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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문화유산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894
한자 大邱- 文化遺産
영어공식명칭 Cultural Heritages in Daegu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선사/선사,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배성혁

[정의]

대구광역시의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주요한 문화유산.

[지정문화재]

대구광역시 중구, 남구, 달서구, 서구, 북구, 동구, 수성구에는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 3건, 보물 68건, 사적 8건, 천연기념물 1건, 국가민속문화재 4건, 국가등록문화재 11건, 대구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69건, 무형문화재 15건, 기념물 14건, 민속문화재 2건, 문화재자료 41건 등 모두 236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한편,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중구: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1건, 사적 5건, 대구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17건, 무형문화재 2건, 기념물 1건, 문화재자료 4건과 국가등록문화재 5건 등 모두 35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삼국시대 달성과 조선시대 경상감영 관련 건물, 일제강점기의 각종 교육시설과 개신교 및 천주교와 관련된 종교 건물들이 지정되어 있다.

남구: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3점, 국가등록문화재 1건, 대구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6점, 무형문화재 1건, 기념물 1건, 문화재자료 1건 등 모두 13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달서구: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25건, 사적 1건, 대구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9건, 무형문화재 2건, 민속문화재 1건 등 모두 38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이 중 보물 23건과 유형문화재 7건은 계명대학교 소장품이고, 월성동 입석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서구: 국가지정문화재는 없지만 국보 제137호 비산동 청동기 일괄품이 서구에서 출토되었으며, 그 외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3건이 있다.

북구: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7건, 사적 1건, 대구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1건, 무형문화재 1건, 기념물 2건, 문화재자료 2건 등 모두 14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이 중 보물 7건은 경북대학교의 소장품이다.

동구: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19건, 사적 1건, 천연기념물 1건, 국가민속문화재 2건, 국가등록문화재 5건, 대구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28건, 무형문화재 4건, 기념물 6건, 민속문화재 1건, 문화재자료 30건 등 모두 97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동화사, 파계사, 북지장사, 부인사팔공산 일대의 불교 관련 지정문화재가 다수이다.

수성구: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 3건, 보물 13건, 국가민속문화재 2건, 대구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8건, 무형문화재 2건, 기념물 4건, 문화재자료 4건 등 모두 36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이 중 국보 3건, 보물 13건, 국가민속문화재 2건은 국립대구박물관 소장품이다.

[시대별 문화유산]

1. 구석기시대

대구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수성구 시지동 일대에서 중기로 추정되는 여러면 석기가 채집되고, 달서구 월성동 777-2유적에서 후기의 좀돌날석기를 포함한 석기제작장이 조사된 바 있어 늦어도 중기나 후기 구석기시대인 것으로 보인다.

2. 신석기시대

신석기문화는 금호강낙동강의 지류를 따라 대구 전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남서부 낙동강 지류인 진천천 유역과 월배 선상지 일대에서는 유천동 248-1유적, 월성동 1275유적, 상인동 119-20유적, 진천동 576-8유적, 대천동 413유적이 조사되었다. 북동부 금호강 유역에서는 대림·사복동 유적, 달성 달천리 135유적, 검단동 유적이 조사되고, 북부 동화천 유역에서는 서변동 취락유적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대구분지를 남에서 북에서 가로지르는 신천 일대에서는 상동 지석묘Ⅰ, 상동 522-4유적, 대봉동 마을유적, 대봉동 21-7유적, 동문동 38-6유적 등이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이 유적들은 선상지나 충적지, 그리고 나지막한 구릉에 조성되어 있으며, 소규모 취락이나 야영지의 형태를 보인다.

