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말 창원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 항쟁. 1862년 농민 항쟁[임술년 창원 민란] 이후부터 1894년 갑오 농민 항쟁 이전까지 발생한 농민 항쟁은 1882년부터 재연되기 시작하여 1887년에 격화되며, 1889년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890년에서 1893년에 걸쳐 전체의 절반이 집중되어 있으며 대체로 삼남 지역과 황해도에서 일어났다. 창원 지역에서는 18...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에 있는 3·15 의거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세운 기념탑.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은 장기 집권을 꾀하기 위해 온갖 부정 선거 실행하였다. 이에 분개한 마산 지역 시민과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항거해 싸웠는데, 이를 3·15 의거라 한다. 3·15 의거 기념탑은 이를 기리고자 1962년 9월...
-
6·25 전쟁 시기에 병참 기지로 쓰이면서 진동 지구 전투 등이 벌어졌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 지역. 6·25 전쟁 시기에 창원시 마산회원구와 마산합포구 지역은 병참 수송 기지였으며, 국군 의무병과의 근원지이기도 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의 최대 병참 기지였던 마산회원구와 마산합포구 지역은 7월 말 경 마산만에 미군 LST정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마산항 중앙 부두에는...
-
조선 말기 창원 출신의 문신. 감기현의 본관은 회산(檜山)이다. 초명은 감태현(甘泰鉉), 자는 영팔(英八), 호는 동미(東湄). 감경인(甘景仁)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감재원(甘在元), 어머니는 죽헌(竹軒) 안수금(安守嶔)의 딸로서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감기현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내리동에 살았다. 1899년(고종 36) 민영환(閔永煥)의 천거로 궁내부주...
-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유생. 감제현의 본관은 회산(檜山). 자는 성색(聖穡), 호는 직재(直齋). 감경인(甘景仁)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이이재(怡怡齋) 감재규(甘在奎)[1852~1915]며, 어머니는 박동윤(朴東允)의 딸로서 밀양박씨(密陽朴氏)[1853~1903]이다. 감제현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내리동에 살았다.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
경상남도 창원 마산 출신의 정치인이자 기업가. 강선규(姜善圭)[1925~1989]는 창원 출생으로 마산 공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졸업한 뒤 고려 대학교를 수료하였다. 마산 중리에 있는 내서 탁주 대표로 지역 사회의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그 이후 제 2대 마산시 의원을 지내고 민주당 마산시당 위원장, 민정당 경남 제1지구당 위원장,...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출신의 현대 화가. 강신석(姜信碩)[1916~1994]은 1916년 마산에서 태어났다. 1945년 하르빈대에서 공대 교수를 역임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이후 미술 활동을 하다가 1952년에는 해군 종군 작가로 참전하였다. 1960년대에는 주로 마산 외교 구락부 등에서 활동을 하였다. 강신석은 파스텔 화가였는데 파스텔이 갖고 있는 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신의 사진 예술가. 강신율(姜信律)[1913~2009]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오사카 미원 상공학교 기계과를 졸업하였고 오사카 음대에서 현악과를 2년간 수료하기도 하였다. 다시 오사카 사진학교를 수료한 후 귀국하여 마산의 조광 사진관을 인수 받아서 운영하였다. 1955년에 마산 사진사회 회장을 역임하고, 1956년에 첫 개인전을 개...
-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음악가. 강영중[1945~1997]은 마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대학교 음악 대학 음악과 [성악 전공]를 거쳐, 단국 대학교 대학원과 이탈리아 아르츠 아카데미(Italia Arz Accademia)를 졸업했다. 창원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창원 시립 합창단 지휘자, 경남 오페라단 단장을 역임하였다. 1991년 경남 오페라...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연도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덕을 베푼 인물. 강유출(姜裕出)[1902~1967]은 진해의 연도[현 창원시 진해구 연도동] 주민의 한 사람으로 평생토록 연도 사람들에게 온후한 덕과 인자한 행실로 많은 감화를 행하였다. 강유출의 사후 10여년이 지난 뒤인 1977년에 강유출의 공덕을 잊지 못하고 송덕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강유출은 살아있는 동...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마산 출신의 독립 운동가. 강종완(姜宗完)[1900~1962]은 마산 동성동에서 출생하였다. 성격이 강직하고 힘이 셌다고 한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마산을 비롯하여 인근의 함안, 진주 등지를 다니며 180여명의 동지들을 규합하고 배일 결사대를 조직하여 구국의 길에 나섰다.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독립운동을 선전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는 등...
