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0323
한자 山南義陳
영어공식명칭 Sannamuijin (Palgongsan Mountain)
이칭/별칭 창의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칭 시기/일시 1906년 3월연표보기 - 창의소를 산남의진이라 고쳐 부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7월 12일 - 산남의진 청하(淸河)[지금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를 습격, 무기고를 열어 무기를 확보
성격 독립운동단체|의병운동단체

[정의]

대한제국기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활동한 의병부대.

[개설]

산남의진은 중추원 의관 정환직(鄭煥直)[1843~1907]이 대한제국의 광무황제로부터 의병 봉기를 내용으로 한 밀지(密旨)를 받고 아들 정용기(鄭鏞基)[1862~1907]와 함께 경상북도 영천시를 중심으로 기병한 의병부대이다.

[설립 목적]

정용기는 아버지 정환직의 명을 받들어 영천에서 이한구(李韓久)·이지포(李芝圃)·제종제인 정순기(鄭純基) 등과 함께 논의해 거병하기로 하고 창의소를 열어 의병을 모집했다. 이때 창의소가 결집한 사람들이 무려 1천여 명에 달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906년 3월 창의소를 산남의진이라 고쳐 불렀다. 정용기가 산남의진의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변천]

의병장 정용기가 일본군에 체포된 뒤 산남의진은 최세윤(崔世允)을 대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재정비했다. 대구진위대 출신으로 군대해산 이후 산남의진에 합류한 우재룡이 팔공산을 본거지로 하는 영천 서부지역의 의병 책임자가 되었다. 동시에 의병진영의 군사훈련을 책임지는 연습장이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산남의진은 정환직의 명에 따라 관동(關東)으로 진격하기 위해 경상북도 북부지역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는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산남의진은 1907년 7월 12일 청하(淸河)[지금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를 습격하고, 무기고를 열어 무기를 확보하였다. 계속해서 청송·영천·신녕·안동·의성·경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였다. 그 뒤 의병장 정용기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현황]

산남의진은 부대 편성과 함께 남으로는 밀양과 울산, 북으로는 봉화와 영양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북 전역에 걸친 지방 연락 책임자와 활동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곧 24개 지방, 79명이 선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산남의진은 영남 지방의 대표적 의병전쟁을 수행한 의병부대로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이 활동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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