3. 청동기시대

청동기문화는 대구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전개되는데, 금호강과 소지류인 신천, 대구천, 팔거천, 동화천, 율하천, 매호천, 욱수천 유역과 낙동강으로 직접 유입되는 달서구 진천천, 성당천 유역을 포함하는 월배 선상지의 낮은 구릉지와 충적지에서 고인돌과 주거지를 포함한 대규모 취락이 집중 분포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청동기시대 조기에서 후기까지의 유적들이 모두 확인되며, 달서구, 북구, 수성구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중구에서는 분묘와 취락과 관련된 생활유적이 주류를 이루며, 달성과 신천 사이의 충적지 일대에 넓은 범위로 분포한다. 분묘는 고인돌이 9개소, 돌널무덤은 3개소에서 각각 1~3기가 조사되었다. 생활유적은 20여 개소가 조사되었는데, 대봉동 마을유적과 같이 주거지 33기로 구성된 대규모 취락의 형태도 보이지만 대부분 주거지 1~5기와 수혈 등을 포함한 소규모 취락의 형태를 보인다. 남구에서는 이천동 일대에서 고인돌과 돌덧널무덤 30여 기가 조사되고, 생활유적은 이천동 295-7유적에서 주거지 6기가 조사되었다. 그리고 서구에서는 청동기시대 유적이 확인된 바 없다. 달서구에서는 대구에서 가장 많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조사되었는데, 통칭하여 ‘월배지역 선사유적’으로 부른다. 월배 선상지에서는 초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제의유적과 분묘, 생활유적, 생산유적 등 76개소가 확인되었다. 제의유적으로는 월암동 입석Ⅰ~Ⅴ, 상인동 입석, 사적 제411호로 지정된 대구 진천동 입석이 있다. 분묘는 고인돌이 10개소, 돌널무덤·돌덧널무덤은 20개소에서 200여 기가 조사되었는데, 대천동 511-2유적에서는 시기를 달리하며 크게 2개의 군집을 이루는 돌널무덤·돌덧널무덤 68기가 확인되었다. 생활유적은 55개소로 주거지가 15기 이상 조사된 곳은 대천동 511-2유적[16기], 상인동 123-1유적[22기], 상인동 128-8유적[16기], 상인동 87유적[36기], 월성동 1275유적[17기], 월성동 777-2유적[16기] 등이며, 전체 주거지의 수는 260여 기에 이른다.

북구에는 분묘와 생활유적이 주류를 이루며, 칠곡분지를 가로지르는 팔거천연경동, 동변동, 서변동을 지나는 동화천 일대의 충적지에서 확인된다. 분묘는 돌널무덤으로 동천동, 서변동, 읍내동, 연경동 일대 유적 4개소에서 19기가 조사되었다. 생활유적은 20여 개소로 팔거천 일대의 동천동 취락유적과 매천동 154유적, 동화천 일대의 서변동 취락유적이 대표적인 중심 취락이다. 주거지는 9개 유적에서 167기가 확인되었는데, 유적에 따라 2~60기로 많은 차이를 보인다. 한편, 서변동 취락유적과 매천동 154-3유적의 소하천에서는 나무로 제작한 도끼자루, 절구공이, 고무래 등이 출토되어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였고 곡물을 재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구에서는 분묘와 생활유적, 제의유적, 생산유적 등이 있다. 분묘는 6개소에서 고인돌 상석이 각각 1기씩 확인된다. 생활유적은 대규모 취락이 대부분으로 봉무동 유적, 신서동 유적, 각산동 430-8유적, 괴전동 125유적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제의유적인 괴전동 입석[2기]과 생산유적인 지묘동 채석장이 있다. 수성구에서는 크게 분묘와 주거지가 밀집 조성되어 대규모 취락의 모습을 보여 주는 신천변 유적과 산발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금호강, 매호천, 욱수천 일대의 고산 지역 유적으로 구분된다. 신천변 유적에서는 19개소의 유적이 알려져 있는데, 상동중동 일대에 주로 분포한다. 분묘 9개소에서는 고인돌 상석과 돌널무덤·돌덧널무덤 150기가 조사되었다. 생활유적 12개소에서는 주거지 59기가 조사되었는데, 상동 80유적[15기]과 상동 89-2유적[20기]를 제외하고는 유적마다 1~8기 정도가 확인된다. 고산 지역 유적에서는 분묘와 생활유적 26개소가 확인되었다. 금호강 변의 가천동 일대에서는 3개소에서 각각 주거지 2기가 조사되었다. 매호천 변의 매호동시지동 일대에서는 분묘 8개소에서 고인돌 상석 12기·돌널무덤·돌덧널무덤 32기, 생활유적 6개소에서는 주거지·집석·수혈·구 등이 조사되었다. 욱수천 변의 사월동신매동, 욱수동 일대에서는 분묘 4개소에서 고인돌 상석 10기와 돌널무덤·돌덧널무덤 4기, 생활유적 3개소에서는 주거지 1기가 각각 조사되었다.

