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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200616
한자 惟政
영어공식명칭 Yujeong
이칭/별칭 응규(應奎),이환(離幻),사명당(四溟堂),송운(松雲),종봉(鍾峯),사명대사,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동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4년연표보기 - 유정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559년 - 유정 출가
수학 시기/일시 1586년 - 유정 득도
활동 시기/일시 1593년 1월 - 유정 평양성 전투 참전 승리
활동 시기/일시 1593년 3월 - 유정 삼각산 노원평 전투, 우관동 전투 참전 승리
활동 시기/일시 1594년 - 유정 악견산성, 이숭산성 축조
활동 시기/일시 1595년 - 유정 용기산성, 팔공산성, 금오산성 축조
활동 시기/일시 1604년 2월 -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에 임명됨
몰년 시기/일시 1610년 8월 26일연표보기 - 유정 사망
출생지 유정 출생지 - 경상남도 밀양군 무안면
성격 승려|의병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의승도대장|선교양종판사|자통홍제존자

[정의]

임진왜란 때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한 승려.

[가계]

유정의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 속명은 임응규(任應奎)이다. 고려 때 은자광록대부를 지낸 임온(任溫)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임효곤(任孝昆), 할아버지는 임종원(任宗元), 아버지는 임수성(任守成),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활동 사항]

유정은 1544년(중종 39)에 경상남도 밀양군 무안면 고나리에서 태어났다. 7세 때 할아버지에게 『십팔사략(十八史略)』을 배우고, 13세를 전후해서 류촌(柳村)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 임수성마저 세상을 떠나자, 경상북도 김천시 황악산(黃岳山)에 있는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에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서산대사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선조 11)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선조 19)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정은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평양성 탈환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3월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이에 선조는 유정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 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 회담을 가졌는데, 특히 2차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다.

1594년(선조 27) 승병을 이끌고 삼가현(三嘉縣)의 악견산성(岳堅山城)과 합천의 이숭산성(李崇山城)을 도맡아 수축하였고, 이듬해인 1595년(선조 28)부터 가야산의 용기산성(龍起山城), 팔공산팔공산성(八公山城), 구미의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차례로 쌓았다. 이 당시 유정은 동화사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는데, 그의 인장인 ‘영남도총섭인(嶺南都總攝印)’과 승군을 지휘할 때 불었던 소라나팔 등이 현재 동화사에 남아있고, 동화사 봉서루에 있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 편액은 동화사가 조선시대 영남승병의 지휘소였음을 증명한다. 또한 전국에 있는 20여 개의 사명대사 진영(眞影) 가운데 동화사에 남아있는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1604년(선조 37)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듣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 동포를 데리고 1605년(선조 38) 4월에 귀국하였다. 1605년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광해군 2) 8월 26일에 입적하니 세납 67세, 법랍[세속에서의 나이와는 달리 승려가 된 뒤로부터 치는 나이] 51세였다.

[사상과 저술]

유정의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泗溟堂大師集)』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등이 있다.

[묘소]

유정의 제자들이 유정을 다비를 하고,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 홍제암(弘濟庵) 옆에 유정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

[상훈과 추모]

유정은 경상북도 밀양시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참고문헌]
  • 김영태, 「사명대사의 생애」(『불교학보』8,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71)
  • 팔공총림 동화사(http://www.donghwasa.ne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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