-
1906년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에 설립되었던 근대 교육 기관. 근대 교육 기관인 사립학교가 설립된 것은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적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민족 지도자들은 조선 사람들의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함양을 위하여 사립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 등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사립학교는 민족 운동의 터전이 되었고, 민족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사립...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해군 사관 학교 앞바다에 띄워놓은, 조선 시대 사용된 전투함의 모형. 최근까지 전해오는 문헌 중에서 ‘거북선’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조선 왕조 실록』이다. 이 기록에는 1413년(태종 13) 5월 초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고, 1415년에는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
8·15 광복 이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정치 단체의 마산 지부. 건국 준비 위원회는 해방 직후 일본으로 행정권을 인수받고 과도기의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는 것 등을 목표로 결성되었는데 마산 지역도 같은 취지로 건국 준비 위원회 마산부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1945년 8월 17일 석정(石町)의 공락관(共樂館)에서 건국 준비 위원회 마산부 위원회 결성 대회를...
-
해방 직후 창원 지역에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창원군 상남면 지부. 1945년 8월 초 일본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일본의 패망과 함께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에 대한 문제와 앞으로의 한일 관계의 원만한 해결을 위하여 일본과 협력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이 필요했다. 이에 여운형(呂運亨)이 그 제의를 받아들였고, 8월 15일 총독부 정무총감의 관저...
-
경상남도 마산 지역이 ‘민주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시대적 사건과 배경.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서울에서는 여운형의 주도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조선 건준]가 결성되었다. 8월 17일 발표된 조직 명단을 보면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 부장 최근우, 재무 부장 이규갑, 조직 부장 정백, 선전 부장 조동호, 무경 부장 권대석 등 사회주의 계...
-
1920년대 있던 마산부 지역 신문 기자 단체. 1920년 일제가 식민 통치의 수단으로 ‘문화 통치’를 채택하면서 일제의 허락 하에 『조선 일보』·『동아 일보』 등 신문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대 초반에 지역 주재 기자들을 중심으로 경남 기자 동맹이 형성되었고, 곧이어 하부 조직으로 지역 단위의 기자단이 형성되었다. 마산 기자단이 신문지상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
대한 제국기 창원 지역에 설립된 지방 은행. 농공 은행은 대한 제국의 일본인 재정 고문 메가다가 식민 정책의 하나로 농업, 공업의 개량 발달을 위한 자금 대부를 표면적 이유로 내세워 설립을 추진하였다. 설립을 위한 자금은 일본 흥업 은행으로부터 조달하려 하였다. 이는 일본 흥업 은행으로 하여금 농공 은행의 운영권을 장악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일본 흥업 은행은 농공 은행이 발행하...
-
개항기인 1904년 2월에 마산포 주재 일본 영사관 소속 경찰을 조선인들이 습격한 사건. 개항기에 일어난 일본 경찰에 대한 조선인 습격사건이며, 조선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1904년 2월 마산포 주재 일본영사관 소속 경찰 경익태랑(境益太郞)이 낙동강 하류로 수렵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창원군 내서면 근처의 조선인 민가에 투숙했는데, 10여 명의 조선인이...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고묘주(高昴柱)[1893~1919]의 본관은 제주이며, 창원시 진전면 출신이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창원군 진전면, 진동면(鎭東面), 진북면(鎭北面) 3개 면의 연합 독립 만세 운동인 삼진의거(三鎭義擧) 당시, 계획에 따라 집합 장소인 진전면 양촌리 천변에 모여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8,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독립 만세를...
-
창원시 마산 출신 여배우. 아버지는 통영 군수를 지냈다. 1952년 초대 마산시 의회 부의장을 지낸 고재열이 오빠다. 고선애(高善愛)[1911~?]는 마산 출신으로 대구에서 대구 공립 고등여학교를 다녔으며 졸업 후 함경남도 북청 초등학교에서 잠시 교사생활을 하였다. 이후 결혼하여 희곡과 단편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나운규의 ‘연쇄극’에 참여하면서 배우생활...
-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기업인. 고진규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창녕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회사에 근무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해 1954년 5월 20일 경상남도 마산시 오동동의 구 동양공업사 자리에서 삼성공업사를 창업하고 라디에이터를 주로 다루었다. 195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다이와라지에타에서 최신 라디에이...
-
1950년 8월 11일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재실(齋室)에 피란해있던 마을 주민 150여 명이 미군의 공격을 받아 86명이 희생된 사건. 곡안리는 경상남도 진주시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을 잇는 2번 국도 상에 자리 잡은 성주 이씨 집성촌으로 전쟁 당시 170여 가구가 모여 사는 큰 마을이었다. 또한 지금은 2번 국도가 쇠락했으나...
-
1922년에 간행된 경상남도 창원 출신 학자 김상정의 문집. 김상정(金尙鼎)[1668~1729]은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창의통문(倡義通文)을 짓고 의병을 일으켜 진압에 공헌하였다. 김상정의 시문은 조카이자 제자인 김윤(金潤)·김함(金涵) 형제에 의하여 수집·보관되었다. 이 후 이재(李栽)[1657~1730]의 교정을 거쳤으며, 1922년...