4. 초기철기시대

대구 지역에서 확인된 분묘는 팔달동 유적에서 기원전 2세기 후반경의 나무널무덤 5기가 조사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초기철기시대 말기에서 원삼국시대 초기로 이행하는 과도기 단계의 유적들이다. 석기 생산유적으로는 신천금호강의 합수지점 양단에 발달한 독립 구릉에 위치한 북구의 침산 유적연암산 유적이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청동 유물들이 다수 출토된 서구의 비산동 청동기유적과 평리동 청동기유적, 생활유적과 분묘가 확인된 유적으로는 남구의 이천동 295-7유적, 북구의 국우동 유적팔달동 유적, 동구의 신천동 청동기유적, 달서구의 월성동 777-2유적과 월성동 705유적, 수성구의 만촌동 청동기유적, 동구의 각산동 912-6유적 등이 있다.

5. 원삼국시대

기원전 1세기 경에 형성된 원삼국문화의 특징은 청동기와 석기의 쇠퇴 및 소멸, 급격한 철기의 확산, 새로운 토기 제작기술에 의한 와질토기의 생산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무덤에서도 변화가 일어나 새로이 나무널무덤과 나무덧널무덤이 등장하며, 토성도 축조된다. 대구 지역에 조성된 유적은 금호강과 그 지류인 팔계천의 합수지점에 위치한 팔달동 유적을 대표로 하여 서변동 고분군①, 사수동 563유적, 학정동 485유적에 대규모 분묘가 조성되고, 검단토성이 축조되는 등 북구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된다. 그 외에는 동구의 봉무토성봉무동 유적·신서동 유적·괴전동 고분군, 서구의 비산동 202-1유적, 남구의 대명동 1858-4유적, 중구의 달성토성, 수성구의 가천동 산146유적·가천동 541-2유적·매호동 1008유적 등이 알려져 있다.

6. 삼국시대

일찍부터 신라에 편입된 대구 지역은 당시 지방군현을 중심으로 고분군과 관방유적, 취락유적이 조성되어 있다. 중구에는 달성[사적]이 유일하며, 518년 또는 578년 제작된 대구 무술명오작비[보물]가 중구 대안동에서 발견된 바 있다. 남구의 대명동 고분군은 봉토분 40기와 수백기의 석곽이 알려져 있었으나 도시화로 인하여 대부분 소멸되었고, 용두산성은 대구에서 팔조령을 넘어 청도로 가는 긴 계곡의 입구인 신천 변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서구에는 대구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달성고분군상리동 일대에 중소형급 고분군이 분포한다. 달성고분군은 1931년에 제작된 고분 배치도를 통하여 중대형 봉토분 87기가 알려져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비산동 34·37호, 내당동 50·51·55·59·62호의 발굴을 통하여 금동관을 비롯하여 위계가 높은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최고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10여 건의 소규모 발굴을 통하여 다수의 돌덧널무덤이 조사된 바 있는데, 조성 시기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된다.

달서구에서는 고분군, 생활유적, 생산유적 등 22개소가 조사되었는데, 월배 선상지와 성서 궁산 일대로 양분되어 나타난다. 분묘는 월성동 고분군신당동 고분군이 알려져 있으며, 발굴을 통하여 13개소가 조사되었는데, 유적마다 돌덧널무덤 1~8기, 돌방무덤 1~3기 정도가 조사되었다. 생활유적은 11개소 중 4개소에서 주거지 1~2기 정도가 확인되었다. 다만 대곡동 유적에서 고상가옥 57기, 수혈 67기, 구 27기 등이 확인되어 대규모 취락의 존재를 보여 준다. 생산유적은 성서 신당동에서 토기가마 6기와 점토채취장, 월배 도원동에서 토기가마 6기가 조사된 바 있다. 북구에는 고분군, 관방유적, 생활유적 등 38개소가 알려져 있는데, 칠곡분지 일대에 집중되어 있고, 금호강동화천 일대에 일부 분포한다. 고분군은 13개소로 구암동 고분군, 금호동 고분군, 동변동 고분군, 복현동 고분군, 사수동 563유적, 서변동 고분군, 팔달동 유적 등이 분포하며, 조성 시기는 4세기에서 7세기까지이다. 구암동 고분군팔거리현 지배층 집단의 무덤으로 제1·56·58호분이 발굴된 바 있고, 사수동 563유적, 서변동 고분군, 팔달동 유적에서는 나무덧널무덤 25기, 석곽(실)묘 101기, 옹관 2기가 조사되었다. 관방유적은 구암동 고분군과 조합을 이루는 팔거산성이 있다. 생활유적은 칠곡분지를 가로지르는 팔거천 변의 구암동, 동천동, 동호동, 학정동 일대에서 15개소가 확인되었는데, 삼국시대 팔거리현(八居里縣)과 관련된 대규모 취락들이다. 이 중 사수동 유적에서는 누자식 건물 55기가 확인되어 6~7세기 대 대규모 취락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동천동 380유적에서는 보시설, 저수시설, 물막이시설, 둑 등 경작과 관련한 수리시설도 확인되었다.

