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0895
한자 把溪寺
영어공식명칭 Pagyesa Temple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기관 단체/사찰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파계로 741[중대동 7]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박병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804년연표보기 - 파계사 창건
최초 건립지 파계사 - 대구광역시 동구 파계로 741[중대동 7]
현 소재지 파계사 - 대구광역시 동구 파계로 741[중대동 7]지도보기
성격 사찰
창건자 심지대사
전화 053-984-4550
홈페이지 http://www.pagyesa.org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 있는 통일신라시대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

[건립 경위 및 변천]

『퇴경당전서(退耕堂全書)』 및 『팔공산파계사사적비(把溪寺事蹟碑)』에 의하면, 파계사는 통일신라시대 804년(애장왕 5)에 심지왕사가 창건하였다. 사찰 명칭은 사찰 좌우에 9개 계곡이 있다. 이를 구룡(九龍)이라 하며 이들 아홉 마리 용이 한꺼번에 나와 사회를 혼란시키지 못하도록 잡아둔다[잡을 파, 把]는 뜻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기록이 없다가 조선시대 1447년(세종 29)에 원통전(圓通殿)의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을 중수하여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사찰 대부분이 전소되자, 계관법사(戒寬法師)가 1605년(선조 38)에 중창을 하였다. 이후에 새로운 전각의 건립과 중창 불사가 이어졌다. 1620년(광해군 12) 적묵당(寂默堂) 중창, 1621년(광해군 13) 궁현당(窮玄堂) 건립, 1623년(인조 1) 설선당(設禪堂) 건립, 1626년(인조 4) 미타암(彌陀庵) 건립, 1646년(인조 24) 설선당 중수, 1695년(현종 8) 영현도인(靈現道人)이 백화루(白花樓)를 중건하였다. 1693년(숙종 19)에 영원선사(靈源禪師)가 숙종의 부탁을 받고 농산(聾山)과 함께 백일기도를 하였다. 기도가 끝나는 날 농산이 숙빈(淑嬪) 최씨에게 현몽해 태어난 아들이 후일의 영조였다. 숙종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파계사 주변 40리 이내의 조세(租稅)를 받아 사용하라고 하였으나 영원선사는 이를 거절하고 선대의 위패를 모시기를 청하였다. 즉 왕실의 원당이 되어 지방 관청 및 토호들의 침탈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파계사는 왕실의 원당이 되었으며, 영원선사현응(玄應)이라는 호를 숙종으로부터 하사받았다.

파계사가 원찰이 된 1695년(숙종 21)에 현응대사(玄應大師)가 삼창(三創)을 하고 원통전을 새로 지었다. 이듬해인 1696년(숙종 22)에 위패를 봉안할 전각인 기영각(祈永閣)을 짓고, 숙종이 직접 지은 축책(祝冊)을 내리면서 왕실의 원당으로 삼았다. 이후 왕실 및 관인(官人)들의 지원으로 새로운 전각의 건립이나 중수 불사가 자주 이루어졌다. 1704년(숙종 30)에 영조가 11세에 쓴 「자응전(慈應殿)」이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1707년(숙종 33)에 원통전에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를 조성하여 봉안했다. 1710년(숙종 36)에 ‘현응당영원대사비(玄應堂靈源大師碑)’, 1715년(숙종 41)에 진동루(鎭洞樓)를 건립했다. 1720년(숙종 46) 승려 설원(雪元)과 각현(覺賢)이 백화루를 중수하였다. 영조가 등극하면서 1725년(영조 1)에 설선당을 중수하였다. 1732년(영조 8)에는 왕실에서 어압완문(御押完文)과 어의(御衣)[영조대왕의 도포]·향촉(香燭) 등을 내려 왕의 무병장수를 비는 재(齋)를 지냈다. 영조 어의는 1740년(영조 16) 원통전 목조관음보살좌상에 다른 물건들과 함께 복장(腹藏)되었다. 1762년(영조 38)에는 설선당을 중수하였다. 1777년(정조 1)에는 ‘천향각(天香閣)’이라는 정조의 어필 편액이 하사되었다. 1831년(순조 31)에는 왕실의 지원으로 미타암을 중창하였다. 이때 순찰사 박기수(朴岐壽)가 성조도감(成造都監)을 맡아 공사를 관리하였다. 1853년(철종 4)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 1,000민(緡)을 내려주었다. 이 돈은 1860년의 중창 때 함께 사용하였다. 1857년(철종 8)에는 계정상인(戒正上人)이 성전암(聖殿庵)·자응전·관음전(觀音殿)을 보수하고 축성루(祝聖樓)를 신축했다. 1860년(철종 11)에는 승려 경운(敬運)이 주도하여 백화루를 중수하였다. 이 때 왕비가 내탕금을 내려주었으며, 안핵사(按覈使) 홍우길(洪祐吉)에게 명하여 자재를 공급하도록 하였다.