-
1930년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식민지 교육 환경을 개혁하려는 민족교육운동 함안의 군북 공립 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김두영은 식민지 통치하의 교육환경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당시의 교육현실에 대해 “취학아동이 취학연령 아동의 불과 2할이고, 그나마 빈곤으로 퇴학하는 아동이 속출했으며, 혹 야학같은 것을 설치하고 교육하면 당국은 특별한 이유없이 폐쇄를 명하였으며...
-
1910년대 일본에 의해 실시된 조선 토지 조사 사업 당시 작성된 토지 관련 문서철.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하고 을사조약을 맺음으로써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정치, 군사, 경제적 침략을 하였다. 특히 당시 국부(國富)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토지는 재정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지세(地稅)의 근거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침탈을 서둘렀...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남동에 있는 옛 일본군 헌병 분견대 건물. 구 마산 헌병 분견대는 옛 일본군 헌병 분견대 건물로, 일제 강점기 중반인 1926년에 붉은 벽돌로 지었다. 일본 군대의 마산 진출은 1905년 5월 마산선(馬山線) 철도가 건설될 때 시작되었다. 1909년 12월에 대구 주둔 일본군 헌병 분견소가 신마산에 설립되었고, 3·1 운동 후인 192...
-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창원시 현동에 진해 방비대 사령부로 지어진 근대 건축물. 구 진해 방비대 사령부는 일제 강점기 진해에 자리 잡은 일본 해군의 진해 방비대 사령부 건물로 사용하기 위해 1912년에 건립되었으며. 1945년 광복 이후 최근까지 한국 해군의 진해기지 사령부 건물로 사용되었다. 구 진해 방비대 사령부는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현동 23-1에 있...
-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창원시 현동에 진해 방비대 사령부 별관으로 지어진 근대 건축물. 구 진해 방비대 사령부 별관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해군 기지인 진해 방비대 사령부의 별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사령부 본관의 장엄하고 화려한 구성과 비교하면 간소한 의장을 취하고 있지만, 1912경에 지은 서양식 건물로서 좌우가 균제된 형태미가 돋보이는 건물이다. 경상남...
-
2010년 7월 1일 창원·마산·진해시가 경상남도 창원시로 통합되기 이전의 진해. 경상남도 창원시로 통합되기 이전의 진해시는 조선 시대에 웅천 혹은 웅신 등으로 불렸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군항 및 시가지가 새롭게 건설되었고 1912년에 기존의 웅중면과 웅서면을 포함하는 진해면이 되었다가, 1931년 진해읍으로 승격하였다. 해방 이후인 1955년 9월 1일에 진해읍이...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현동에 있는 옛 진해 요항부의 병원 건물. 구 진해 요항부 병원은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12년 2월에 당시 진해 해군 기지 내에 지은 옛 진해 요항부의 병원 건물로, 최근까지 의료원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붉은 벽돌 조적조 단층 건물로 전반적으로 간결 소박한 기능적인 건물이다. 전반적인 형태는 진해 해군 기지 내 주요 건물에 사용된 다른...
-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현동에 일본 해군 기지인 진해 요항부 사령부 건물로 지어진 근대 건축물. 구 진해 요항부 사령부는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14년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붉은 벽돌조 3층 건물이다. 지붕의 중앙 부분에 높이 솟아오른 박공 지붕을 두었으며 수직의 긴 창을 반복적으로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의 균형미를 강조했다. 경상남도...
-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근화동에 진해 해군 통제부 병원장의 관사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단층 일본식 주택. 구 진해 해군 통제부 병원장 사택은 일제 강점기 후반인 1938년에 진해 해군 통제부 소속 병원장의 관사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단층 일식 가옥이다.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삼고자 이듬해인 1911년 진해에 군항을...
-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고암리에 있는 폐광산. 구리를 생산하던 구룡광산은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한 1,000여 개 금속 폐광산 중 하나이다. 구리는 동(銅)이라고도 하며, 금·은 등과 함께 메달·화폐를 만드는 데 쓰인다. 구리는 자연적으로 산출되기도 하지만 광석에서 추출하는 방법(제련)도 비교적 간단한 편이어서 여러 금속 중 가장 먼저 이용되었다. 19세기 말 전기가 산업적...
-
1919년 3월 21일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구마산 장날에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 1919년 3·1 운동이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마산 지역[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와 마산합포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3월 3일 오전 11시쯤 두척산[무학산]에서 고종 황제 국장 행사에 모인 시민들에게 조선 독립의 당위성과 항일 궐기를 고취하는 연설과 함께 독립 선언서...
-
개항기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일본 제국주의 침탈에 대한 항쟁. 1899년 개항 당시 마산포에는 4곳의 선창[오산선창, 어선창, 백일세선창, 서성선창]을 중심으로 상가와 민가들이 모여 있는 정도였고, 선창의 자연조건에 따라 장소가 협소하고 수심도 얕아 상품의 하역과 선적에 불편함이 많았다. 이러한 불편을 개선하기 위해 동성리에 거주하는 김경덕(金敬悳)이 서성리에서 오...