동구에서는 삼국시대 해안현과 관련된 고분군과 관방유적, 생활유적, 생산유적들이 확인된다. 고분군은 동구 최대의 불로동 고분군과 하위고분군인 봉무동 고분군이 있고, 소규모 고분군으로는 각산동 고분군, 괴전동 고분군, 도동 고분군, 동내동 고분군, 둔산동 고분군, 미대동 고분군, 신용동 고분군, 용수동 고분군, 지묘동 고분군, 진인동 고분군 등이 산발적으로 분포한다. 관방유적으로는 용암산성이 있으며, 생활유적인 봉무동 유적과 신서동 유적은 대규모 취락의 형태를 보인다. 그 외 생산유적으로는 진인동 토기요지가 알려져 있다. 수성구에서는 고분군과 관방유적, 생활유적, 생산유적, 관방유적이 확인되는데, 지역으로 보면 크게 신천변 유적과 금호강, 매호천, 욱수천 일대의 고산 지역 유적으로 구분된다. 신천변 유적에서는 신천 상류에 조성된 소규모 고분군인 두산동 고분군, 만촌동 고분군, 파동 고분군이 알려져 있다. 이 중 두산동 고분군에서는 4세기 후반~6세기 후반에 이르는 나무덧널무덤·돌덧널무덤·돌방무덤·독무덤 29기, 만촌동 신라묘군에서는 석곽(실)묘 27기, 파동 산5-1유적에서는 봉토분 4기와 돌덧널무덤 42기가 조사되었다. 고산 지역 유적은 26개소가 알려져 있는데, 대구분지보다는 경산 지역과 관련된 유적들이다. 금호강과 그 소지류인 매호천욱수천의 주변에서 고분군과 관방유적, 생활유적, 생산유적이 확인되는데, 신천변 유적과는 달리 대규모 고분군과 취락 및 생산유적의 형태를 보인다. 관방유적은 성동산성욱수동산성이 있다. 금호강가천동 고분군에서는 4~7세기대 나무덧널무덤·석곽(실)묘 445기, 고모동 고분군에서는 6~7세기대 석곽(실)묘 23기가 조사되었다. 매호천 일대에서는 노변동 고분군에서 나무덧널무덤·돌덧널무덤·독무덤·제사유구 1,539기가 조사된 바 있고, 그 밖에 삼덕동 고분군, 대흥동 고분군, 시지동 고분군이 알려져 있다. 욱수천 일대의 욱수동 고분군에서는 나무덧널무덤·토광묘·돌덧널무덤·독무덤·제사유구 251기가 조사되었는데, 동일 능선상으로 연결되는 경산 중산동 고분군에서도 수백 기의 고분이 조사되어 노변동 고분군과 비슷한 규모를 보인다. 그 외 성동 고분군이 알려져 있다.

생활유적은 매호천욱수천 사이의 선상지인 시지동, 신매동, 욱수동 일대가 하나의 대규모 취락의 모습을 보여 크게 시지동 생활유적으로 묶어볼 수 있다. 시지동 생활유적은 4세기 중 후반부터 토기와 철기 장인들이 살던 대규모 취락으로 삼국시대 지방 소도시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발굴 조사된 35개소의 유적에서는 건물지, 주거지, 고상가옥, 수혈, 주혈, 우물, 도로 등이 다수 조사되었으며, 철기와 토기의 생산 공방들도 확인된다. 생산유적은 욱수동에서 토기가마 5기가 조사되었는데, 동일 능선상으로 토기가마 38기가 조사된 경산 옥산동가마와 하나로 연결된다. 이 토기가마군은 4세기 중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조업이 이루어졌으며, 신라의 지방에서 발견된 최대 규모 토기 생산 단지로 주목받고 있다.

