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귀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0573
한자 蔡龜海
영어공식명칭 Chae Gwihae
이칭/별칭 낙응(洛應),치헌(痴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황동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0년연표보기 - 채귀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74년 - 채귀해 향시 합격
몰년 시기/일시 1905년 2월 20일연표보기 - 채귀해 사망
거주|이주지 채귀해 거주지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지도보기
성격 문인
성별 남성
본관 인천

[정의]

개항기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출신 문인학자.

[가계]

채귀해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낙응(洛應), 호는 치헌(痴軒)이다. 조선 중기의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채수곤(蔡壽坤), 아버지는 채석범(蔡錫範),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택승(宅承)의 딸이다. 부인은 인천이씨(仁川李氏)로, 석유(錫裕)의 딸이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채규식(蔡奎植)·채효식(蔡孝植)·채정식(蔡禎植)이고, 딸은 홍연흠(洪演欽)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채귀해는 1850년(철종 1)에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대구부 해북촌면(海北村面) 미대리(美岱里)[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세거하였다. 지헌(止軒) 최효술(崔孝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74년(고종 11) 25세 때 향시에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1878년(고종 15) 1월 25일 박주종(朴周鍾)을 소두(疏頭)로 1만여 명이 연명해서 훼철된 서원을 복설해줄 것을 청하는 소를 올릴 때 참여하여 서울[서울특별시]에 5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때 한 번도 과장에 들어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몰래 응시한 사람들을 꾸짖었다. 갑오개혁 초기에 민심이 혼란하자 동민들을 이끌고 둥그런 성채를 만들며 도구를 정비해서 사람들이 두려움이 없도록 하였다.

한편,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고 몸소 검약을 실천했고 아우들과 재산을 공유했다. 만년에 가세가 기울었지만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에는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고 한다. 1905년 2월 20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56세였다.

[묘소]

채귀해의 묘소는 대구 태정(台亭) 서전동(黍田洞)에 있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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