-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야구단 1920년대 김성두를 주축으로 구성 야구단이 조직되어 서울과 부산 등의 야구단을 초청하여 경기를 열었다. 이후 경제난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마산 운동계의 유지 김계호와 김종수의 도움으로 운동 기구를 사서 활동을 하였다. 구성 야구단은 야구 경기뿐만 아니라, 마산 지역에서 개최되는...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구수서(具守書)[1894~1950]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봉암 마을의 구장으로 마을과 인근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의 의지를 되새겼다. 당시 거사를 계획하던 변상헌 등을 찾아가서 논의를 한 뒤 그들과 함께 하기로 결심하고, 마을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였다. 그 결과 마을 주민 모두가 적극적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구재균은 1919년 3월 23일 경상남도 창원군 창원읍 장날 장터에서 설관수·공도수·조윤호·신갑생·김호원·조희순 등을 비롯한 군중 7,000여 명과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어 4월 2일 2차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군중을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제에 의해 검거되고,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아 수감되...
-
1921년 경남 진해에서 학구적 생활과 신체 단련을 위해 조직된 청년 단체. 1921년부터 2년간 대정 학교[현 경화 초등학교] 출신 청년들로 구성되어 ‘구학(究學)’이라는 회지를 발간하면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구학회에서는 민족 사상의 고취와 민족적 역량을 쌓는다는 의미의 ‘구학(究學)’이라는 회지를 발간하였다. 1923년 8월 5일 경화동 공회당에서 우원도의 사회로 임...
-
경상남도 마산 지역에서 미국 군정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우익 단체. 1945년 8월 17일 마산 창동 공락관에서 건국 준비 위원회를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친일파 출신 인사들이 함께 결성하고 마산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마산 지역 건국 준비 위원회는 위원장은 물론 조직과 서기, 실질적인 행동대 격인 치안대장 등 핵심 요직은 모두 진보적인 사람들이 맡고 있었다....
-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영대(權寧大)[1885~1946]는 1919년 3월 28일 창원군 진동면(鎭東面) 고현(古縣) 장날 독립 만세 운동과 4월 3일의 ‘삼진[진동면·진전면·진북면] 의거’를 주도하였다. 서울의 3·1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조선 국권 회복단’의 단원 변상태(卞相泰)와 동지 변상섭(卞相攝), 권영조(權寧祚), 권태용...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출신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권영조(權寧祚)[1883~1955]는 진동면 고현리에서 태어나 1910년 향리에서 사립 경행학교를 설립하였다. 인근의 청년들을 모아서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진전면 일암리 변상태의 집에서 권영태, 권태용 등과 같이 거사를 계획하고 구체적인 준비에 돌입하였다....
-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활동했던 화가. 권영호(權永鎬)[1936~2012]는 경주에서 태어나 포항 구룡포 등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포항 수산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라벌 예술대학 연극 영화과에 입학했으나 곧바로 미술과로 전과해 2년 과정을 마쳤으며, 그뒤 영남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1년부터 경북의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76년 경남 대학교...
-
일제강점기 창원시 진전면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오규(權五奎)[1895~?]는 1919년 3월 28일 진전면 고현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권영조, 백승학 등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시위 대열의 선봉에 서서 장터에 모인 600여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격문을 뿌리고 구호문을 외치며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부산...
-
경상남도 창원 마산진전면 출신의 법조인이자 정치인. 권오병(權五柄)[1918~1975]은 1942년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1943년 와세다 대학원을 수료한 뒤 법학박사가 되었다. 1943년 일본 고등 문관 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1945년 부산 지방 검찰청 검사가 되었다. 이후 1954년 광주 지방 검찰청에 근무하다가 1960년 경희 대학교 교수가 되었...
-
창원시 마산 출신의 교육자. 권오봉(權五鳳)[1879~1959]은 흥화 학교를 졸업하였다. 백산 상회에 자금을 투자하여 독립운동 기금 모금에도 힘썼다. 1910년에 마산 진전면 오서리에 있는 경행재(敬行齋)에 사립 경행 학교를 설립하고 후진 양성에 공을 들였다. 당시 경행재는 신교육의 전당이자 민족 교육 운동의 요람이었다. 그러나 이 학교는 1927년에 일제가...
-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출신의 교육자. 본관은 안동. 권용현의 후손이다. 권오익(權五翼)[1905~1998]은 1927년 일본 동경 대학을 졸업하고, 배재 고등학교, 중동 고등학교, 보성 고등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해방이 된 후 1948년 서울 대학교 교수, 1957년 서울 대학교 상과대학장, 1961년 미국 미시간 대학 객원교수, 1962년...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산청 출신으로 마산과 경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 권우성(權又成)[1915~?]은 1931년 3월 서울 중앙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 2월 6일 새벽 일제의 열하(熱河) 출병을 반대하는 반전격문(反戰檄文)을 살포하다 검거되어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1934년 8월 마산에서 독서회, 적색 노동 조합 결성을 위해, 1935년 5월에...
