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대조고현령부군묘갈」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1365
한자 六代祖考縣令府君墓碣
영어공식명칭 Stele of Yukdaejogo Hyeonryeongbugu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05년 - 「육대조고현령부군묘갈」최흥원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786년 - 「육대조고현령부군묘갈」최흥원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816년연표보기 - 「육대조고현령부군묘갈」간행
배경 지역 「육대조고현령부군묘갈」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지도보기
성격 비지류|묘갈문
작가 최흥원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최흥원이 지은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의 평천사에 배향된 최계의 묘갈문.

[개설]

최흥원(崔興遠)[1705~1786]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태초(太初) 또는 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이다. 어려서부터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로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대대로 달성의 칠계에 살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백성들의 살기 어려운 정상을 보고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하여 부인동규(夫仁洞規)를 세우고 강학(講學)과 근검으로 저축에 힘쓰게 하며 선공고(先公庫)·휼빈고(恤貧庫) 등을 두어 생활안정을 얻게 하였다. 죽은 뒤 1789년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고, 이듬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최계(崔誡)[1567~1622]는 조선 중기 무신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때 무공을 떨친 형 최인과 조카 최동보와 함께 ‘최씨삼충’이라 불렸다.

[구성]

「육대조고현령부군묘갈」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최흥원 집안의 세계(世系)를 설명하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최계의 공적을 나열하고 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최흥원의 가계(家系)를 설명하고, 마지막 단락에서는 최계 묘갈 제작의 의의를 밝히고 있다.

[내용]

「육대조고현령부군묘갈」마지막 단락 내용이다.

“공은 기의(氣義)가 강개하고 지려(志慮)가 고원하여 평생의 사업이 반드시 전할 만한 것이 많았다. 세대가 점점 멀어져서 상고하여 물어도 징거할 수 없었다. 오직 한 장의 유서(遺書)를 자손이 아직까지 보장(保藏)하고 있었으니, 그 정령(丁寧) 한 권계(勸戒)가 특히 학문에 독력하여 조선(祖先)을 현양(顯揚)하는 데 간절하였다. 또 모든 아들이 이에 그 뜻을 받들어 성취하였다. 사부공(師傅公)의 문장과 행의는 더욱 세상의 추숭한 바 되었으니 공의 용의(用意)의 근면함과 문학을 여는 공이 여기에서 드러나서 백 세가 되도록 능히 잊을 수가 없도다. 대략 보계(譜系)에 행적의 경개(梗槪)를 기록하여 비석 뒤에 새기니 감히 하나도 거짓이 아니라고 이르노라.”

[특징]

「육대조고현령부군묘갈」은 각종 미사어구는 빼고 사실만으로 묘갈을 작성해 오히려 최계의 공적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의의와 평가]

「육대조고현령부군묘갈」임진왜란 때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최씨삼충’ 중 최계의 공적이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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