7. 통일신라시대

757년(경덕왕 16)의 지방관제 정비 시 대구 일대 지방 군현과 관련된 유적과 불교 건축물이 많이 분포한다. 먼저, 대구현(大丘縣)이던 중구 일대에는 유적이 상대적으로 적은 데 비하여 수창군(壽昌郡)의 수성구 일대에서는 관청 건물과 대규모 취락이 형성된 양상이 확인된다. 그리고 팔리현(八里縣)의 중심지이던 북구 칠곡 읍내동 일대와 화원현(花園縣)의 영역이던 달서구 월배 선상지 일대에서는 건물지와 병영지, 취락과 관련된 많은 수의 주거군이 확인된다. 그리고 동구에서는 팔공산 일대에는 동화사파계사, 부인사 등과 관련한 불교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다. 그 외 남구와 서구에서는 분묘가 일부 조사되었다.

중구에서는 건물지와 주거지, 수혈 등 생활유구와 경작유구인 논이 조사되었지만, 대구의 중심부인 데 비하여 유적은 거의 없는 편이다. 남구에는 대덕산성고산골에 위치한 법장사(法藏寺)의 석축 및 삼층석탑이 유존하며, 봉덕동에서 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다. 서구에서는 상리동 유적에서 석곽(실)묘 2기가 조사되었다. 달서구에서는 분묘와 생산유적, 건물지, 담장지, 주거지, 고상가옥, 수혈, 도로 등의 생활유적이 조사되었다. 분묘는 신당동, 월성동, 진천동 일대에서 소수의 석곽(실)묘가 확인되었고, 생산유구는 대곡동 유적에서 기와가마 2기가 조사되었다. 생활유적은 20개소가 조사되었는데, 주거지는 대곡동, 월성동, 유천동, 진천동 등 6개소에서 64기가 조사되었다. 북구에서는 절터, 건물지, 고상가옥, 주거지, 수혈, 우물, 구, 매납유구 등이 조합된 생활유적, 단야로와 토기가마와 같은 생산유적을 포함하여 10개소가 조사되었다. 구암동사지는 운암사(雲岩寺)가 있었다고 하는 곳이다. 생활유적은 검단동, 구암동, 연경동, 읍내동, 학정동 일대에 분포한다. 이 중 8세기 초반~9세기 후반 팔리현(八里縣)과 관련된 공해유적들도 있는데, 읍내동 491유적에서는 취사와 난방이 가능한 쪽구들을 갖춘 주거지 14기와 우물 등이 조사되고, 구암동 병영지 유적은 대규모 임시 거주시설과 철제 무기류 2,000여 점이 출토되어 군사 주둔 시설로 보고된 바 있다. 그리고 금호강 동편 해안현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연경동 취락유적에서는 대규모 취락이 조사되었다.

동구에는 팔공산 일대의 불교 건축물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발굴을 통하여 생활유적과 생산유적이 조사되었다. 대표 유적으로 도동관음사, 도학동 김당암·염불암, 동화사 마애불좌상·금당암 삼층석탑·당간지주·비로암 삼층석탑·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 송정동 석불입상, 신무동 부인사지·부인사 서탑·부인사 석등, 용수동 사지,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 중대동 파계사 등이 있다. 수성구에서는 분묘와 생활유적, 유물산포지 등 26개소가 알려져 있다. 분묘는 시지동, 황금동, 파동에서 1~2기 정도의 석곽(실)묘가 조사되었다. 생활유적 9개소에서는 건물지, 주거지, 수혈, 우물, 도로 등이 조사되었다. 특히, 주거지는 상동중동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데, 대부분 쪽구들을 갖춘 구조로 36기가 인접하여 군집을 이루고 있다. 이 중 중동 356-7유적에서 조사된 대형 건물지는 용면와, 암수막새 등 격이 높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수창군의 공해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8. 고려시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후백제와 고려가 부딪치는 과정에서 일어난 927년(태조 10)의 공산전투 이후 왕건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남구 대덕산과 동구 팔공산 일대에는 불교 유적이 많다.