-
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태선(權泰璿)[1891~1962]은 3·1 운동에 참가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조선 국권 회복단’ 단원인 변상태(卞相泰)와 동지 권영조(權寧祚), 권태용(權泰容), 권영대(權寧大), 변상섭(卞相攝), 백승인(白承仁) 등과 함께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3개 면(面) 연합 시위를 계획하고...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출신의 정치인. 권태욱(權泰郁)[1907~1981] 일본 도쿄[東京]의 마포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주오]대학 예과 및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일본 도쿄에서 치과 재료상을 경영하다가 광복 후 귀국하였다. 1948년에서 1950년에 무소속으로 제헌 의원을 지냈고, 1950년에서 1954년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출신의 시인이자 평론가. 권환(權煥)[1903~1954]은 1921년 중동 학교 중등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신소년』에 「아버지」를 발표하였다. 일본 야마가다[山形] 고등학교를 거쳐 1927년 교토[京都] 제국 대학 독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사상운동으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으며 일본 유학생 기관지인 『학조...
-
8·15 해방을 맞이하여 경상남도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 지역으로 귀환했던 한국 사람. 해방을 전후하여 재일 한국인들이 마산으로 귀환했다. 해방 이전부터 귀환 이동이 시작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약 25,000여 명이 마산으로 귀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온 사람들로 마산 인근의 농촌 지역인 창원군, 함안군, 의령군 등의 출신들이었다. 귀국 직후엔 연고지로 갔다가...
-
일제 강점기와 현대에 걸쳐 경상남도에서 활동한 음악가. 본명은 김수현(金守賢)이고, 본관은 김녕 김씨(金寧 金氏), 아호는 낙초(洛初)이다. 20대 시절에 순 한글 이름인 금수현으로 개명하였으며, 지휘자 금난새가 그의 아들이다. 금수현(金守賢)[1919~1992]은 1940년에 일본의 도쿄 음악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쇼치쿠 가극단에서 근무하였으며, 1942년부터 동래...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광수는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중동 249번지에서 태어났다. 태평양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자 일본은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우리 민족에 대한 탄압과 민족말살 정책을 펼쳤다. 구체적으로 국민총동원체제를 강화하면서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했다. 이러한 때 김광수는 1942년 7월 무렵 당시 창원군 창원면 동정리[현 경상남도 창원...
-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사회 운동가 김귀동(金龜東)[?~?]은 1924년 10월 마산 노동 동우회 집행 위원, 1925년 1월 마산 독서회 창립을 주도하고 간사, 마산 청년회 임시 총회의 간부, 1925년 9월 마산 청년 연합회 창립 총회 집행위원, 1925년 11월 경남 청년 연맹 집행 위원, 1927년 1월 마산 사회 단체 연합 간담회에서 「정우회 선언」의 운동 방...
-
경상남도 창원시 가덕도[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가동]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 김근도(金根道)[1900~1983]는 1918년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가 법랑직공 노동자로 일하면서 일제의 한국 통치와 재일 조선인에 대한 민족 차별 정책에 강한 불만을 가졌다. 김근도는 민족의 해방만이 조국이 번영할 길임을 자각하고 독립 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1936년...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사회운동가 아버지는 웅천군의 마지막 군수였던 김재형[1864~1948]이었으며, 남편은 웅동면에 살았던 배익우이다. 조봉암의 부인이었던 김조이는 김남이의 조카이다. 일본에 유학하고 와서 1928년 ‘웅천 여자 청년회’를 창립하여 대표자로 활동했다. 1930년 혼인하면서 사회활동을 중단하였다....
-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이자 한학자. 김달진은 1907년 2월 4일 경상남도 진해시 소사동에서 태어났다. 진해시 소사동은 당시 창원군에 속한 지역이었다. 김달진은 젊은 시절 불교의 세계를 접하고 수도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불교에 대한 김달진의 열정은 작고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김달진은 1989년 6월 7일 오전 11시 10분 82세의 나이로 서울특...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두석(金斗石)[1915~2004]은 1939년 7월 20일 마산(馬山) 의신 여학교(義信女學校) 교사로 재직하던 중 일제의 신사 참배(神社參拜) 강요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교사직에서 해임 당하였다. 1940년 5월 17일부터 1941년 7월 30일까지 일제의 신사 참배 요구에 대한 거부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다가 5회에 걸쳐...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출신의 사회운동가.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마산에서 사회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8·15 해방 이후에는 마산시 인민 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김명규(金明奎)[1892~?]는 보통학교 졸업 후 보통 문관(普通文官) 시험에 합격하여 군속(軍屬)으로 재직하다가 3·1운동 직후 그만두었다. 이후 마산 구락부 부원이 되...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명수는 1942년 7월경 창원군 창원면 동정리 소재의 창원보통학교 출신 박상규·박대근 등과 함께 청년독립회를 조직하여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4월에는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벽보를 창원역과 창원의 주요 관문에 붙이는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이 사건은 ‘창원 만세사건’이라 불렸다. 이 후 이들의 활동은 1944년 12...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 김병길(金秉吉)[1924~2019]은 1943년 경남 진해의 일본 해군 제51 항공창(海軍第51航空廠)에서 군속(軍屬)으로 근무하면서 김차형(金此炯), 최연종(崔演鍾), 박준기(朴準基) 등과 함께 독립 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심하고 비밀 결사 ‘일심회(一心會)’를 조직하였다. 일심회는 한국인 노동자와 기술자의 처우...
