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공보애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1390
한자 崔公普哀辭
영어공식명칭 A funeral oration to mourn the death of Choi Gong-bo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11년 - 「최공보애사」이상정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781년 - 「최공보애사」이상정 사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763년연표보기 - 「최공보애사」창작
편찬|간행 시기/일시 1802년연표보기 - 「최공보애사」간행
배경 지역 「최공보애사」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지도보기
성격 애제류|애사
작가 이상정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이상정이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최주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지은 제문.

[개설]

이상정(李象靖)[1711~1781]은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출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다. 1735년(영조 11)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상정은 이황(李滉) 이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이재로 이어진 영남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최주진(崔周鎭)[1724~1763]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는 공보, 호는 동계처사(東溪處士)이다. 백불암(百弗菴) 최흥원(崔興遠)의 아들이며 이상정의 고족제자(高足弟子)[제자들 가운데 학식과 품행이 특히 뛰어난 제자]이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45호인 동계정(東溪亭)[대구광역시 동구 옻골로 204]은 최주진이 일찍 죽자 그의 아들과 손자, 제자들이 최주진을 기리기 위해 1910년대에 지었다.

[구성]

「최공보애사」은 서문(叙文)과 애사(哀詞)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최공보애사」의 서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최주진의 아름다운 품성과 뛰어난 자질을 칭송하고 있다. 두 번째 단락은 낙마사고로 인한 병중에서도 수불석권하는 최주진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 세 번째 단락은 병이 갑자기 깊어져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일찍 죽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최공보애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희호공보(噫虖公普)[슬프다, 공보여!]/칠계지곡(漆溪之曲)[칠계의 굽이에서]/상부하자(上父下子)[위아래로 부자가]/유도유서(有圖有書)[도서를 공부하였네]/

유자지소안혜(惟子之所安兮)[그대가 편히 여긴 곳이거늘]/호위호불거(胡爲虖不居)[어찌하여 거하지 않았는가]/농연지반(聾淵之沜)[농연의 물가에서]/

좌산우류(左山右流)[좌우로 산수를 두고]/유어유조(有魚有鳥)[조어를 즐기었네]/유자지소악혜(惟子之所樂兮)[그대가 즐거워한 곳이거늘]/

호위호불고(胡爲虖不顧)[어찌하여 돌아보지 않았는가]/학지욕성(學之欲成)[학문을 성취하려는데]/이병호기고(而病胡其痼)[병은 어찌 깊어졌나]/

지지심원(志之甚遠)[의지가 심원한데]/이수호부득기하(而壽胡不得其遐)[수명 어찌 길지 못하였나]/희호(噫虖)[아아, 슬프다]/

기내하(其奈何)[어찌 하랴]

[특징]

「최공보애사」은 고족제자[제자들 가운데 학식과 품행이 특히 뛰어난 제자]인 최주진의 죽음을 애도함이 글 안에 절절히 드러나고 있다. 장자(莊子)와 주자(朱子)의 고사를 활용하여 글공부만이 공부의 전부가 아님을 말하면서 건강에 대한 염려를 나타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최공보애사」은 애사의 의미단위를 6구·5구·4구로 점점 줄여가면서 감정을 절제하며 축약적으로 표현하여 아끼는 제자를 잃은 슬픔을 드러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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