중구에서는 달성[사적]에서는 고려시대 성벽 개축 관련 석축과 공평동전동에서 건물지와 주거지가 소량 조사되었다. 남구에는 왕건과 관련된 대명동 왕굴, 은적사, 안일암 등이 알려져 있다. 달서구에서는 왕건이 쉬어갔다는 임휴사와 분묘 10개소, 생산유적 2개소, 생활유적 6개소가 알려져 있다. 서구에는 비산동상리동에서 분묘 및 생활유구가 조사된 바 있다. 북구에서는 분묘, 생활유적, 생산유적 등 11개소가 조사되었는데, 팔리현의 중심지인 읍내동에서는 관청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 4동과 주거지 18기를 비롯하여 각종 생활유구가 확인되었다.

동구에서는 도학동 북지장사, 백안동 사지, 봉무동 독좌암, 용수동 마애불두상, 신무동 부인사지·삼성암지·삼성암지 마애약사여래입상·마애불좌상·지묘사지, 용수동 와요지, 진인동 자기요지 등 불교 유적과 생산유적이 알려져 있다. 수성구에서는 21개소의 분묘와 생산유적, 생활유적 등이 조사되었다. 분묘는 내환동과 욱수동 일대에서 토광묘 279기와 골호 4기가 조사되었는데, 고려~조선시대에 걸친 무덤이다. 생산유적은 범어동, 성동, 중동, 욱수동에서 기와가마와 삼가마가 조사되고, 생활유적은 고려~조선시대로 이어지는 건물지, 주거지, 고상가옥, 석축, 배수로, 우물, 수혈, 와적시설, 도로 등으로 17개소가 확인되었다.

9. 조선시대

조선시대 유적은 대구읍성과 공해건물, 그리고 유림의 서원, 서당, 재실, 일반가옥, 누정, 비와 비각 등 현존하는 건조물이 대부분이다. 중구는 조선시대 대구 중심지였던 만큼 대구읍성 내에 있던 경상감영 및 대구부사와 관련된 공해건물과 관리 및 백성들이 살던 생활유구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대구읍성은 대부분 철거되었지만 북성로에서 체성의 기저부와 부속시설 일부가 조사된 바 있다. 공해건물로는 경상감영에 속한 선화당, 징청각, 관풍루가 남아 있으며, 전동 23-2유적에서는 감영의 주 진입도로와 관풍루지, 중삼문지, 중삼문에서 선화당으로 이어지는 보도(步道), 부속건물인 도훈도청지 및 군뢰청지와 관련 건물지와 화장실, 석렬 등의 기초시설이 조사되었다. 달서구에서는 신당동가선대부 김악소불망비, 월암동삼현유허비, 파호동이락서당, 신당동석장승이 알려져 있다. 남구에서는 알려진 건조물이 없으며, 서구에서는 팔달교지와 대구부 사직단지가 확인되었다. 북구에 유존하는 건조물은 15개소인데, 산격동구암서원 숭현사, 검단동압로정, 노곡동판관 서유교 영세불망비, 도남동유화당, 동변동능성구씨 화수정, 동호동의 도산재, 산격동용담재서명보 효자각, 서변동송계당환성정서계서원, 서변동판관 이징해 영세불망비, 연경동광해군 태실오사재, 읍내동칠곡향교가 남아 있다. 그리고 읍내동 일대에서는 칠곡도호부의 공해건물인 향청지, 사직단지, 형옥지 등이 조사되었고, 사수동에서는 정구가 강론하던 사양정사와 팔거창 관련 건물지가 확인된 바 있다.

동구에는 팔공산 일대의 불교 관련 건축물, 사지, 승탑, 미륵불을 비롯하여 집성촌, 재실, 정자, 묘 등 다양한 문화재 50여 개소가 남아 있다. 내곡동심락재, 도동구로정·마애미륵불상, 도학동내원암·부도암·비로암·양진암, 둔산동경주최씨 집성촌·정효각·첨송재·추모재, 부동친목당, 신무동강사당 어사각·부인사지·신무동사지·통정대부 최공지묘, 율하동삼사당, 지묘동의 도성사·삼충사·채종서 주택, 평광동모영재·와룡암·참봉경주금공묘, 봉무동독암서당·봉무정, 도학동동화사 대웅전·극락전·수마제전, 동화부도군, 부도암 부도, 미대동성재서당, 신무동부인사 부도·수릉봉산계 표석, 용수동수릉향탄금계 표석, 평광동의 고려태사장절신공영각 유허지비·첨백당·효자 강순항 정려각, 중대동파계사 기영각·설선당·원통전·적묵당·진동루 등이다. 수성구의 현존 건조물은 12개소로 사당, 서원, 정려각, 비, 묘 등이다. 노변동정지언 정효각, 만촌동대구부수성비·영영축성비·독무재·하효자 정려각, 범물동의 효열밀양박후성처 성주배씨지려비·전주최씨 사당, 상동이공제비군수이후범선 영세불망비, 시지동비석군, 이천동의 가선대부 양정운 묘 및 비, 지산동효자 하잠동지려비, 황금동청호서원 등이 남아 있다.