-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유생. 본관은 김해(金海). 초명은 김병린(金柄麟), 자는 겸응(謙膺), 호는 눌재(訥齋)·용계병수(龍溪病叟). 금산(琴山) 김귀(金龜)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염산(廉山) 김찬원(金璨元), 어머니는 이귀준(李龜峻)의 딸로서 벽진이씨(碧珍李氏)이다. 김종하(金宗河)가 아들이다. 김병린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화양리 화목마을에 살았...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병화(金炳和)[1900~1946]는 창원군 웅동면(熊東面) 계광학교(啓光學校) 교사 주기용(朱基溶)의 제의로 인근 웅천면(熊川面)의 문석주(文碩柱), 정운조(鄭雲祚)와 함께 1919년 4월 3일의 ‘웅동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김병화는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 2천여 장을 등사하고 태극기 600여장을 비밀...
-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기업가이자 정치인. 김봉재(金奉才)[1910~1990]의 호는 해암(海菴)으로, 해동학원 이사장을 역임한 뒤 마산 해산 주식회사 회장, 해남 소자 공업 주식회사 사장을 지내고 창원 금융 조합장, 대한 주정 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자유당 중앙 정책위원을 지낸 뒤 제 2대, 제 5대 국회위원이 되었다....
-
일제 강점기 마산에서 활동한 시인. 호는 초정(草汀·艸汀·草丁)이다. 시인 김상화가 형이다. 김상옥(金相沃)[1920~2004]은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하여, 1939년 김용호, 함윤수 등과 함께 「맥」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시조 「봉선화」를 『문장』에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하였다. 1941년에 『동아 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으로 등단하여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하였다....
-
조선 말기 창원 출신의 학자. 김상욱의 자(字)는 인숙(仁叔), 호는 물와(勿窩)이다. 1857년(철종 8) 11월 24일 사시(巳時)에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석산리에서 출생하였다. 김상욱의 김씨계는 신라에서 출자하였으며, 고려시대 휘(諱)가 수(需)인 선조가 상산(商山)과 인연을 맺으면서 자손들이 세전해 오게 되었다. 여러 대를 지나 휘가 김후려(金後麗)인 선조...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상익은 1919년 3월 23일 창원읍내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는데, 창원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중순부터 애국인사들에 의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3월 23일 창원군 창원읍 장날 오후 2시 30분경 주도자들은 창원보통학교에 있는 대수정(大樹亭) 앞에서 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7,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장터를...
-
일제 강점기 마산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운동가. 김상주(金尙珠)[1902~?]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교육을 받고 10대 중반부터 마산의 원동 상회(元東商會), 원동 물산 무역회사를 다녔다. 1920년대에는 노동 운동과 공산 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1924년 7월에는 마산 노농 동우회 교무부에 위원이 되었고 그해에 비밀단체 사각 동맹(四角同盟)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4...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출신의 체육인[씨름]. 김성률(金成律)[1948~2004]은 경남 마산 성호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유도와 씨름, 레슬링 등에서 전국 대회를 석권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마산 중학교 재학 때는 축구를 하였으나 마산 상업 고등학교[지금의 용마 고등학교] 때 다시 씨름부에 들어가 전국 체육 대회 씨름 부문에서 2연패를 이루는데 기여하였다....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시인. 호는 현촌이다. 김세익(金世翊)[1924~1995]은 1943년에 함남 중학교를 졸업하였고, 1946년에는 서울 대학교 치의학과를 수학하였으며 1948년에 연세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49년 마산 여자 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마산과 인연을 맺었다. 1951년에 시집 『석류』를 발간하고 1953년 『문예』를 통해 추천 완...
