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례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1175
한자 儀禮服
영어공식명칭 Ritual Clothes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손경희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서 전통 의례를 거행할 때 특별히 갖추어 입었던 예복.

[개설]

의례복은 주로 통과의례(通過儀禮)를 행할 때 입는 옷을 말한다. 사람들은 일생을 통하여 사회적인 지위와 인정을 받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단계들이 있고, 이때는 반드시 특별한 의례를 행하게 되는 데 이를 통과의례라고 하며 의복 또한 평상시 입던 옷이 아닌 특별한 옷을 입는데, 이를 의례복이라고 한다.

[혼례용]

혼례복은 결혼방법에 따라 다르다. 구식결혼의 경우 신랑은 머리에는 사모를 쓰며, 속옷은 속적삼, 바지,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쌍학(雙鶴)의 흉배가 달린 관복을 입는다. 허리에는 요대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신부는 머리에 칠보단장을 한 족두리를 쓰고 댕기를 꽂는다. 상의는 모시적삼에 분홍저고리, 하의는 바지와 홍색치마를 입고 그 위에 원삼이나 활옷을 입는 것이 보통이다. 신은 신코에 예쁜 단장을 한 갓신을 신는다.

[출산용]

산모는 면에 푸른 물을 들여 통치마를 해 입었다. 임신 기간에는 평상복을 그대로 입는다. 어린이는 태어나자마자 허리에 띠가 달린 옷을 해 입혔다. 새 천으로 만들어 입히기도 하였다. 옷 욕심을 낼까봐 새 천으로는 옷을 못 만들어 입게 하였다. 기저귀는 헌 옷 떨어진 것이나 헌 천으로 만들었다. 특별히 새 천으로 만드는 경우는 없었으나, 부잣집의 경우에는 모두 새 천으로 만들어 입혔다. 남녀의 아랫도리는 밑을 타서 만들었다. 이는 배변을 편리하게 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자녀가 출생하면 마을에 장수한 사람의 옷을 얻어 빨간색으로 첫 저고리를 만들어 입혔다고 한다. 때로 낳은 뒤에 보자기로 싸 두기도 하고, 헌 옷을 뜯어서 한복 바지와 저고리를 해 입히기도 하였다.

[상례용]

상례 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3년상,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1년상,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3년상을 지낸다. 상주의 옷은 누런색의 삼베옷으로 너덜거리게 달아서 입는다. 이는 자식을 죄인이라는 관념에서 너덜거리게 해서 입고 방립을 쓴다. 두건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온 천으로 만들어서 반을 접어서 쓰고 형제가 죽으면 온 천을 반으로 잘라 두 개를 만들어 쓴다. 또 남편은 대나무 장죽을 하고 부인은 흰옷과 흰색의 실댕기를 드린다. 댕기가 더러워지면 빈소 안 철사 등에 걸어두고 새로 만들어 쓰고 3년 상이 끝나면 빈소와 함께 태운다. 시집갈 때 상복은 겉옷만 해 가며, 형제가 죽었을 경우에는 흰두루마기에 두건만 쓴다. 수의는 다 살았다는 의미로 환갑을 지내는 해나 윤달이 있는 해에 준비한다. 초상이 나면 그날로부터 3일 동안 장사지내러 나가기 위해서 옷을 준비하는데 푸른색은 없고 보통 누런색이다. 여름에는 삼베로 상주의 옷을 만들고 겨울에는 면으로 짠 것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상주의 옷은 도복 등의 옷을 너덜너덜하게 천을 붙여서 해 입는다.

[제례용]

제사 때에는 흰색의 한복을 입는다. 어른은 흰두루마기를 걸친다. 검은 물을 들인 두루마기를 입기도 한다. 신발은 짚신이나 검정고무신을 신는다. 소상 때는 상주가 입었던 옷을 일년 동안 보관해 두었다가 입었다. 요즘은 3일장을 지낸 후 모두 태워버린다. 대상 후 석달 열흘째 담제를 지낼 때는 무색옷을 입는다. 기제사 때에는 입던 옷이 흰색일 경우 그냥 입고 간다. 도복은 손질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몇 년마다 한 번씩 씻는다. 이것은 잘하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빨고 말리고 기워서 농에 보관한다.

[대구 동구 의례복과 영조대왕 도포]

대구광역시 동구의 의례복은 그 유물이 소략해, 동구의 특성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 왕실의 의례복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의례복이 파계사 원통전에서 발견되었다. 바로 1987년 11월 23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20호로 지정된 파계사영조대왕 도포이다. 영조대왕의 도포는 1979년 파계사 원통전(圓通殿)의 관세음보살상을 금칠하다가 발견되었다. 도포와 함께 발견된 한자 두루마리에 적힌 「발원문」에 의하면, “1740년(영조 16) 9월 파계사 대법당을 수리하고 영조가 탱화 일천불을 희사하면서 이곳을 왕실을 위해 기도하는 도량으로 삼고 영조의 청사상의(靑紗上衣)를 복장하여 만세유전을 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포는 조선시대에 왕을 비롯하여 사대부의 외출복으로 입혀졌던 옷으로 기록이나 유물은 16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형태는 곧은 깃에 넓은 소매(廣袖)가 달린 것으로 뒷자락이 2중구조로 된 특징이 있다. 길에서 내려오는 기존의 뒷자락이 있으며 앞의 무가 뒷자락 안에 붙어 있어 뒷자락이 2단으로 분리되어 있다. 18세기 풍속화 중 도포를 착용한 모습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는 뒷자락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조의 도포는 무늬 없는 사(紗)[은조사])로 된 홑옷으로 현재의 색상은 연한 녹색 빛을 보인다. 소매는 넓은 두리소매이며 깃의 모양은 목판깃과 당코깃 모양이 합쳐진 반당코깃[반목판깃]이다. 일반인의 도포가 곧은깃[직령깃]인데 반하여 반목판깃의 형태여서 서민과 왕족이 사용한 도포의 양식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영조대왕 도포의 넓은 두리소매, 반목판깃은 왕족과 서민 의복의 차이를 보여줄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 깃의 형태나 소매, 옷 길이, 밑단선이 달라짐을 보여준다. 또한 영조대왕의 도포는 유물 도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 왕이 착용하였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는 중요한 자료로 형태와 색이 비교적 완전하여 복식사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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