10. 근대

근대 문화재는 1876년 개항 이후의 대구 지역에 건축된 서원, 서당, 재실, 정려각, 비, 종교 관련 시설, 병원, 학교, 배수지, 철도관사 등 다양하다. 대구의 중심지인 중구에 집중되어 있으며, 중요한 건조물들은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중구에는 일찍부터 대구에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지은 많은 종교 건물들과 일제강점기 기관에서 지은 병원 및 교육시설, 개인 건물 등이 남아 있다. 대부분 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중구에서는 이러한 문화유산을 근대문화골목 투어코스로 개발하여 “근대로의 여행”이라는 도보여행길로 잘 활용하고 있다. 계산동남산동 일대에는 천주교와 관련된 종교시설이 많다. 계산동성당[1902년]과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내의 성당[1927년]·코미넷관[1915년]·수련원[1938년]·성요셉병원[1931년]이 있고, 천주교 대구교구 내에는 성모당[1918년]·성유스티노신학교[1914년]가 있다. 그 외 개신교 관련 건물인 남산교회[1932년], 독립운동가 이상정 생가이상화 고택이 남아 있다. 동산동대신동에는 개신교 관련 병원 및 사택, 학교 사택 등이 많이 남아 있다. 동산병원 내에는 구관[1931년]과 1910년경 선교사들의 사택으로 지어져 박물관으로 이용되는 선교사스윗즈주택·선교사챔니스주택·선교사블레어주택이 있고, 계성학교 내에는 아담스관[1908년]·맥퍼슨관[1913년]·핸더슨관[1931년]이 있으며, 남성로에는 대구제일교회[1933년]가 있다. 개인 건축물로는 남일동정소아과의원[1937년], 대구화교협회[1929년], 북성로의 경북자동차 매매사업소[1920년경]·광명페인트상회[1920년경]가 있으며, 서문로의 부산비닐상사[1937년], 태평로구성운[1934년], 포정동향나무식당[1930년] 등 서구식의 붉은벽돌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기관시설로는 대구화교소학교[1925년], 구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1933년], 구 도립대구병원[1928년], 구 교남 YMCA 회관[1914년], 구 대구금융조합[1925년],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1932년], 남산초등학교 강당[1936년], 구 대구상업학교 본관[1923년], 경북대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강당[1925년]과 경북대사범대학부설중학교 본관[1923년] 등이 남아 있다.

남구에는 대구 지역 최초의 수도 시설인 대구 대봉배수지[국가등록문화재 제251호]가 있고, 서구에는 대구 애락원에 수용된 나환자들을 위해 선교사 프랫처가 건립한 애락교회[1928년경], 대구애락보건병원 식당[1930년경], 대구애락보건병원 병동[1923년] 등이 있다. 달서구에는 대곡동저존재, 이곡동의 용강사, 상인동인산정사, 호산동효부각 등 일제강점기에 만든 건물들이 있다. 북구에는 구암동운곡서당이인술 주택, 국우동도남정사, 노곡동영모재태충각, 노원동효사각, 도남동도남재창열각, 동변동영사재, 산격동체화당, 읍내동구천서당 등이 남아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동구에는 효목동조양회관, 검사동동촌역, 대림동서종호 주택·종이품전봉상사제조서상하 송덕비, 도동구회당·전귀당·백원서원·추보재·문창공영당, 도학동의 약수암, 동내동동호서당·승방재, 미대동의 채경기 주택·채효기 주택, 백안동영안재, 봉무동경지당·원모재·봉무동 동굴, 부동월천재, 사복동오우당, 송정동의 원감재, 숙천동오산재·원모재, 신기동반야월 역사, 용수동구경회 주택, 중대동파계사 성전암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수성구에는 고모역 철도관사, 만촌동명정각, 상동야수정, 성동퇴도이선생우복정선생 강학유허비·고산서당·성산재, 파동오천서원, 황금동의 첨모재 및 덕산서원 등 서원과 재실, 비와 비각 등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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