-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화인(花人). 아버지 김종두(金宗斗)와 어머니 황예분(黃禮分)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수돈(金洙敦)[1917~1966]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신이다. 15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1936년에 나고야[名古屋] 중학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마산 창신 학교(馬山昌信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9년에 사임하였...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삼진(三鎭) 의거에 참여했다 순국한 독립운동가. 김수동(金守東)[1877~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三鎭)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 냇가의 둑에 세워진 태극기 아래에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변상태가 대한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하...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순(金純)[1900~?]은 1919년 3·1 운동 당시 창신 중학교 학생이었다. 이때 사촌 매형인 배동석(裵東奭)이 서울 만세 의거에 참가 한 후 마산으로 내려와 창신 학교 교사 임학찬에게 서울에서 가져 온 『독립신문』을 전하였다. 『독립신문』을 읽은 후 학우들과 밤을 세워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등사하였다. 이들은...
-
일제 감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시주(金時州)[1921~1968]는 동삼성(東三省) 하얼빈[哈爾濱]과 심양(瀋陽)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1940년 12월에 귀국하여 경남 마산(馬山)에서 독립 운동을 하였다. 김시주는 마산의 청년들에게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역설하면서 항일 선전물을 제작하여 배포하는 등 민족의식과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1942년 8월...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영곤은 현 경상남도 창원시 서상동 출신으로 7세부터 17세까지 창원읍 북동 사숙(私熟)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8세부터 22세까지는 창원부 창흥사립보통학교에서 보통과 및 측량과를 공부하였다. 이 후 25세부터 26세까지는 창원사설한습회(昌原私設韓習會)를 개최하고 향토 청소년을 지도하였다. 29세 때인 1919년 3·1운동 때에는 창...
-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활동한 화가. 김영진(金永璡)[1936~1991]은 함양 초등학교를 거쳐 함양 중학교 시절 정문현 선생의 영향을 받았고, 함양 농업 고등학교 시절에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서울 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였다. 졸업 후 그는 1965년 함양 여자 고등학교, 1967년 마산 고등학교, 1969년 사천 중학교, 1970...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영환(金永煥)[1896~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三鎭)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 냇가의 둑에 세워진 태극기 아래에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변상태가 대한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이어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
마산 출신의 시인. 본관은 김해. 호는 학산(鶴山)·야돈(野豚)·추강(秋江), 아명은 만석(萬石). 아버지 김치완(金致琓)이고 어머니는 박경포(朴敬布)이다. 김용호(金容浩)[1912~1973]는 1928년에 마산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금성 철공소, 원동 상회 등에서 일하다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1938년부터 ‘맥’ 동인으로 활동하였...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 독립운동가. 김용환(金容煥)[1884~1933]은 1919년 3월 2일에 이갑성, 임학찬, 이형재(李瀅宰) 등으로부터 3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받아들고 3월 3일 만세 운동이 있던 날 무학산으로 올라가서 군중들에게 배포하였다. 곧 바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원으로부터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대...
-
마산 출신의 아동 문학가. 김원룡(金元龍)[1911~1982]은 1929년에 마산 공립 보통학교[현 마산 성호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경남 도련 집행 위원의 서기를 지냈다. 1946년 2월에는 아동 잡지 『새동무』를 창간하였고, 1947년 9월 동요 동시집 『내 고향』을 발간하였다. 1947년 조선 식산 은행에 근무하면서 1948년 조선 식산 은행의...
-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기자. 김일규(金一奎)[1922~1981]는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나 1948년 『자유 민보』 기자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경남 신문의 경남 매일의 보도 기록 사진작가를 지냈다. 특히 3·15 의거 당시의 생생한 현장을 사진에 담아 만천하에 알렸다. 그 밖에 근현대 마산의 정치, 경제·사회,...
-
경상남도 창원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일성(金逸成)[1901~1952]은 1919년 웅동면 마천리(馬川里)의 주기용(朱基溶), 배종인(裵鍾仁), 배건수(裵建守) 등과 주도하여 4월 3일의 ‘웅동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김일성은 마천리(馬川里)의 문석주(文碩柱), 정운조(鄭雲祚), 김병화(金炳和)에게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여 군중을 동원하고 태극기를 준비...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 출신의 독립 운동가. 김잠진(金蠶鎭)[1915~1955]은 창원군 웅동면(熊東面)에서 조맹규(曺孟奎), 조원갑(曺元甲), 이승종(李承鍾), 박남성(朴南誠), 백태식(白泰植)과 함께 ‘웅동 적색 농민 조합(熊東赤色農民組合)’을 조직하고 농민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31년 12월부터 1932년 3월까지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사상 강좌를...
-
일제 강점기와 8·15 해방 이후 창원 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 김조이(金祚伊)[1904~?]는 조봉암(曺奉岩)의 부인으로 1922년 서울에서 여자 고학생 상조회의 조직을 시작으로 1925년부터 사회주의 운동과 여성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25년 1월 경성 여자 청년동맹 창립 대회에서 전형 위원 및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2월에는 전조선 민...
-
창원시 마산 출신의 기업가. 일제 강점기 젊은 시절 진보적 민족주의자로서 활동하였으나, 해방 이후 좌우합작 활동을 하다 미군정에 의해 발탁된 이후 보수 정치가, 언론인, 기업인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각 방면의 다양한 활동은 8·15 해방 이후 마산을 대표하는 지역의 유지의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 김종신(金鍾信)[1904~1978]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면서...