1877년(고종 14) 순찰사(巡察使) 박제인(朴齊寅)이 기영각을 수리한 이후에는 왕실이나 관인들의 지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90년(고종 27) 백화루, 1900년(광무 4)에는 미타암을 중건했다. 1903년(광무 7)에는 금당암(金堂庵)에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었다. 1905년(광무 9)에는 월주상인(月洲上人)이 축성루를 중수하였다. 1914년에는 성전암에 화재가 발생해 1915년 승려 보령(保寧)·관해(寬海) 등이 중창했다. 1918년에는 주지 용담(龍譚)이 궁현당을 중창했다. 1920년에는 적묵당, 1922년에는 설선당을 중창했다. 1924년에는 성전암 원주인 반공산(潘公山)이 자응전을 중창했다. 1935년에는 ‘팔공산파계사사적비’를 건립했다.

광복 이후 중수 불사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반면에 불교 문화재에 대한 관리가 부실하여 성보문화재를 도난당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70년에는 진동루의 단청을 새로 입혔다. 1973년에는 설선당의 부분 보수 공사를 했다. 1974년에는 기영각을 중수했다. 1976년에는 적묵당을 중수하면서 진동루의 기와도 교체하였으며, 설선당과 산령각(山靈閣)도 중수하였다. 1979년에는 산령각을 보수하고, 원통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을 개금할 때 복장에서 영조대왕의 도포 등 귀중한 유물이 나오기도 하였다. 1983년에는 기영각을 보수했다. 1988년에는 ‘일우당종수대율사비(一愚堂宗壽大律師碑)’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1987년에는 사찰에 소장되어 있던 고서적(古書籍) 33권을 도난 당했다. 1991년에는 원통전에 봉안되어 있던 「삼장보살도」와 「나한도(羅漢圖)」를 도난 당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파계사에서는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정기적으로 기도회가 있고, 매월 관음재일, 지장재일, 자비도량 참법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또 정초기도, 입춘기도, 산신기도, 초파일기도, 백중기도, 칠성기도, 동지기도, 성도재일기도 등도 주기적으로 개최하고 있으며, 소외된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도 시행하고 있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파계사 전각 구성은 산세와 지세의 높낮이를 잘 이용하여 적절히 건물을 배치하였다. 중심 전각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하는 주불전인 원통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구조이다. 원통전을 중심으로 정면 쪽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구조로 된 2층 누각의 진동루가 있고, 좌·우에 설선당과 적묵당이 배치되어 ‘ㅁ’자 형을 이루고 있다. 적묵당 뒤쪽으로 설법전과 금당이 있고, 원통전 우측 뒤쪽으로 응진전이 있으며, 좌측 뒤쪽에 기영각[미타전]이 있고, 그 오른쪽에 산령각이 배치되어 있다. 설선당 뒤쪽으로 낮은 산등성이를 넘으면 지장전이 있고, 계곡의 다리를 건너면 바로 극락전이 배치되어 있다. 진동루 오른쪽에 최근에 건립한 보장각(寶藏閣)이 있다. 그 외 전각으로는 범종각, 귀빈실, 한주실, 다각실, 비니장[도서관] 등이 있다. 1648년(인조 26)에 건립한 ‘회진당원의대사지탑’과 1651년(효종 2)에 건립한 ‘절충장군 가선대부 보광당전명대사지탑’ 2기가 파계사 옛 진입로 오른쪽에 조성되어 있다.

[관련 문화재]

파계사에는 현재 보물 3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2점 및 문화재자료 8점, 중요민속문화재 1점을 보유하고 있다. 보물로는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992호],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보물 제1214호], 원통전[보물 제1850호] 등이 있다. 유형문화재는 원통전 수미단[유형문화재 제73호]과 「왕실 원당 관련 고문서 일괄」[유형문화재 제74호]이 있다. 문화재자료에는 제7호인 설선당, 제8호인 산령각, 제9호인 적묵당, 제10호인 진동루, 제11호인 기영각, 제52호인 「아미타삼존도」, 제53호인 신중도 및 복장유물 일괄, 제54호인 파계사 소장 책판 일괄 등이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20호인 영조대왕의 도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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