 부대는 1953년 봄 중앙통신을 통해 숙청 소식을 접한다. 1953년 3월 월북 시인 임화를 시작으로 이승엽과 남로당 경북도당 위원장 출신 배철 등이 차례로 숙청당했다.

[역사적 배경]

해방 후 대구광역시와 전국에서 좌익이 수세에 몰리는 정치적 상황에서 좌익의 무장 유격 활동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빨치산 또는 공비 등으로 부르고 있다. 대구지역은 1946년 대구 10월사건[10월항쟁] 이후 미군정의 좌익 세력 검거 등으로 활동이 제한된 좌익세력, 1948년 6연대 사건을 일으킨 좌익 성향 군인 등이 자생적으로 팔공산을 배경으로 무장 유격 활동을 벌였다. 또한 6.25전쟁 이전 북한은 ‘결정적 시기’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무장 유격대를 남파시켜 남한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1946년 7월 조선인민유격대를 창설하여 남한 유격지대를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육이오전쟁이 발발하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한 정규군이 유격대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팔공산에서 좌익 무장 유격대 활동이 전개되었다.

1951년 8월 31일자로 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 명의로 ‘미해방지구에 있어서의 당 사업과 조직에 대해서’라는 「94호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94호 결정서」는 휴전에 대비해서 기존의 도당 조직을 해체하고 새롭게 지구당 체제로 개편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에 따라 무장 유격 활동은 새롭게 전개되었다.

[무장 유격대의 전투]

1949년 가을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소월리 주민 도달권이 땔감을 구하여 팔공산에 들어갔다가 유격대에 잡혔으나 와촌면 박사리에 사는 사람이라 하고 풀려 나왔다. 그 뒤 와촌지서에 유격대와 만난 사실을 신고했다. 1949년 10월 15일 대대적 진압이 이루어져 유격대 78명이 사살되고 7명이 생포되었다. 이에 11월 29일 밤 유격대원 60여 명이 박사리에 대해 보복 공격을 가해 가옥 105채를 불태우고 주민 38명을 살상하였다. 1985년 박사리에는 ‘박사리 반공위령탑’이 건립되었고, 매년 합동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1950년 7월 27일 남로당 경북도당위원장 배철이 지도하는 7명으로 구성된 유격대가 대구 동촌비행장을 이틀간 점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인민유격 경북병단’은 1950년 10월 30일부터 이듬해 1951년 3월 2일까지 ‘태백산 전구’에서 32회의 장기 전투를 수행하여 군경 704명을 살상하고 55명을 포로로 붙잡았다고 주장했다.

박종근이 지도하는 제3지대는 남한강 방면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매복기습전 3회, 군경과 맞닥뜨린 전투 3회 등 여섯 번의 전투를 치러 군경 105명을 살상하고 포로 6명을 붙잡았다고 북한에 보고하였다. 제4지대 남도부부대는 팔공산을 비롯한 덕유산·운문산·신불산·일월산 등지를 거점으로 하여 경상남북도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였는데, 육군 특무부대는 제4지대 남도부부대가 부산 조병창과 미군동병부대 등 중요시설을 방화 파괴하였다고 파악하였다. 또한 경찰관의 교전 횟수 무려 7백여 회에 군경사살 1천 8백여 명, 각종 무기 약탈 8백여 정, 각종 실탄 2만여 발, 민가 방화 1백여 호, 민가 습격 5백여 호, 군용열차 전복 20여 차량, 군용트럭 소각 또는 파괴 2백여 대에 달하는 전투 결과를 낸 것으로 파악하였다.

[무장 유격대의 붕괴]

박종근이 이끌던 제3지대의 경우 남한강 방면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유격대의 피해에 관해서는 낙오자 103명에 사망자 4명으로 보고하였다. 이때부터 제3지대의 전력에 타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팔공산의 좌익 무장 유격대 활동은 제4지구당남도부 부대의 지도부가 육군 특무부대에 의해 검거되고, 팔공산 아지트가 진압되면서 주력이 붕괴되었다. 1953년 10월 무렵부터 제4지구당이 대구에 비밀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육군 특무부대에서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육군 특무부대 부대장 김창룡의 직접 지휘아래 검거 작전이 진행되었다. 1954년 1월 16일 제3지대 부지대장 또는 팔공산부대장 유응재가 대구시내 노상에서 체포되었다. 1월 19일에는 남도부의 부관 홍만식[본명 이원량]도 체포되었다. 1월 20일 육군 특무부대는 특별수사대를 편성해 팔공산제4지구당 아지트를 급습해 팔로군 출신의 간호장교 지춘란을 생포하고, 무기와 문서 등을 압수하였다. 1월 21일 남도부[본명 하준수]가 동인동에서 리어카 행상 행세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로써 제4지구당의 주력이 붕괴되었다. 남도부는 1954년 10월 재판에서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사형선고를 받았다. 남도부에 대한 판결 의견서에 따르면 “괴뢰 노동당 중앙당부 직속 대남 유격대 제3병단 김달삼 부대 부사령관, 대남유격대 총사령관, 대남 유격대 제3지대장 등을 역임한 강원도, 경상남북도 일대의 유격대 총책임자로서…국군사살 80여 명, 미군 사살 16명, 경찰관 사살 70여 명, 생포 10여 명…”이라고 밝혀 놓았다. 남도부는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대장 등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1955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총살이 집행되었다.

제4지구당의 잔여 대원은 1950년대 후반까지 잔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9년 7월 경상북도 경찰국은 팔공산 소재 파계사 뒤 산중에서 빨치산 3명을 생포하였다. 경찰국은 이들을 조사하여 영양 일원산을 비롯한 그들이 활동했던 북부 산악지대에 각종 무기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그들이 생포되는 과정은 서변동에 사는 나무꾼의 신고가 계기가 되었다. 서변동에 사는 나무꾼이 1953년 6월 15일 팔공산파계사 근처로 나무하러 갔다가 빨치산과 맞부딪쳤다. 그 뒤 빨치산의 아지트에서 ‘같이 있자’는 제안을 받고 부모님 핑계를 대며 생각할 시간을 달라 요구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고민 끝에 다음날 경찰에 신고하였다. 이에 경상북도 경찰국은 ‘다시 나무꾼을 아지트로 보내 자세한 사정을 파악한 뒤 경북 경찰국의 명사수 40여 명을 동원해 생포할 계획’을 세웠다. 계획대로 실행에 옮겨 6월 18일 아침 6시 빨치산 아지트를 급습해 모두 생포하였다. 이로써 제4지구당의 잔여 병력이 체포됨으로써 팔공산의 유격 활동은 거의 종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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