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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칠실족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1381
한자 上漆室族兄
영어공식명칭 Sangchilsiljokhyeong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86년 - 「상칠실족형」최상룡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849년 - 「상칠실족형」최상룡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 「상칠실족형」간행
배경 지역 「상칠실족형」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지도보기
성격 서독류|서
작가 최상룡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최상룡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에 거주했던 족형 최화진에게 보낸 서간.

[개설]

최상룡(崔象龍)[1786~1849]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자는 덕용(德容), 호는 봉촌(鳳村)이다. 최상룡은 달성(達城)의 강동(江洞)[현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서 출생했다. 최상룡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세상이 어지러워 분경(奔競)[엽관운동]이 심해짐을 보고 향리로 돌아와 독암서당(讀巖書堂)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니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문전을 메웠다. 고을의 과거한 사람의 명부를 보관하는 사마소(司馬所)를 중수하고 향약의 세부지침을 만들어 자치제도를 확립하고 마을의 풍속을 규정했다. 당시 대학자인 홍직필(洪直弼)·유치명(柳致明)·김익동(金翊東) 등과 경전과 예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경전(經典)의 주요 내용을 도시(圖示)[그림, 도표 따위로 그려 보임]하여 맥락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성리학과 훈고학을 깊이 연구해 「사서변의(四書辨疑)」·「재이록(在邇錄)」·「소학췌의(小學贅疑)」·「계몽차의(啓蒙箚疑)」·「정주서변의(程朱書辨疑)」 등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저서로는 『봉촌문집(鳳村文集)』 22권이 있다.

[구성]

「상칠실족형」은 족형[친척 형] 최화진의 안부를 물으며 공부로 인한 답답함을 토로하고, 학문에 의문이 있어 찾아가 여쭙길 부탁하고 있다.

[내용]

「상칠실족형」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배퇴(拜退)하고 물러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그리워하며 울적한 마음에 그간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지난 가을에 나아가서 뵐 때, 비로소 자신을 위하는 공부에 관하여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배움에 나아가는 것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소학』을 일컫고, 효제에 관해 말하자면 반드시 백불암[최흥원]을 일컫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한 가닥 떳떳한 이치가 유연히 감발하여 옛날 오염된 것을 통렬하게 고쳐서 새로운 뜻을 발휘하고자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소학』에서는 이미 팔세 몽양(蒙養)의 공부를 놓쳐버렸고, 효제에서는 부여받은 성품이 이미 노둔하고, 소절(疏節)을 기름에 이르러서는 망연히 그 방향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으니 어찌 능히 진취하는 바가 있어 교육의 지극한 뜻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대학(大學)』은 『과송(課誦)』[이황의 『고경중마방』 가운데서 요체를 발췌 윤득부가 엮음]에 의지하여 배웠고, 『논어』는 지금 보고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깊이 탐구하는 공부가 없어서 종일토록 익숙히 읽어도 의미를 알지 못해 월초부터 책상자를 매고 가서 배움을 청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특징]

「상칠실족형」은 서간문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간곡하고 겸손하게 찾아가 배우기를 청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상칠실족형」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몰두하고 절차에 맞게 학문에 나아가는 당대 선비의 일면을 알 수 있고, 가학(家學)의 중요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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