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0604
한자 崔孝述
영어공식명칭 Choe Hyosul
이칭/별칭 치선(穉善),지헌(止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인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86년 7월 23일연표보기 - 최효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96년 - 최효술 정종로 문하에 수학
활동 시기/일시 1856년 - 최효술『심경』 강의
활동 시기/일시 1865년 - 최효술 통정대부 돈녕부도정 벼슬 받음
몰년 시기/일시 1870년 10월 12일연표보기 - 최효술 사망
출생지 최효술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지도보기
수학|강학지 최효술 수학지 -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외가|처가 최효술 외가 -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외가|처가 최효술 처가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묘소|단소 최효술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성격 학자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경력 통정대부 돈녕부도정

[정의]

조선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출신 학자.

[개설]

경(敬)을 근본으로 하여 독실하게 실천 궁리(實踐窮理)한 선비로, 경상감사, 암행어사 등의 천거를 받아서 돈녕부 도정(都正)에 올랐다.

[가계]

최효술(崔孝述)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는 치선(穉善), 호는 지헌(止軒)이다. 최효술은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병조판서에 오른 뒤 광정(匡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최단(崔鄲)의 후손으로, 대암(臺巖) 최동집의 8대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익찬(翊贊)의 벼슬을 받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된 백불암 최흥원(崔興遠)이며, 할아버지는 동계(東溪) 최주진崔周鎭)인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문하에 수학하여 사문(師門)에 추중(推重)을 받았으나 일찍 사망하였고,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최식(崔湜)인데 유림의 중망(重望)이 있었다. 어머니는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딸인 진양정씨(晋陽鄭氏)이다. 부인은 만각재(晩覺齋) 이동급(李東汲)의 딸인 광주이씨(廣州李氏)인데 슬하에 두 아들 최명덕(崔命德), 최명우(崔命愚)와 이찬수(李瓚秀), 이연재(李淵在), 정치주(鄭致周) 등에게 출가한 세 딸을 두었다.

[활동 사항]

최효술은 외할아버지 입재 정종로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훌륭한 덕망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다. 1854년에 암행어사 박규수(朴珪壽)가 조정에 포계(褒啓)[포상하도록 계문함]를 올릴 때 “오로지 경학(經學)을 공부하고 향약으로써 백성을 가르쳤다[전치경학 향약교민(專治經學 鄕約敎民)].”라고 최효술을 평가하였다. 1856년에 경상감사 신석우(申錫愚)가 유생을 향교에 모아놓고 최효술을 강장으로 모시고는 『심경(心經)』을 강의하게 하였다. 1866년에는 동천사(東川社)와 강북의 네 서원[강북사원(江北四院)]에 강회를 개설하여 『대학』과 『중용』을 강의하였다.

[학문과 저술]

최효술은 퇴계 이황의 연원을 계승한 증조할아버지 최흥원의 가학(家學)과 외할아버지 정종로에게 학업을 받아서 경학(經學) 공부에 힘썼고, 무자기(毋自欺)[스스로 속이지 않는다.] 세 글자로써 독실하게 실천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대학』의 성정격치(誠正格致)[성의·정심·격물·치지]와 『맹자』의 “마음을 다하면 성(性)을 알 수 있고, 성을 알면 천명을 알게 된다[盡心知命].”의 학문을 늙을 때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대에 저명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을 비롯하여 이휘녕(李彙寧), 이원조(李源祚), 류후조(柳厚祚), 이돈우(李敦禹) 등 영남의 석학들과 학문적인 교유를 하여 왕복 서찰이 문집에 많이 실려 있다. 저서로 『지헌선생문집(止軒先生文集)』 15권 7책이 있는데, 내용을 보면 성리학 관련 논설이 많고, 『대학』과 『중용』에 대한 의의(疑義)와 향교 등에서 강의한 강록(講錄)이 주목된다.

[묘소]

최효술의 묘소는 광리(廣里)[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에 있었으나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남창(南倉)으로 이장하였다. 묘표(墓表)는 이학래(李鶴來)가 지었다.

[상훈과 추모]

최효술은 경상감사 이면승(李勉昇), 암행어사 박규수(朴珪壽), 암행어사 임응준(林應準) 등의 천거로 1865년에 통정대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의 벼슬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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