-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조각가. 김종영은 1915년 6월 25일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소답동 131-14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김기호와 어머니 이정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종영은 어려서 선친 밑에서 한학과 서도를 익혔다. 1982년 68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교육자·조각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한 김종영은 20세기 한국 미술사에서 현대적이고 수준 높은 조...
-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전개된 1960년 3·15 의거 과정에서 희생된 민주열사 이승만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일어났던 1960년 3·15의거 과정에서 경찰이 쏜 최류탄에 의해 희생되었다. 시체가 4월 11일 마산만 중앙 부두에서 떠오르자 제2차 의거가 일어났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김태종(金泰鐘)이며, 아버지 김재계(金...
-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기업인·경제인. 김해 김씨로 김두영, 김한영, 김기영, 김준영 네 형제 중 막내이다. 첫째 김두영은 한국 무용계의 원로인 김해랑의 아버지이며, 둘째 김한영은 1940년 해산물 도매업자들과 합동으로 설립한 마산 해산 주식회사의 사장이다. 김준영(金駿榮)[1897~?]은 마산 어시장 객주로 일제 때 수산물 유통 사업으로 거부...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진훈의 본관은 김녕(金寧), 김인규(金璘圭)의 차남으로 창원 북면 하천리에서 태어났다. 김진훈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후 창원시 북면 하천리 331번지 중촌마을 뒷산 끝자락에 묻혔다. 김진훈은 창원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동래중학교 재학 중 1940년에 양중모(梁仲模)·남기명(南基明)·김일규(金一圭) 등과 함께 은...
-
일제 강점기 창원시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 김차형(金此炯)[1924~?]은 1943년 경상남도 진해의 일본군 제51 해군 항공창(第51海軍航空廠)에서 군속(軍屬)으로 근무하던 중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에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민족차별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던 김차형은 김병길(金秉吉), 최연종(崔演鍾) 등 11명과 함께 항일결사 ‘일심회(一心會)’를 조직하였다. 일심회...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했던 시인. 김춘수(金春洙)[1922~2004]는 1935년 통영 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42년 일본 대학 예술 학원 창작과 재학 중 사상이 불온하다 하여 퇴학당하였다. 이후 경찰서에 6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서울로 송치되기도 하였다. 1945년 통영에서 유치환·윤이상·김상옥 등과 ‘통영 문화 협회’를 만들고, 노동자를 위한 야간 중학과...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쾌봉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무동리에서 태어났다. 일본군에 징병되어 중국에 배속되었으나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가기 위해 탈출을 감행하여 성공했다. 이 후 중국 호남성(湖南省) 계동(桂東)에서 동포를 만나 3개월을 기간으로 하여 정규 교육 훈련을 받다가 강서성(江西省) 의춘(宜春)에서 광복군 제1지대 제3분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출신의 언론인. 김태룡(金泰龍)[1932~1993]은 고려 대학교 경제과를 수료하고 1960년부터 마산 일보 논설 위원을 역임하였다. 1967년에는 대구 매일 신문 편집 국장을 역임하였고 1972년에는 부산 일보 편집국장 서리를 역임하였다. 1980년에는 부산 일보 이사 겸 논설 주간을 역임하였고 1982년에는 부산 일보 전무 이사를 역임...
-
창원 출신의 시인. 김태홍(金泰洪)[1925~1985]은 1945년 해인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1946년 마산 여자 고등학교, 마산 상업 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후에는 부산으로 옮겨갔다. 동인활동도 활발히 하였는데 1950년대 초반에는 손동인(孫東仁), 안장현(安章鉉)과 함께 동인회 ‘시문(詩門)’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60년 4·19 혁명의 7일...
-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기업인·경제인·육영사업가. 1964년 한일 합성 섬유 주식회사(韓一合成纖維株式會社)를 설립, 국내 최대의 섬유 회사로 키워 1960~1970년대 경공업 중심 수출 정책을 선도하였고, 1973년 국내 업계 최초로 ‘1억불 수출의 탑’을 받았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수당(壽堂). 경상남도 김해에서 중농인 김창준(金昌準)의 2남 2녀 중 맏아들로...
-
창원시 마산 출신의 기업인. 김두영, 김한영[마산 해산(주) 사장], 김기영, 김준영[마산 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은 형제이다. 김한영(金漢榮)[?~?]은 일제 강점기에 구 마산 원정에서 김한영 상점을 운영하였다. 1934년 10월 20일 마산 황물(荒物) 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40년 17명의 마산 해산물 도매업자들이 자본금 13만 엔을 투자하여...
-
일제 강점기 마산에서 활동한 무용가. 김해랑(金海郞)[1915~1969]의 본명은 김재우(金在宇)이다. 6·25 전쟁 직후에 한국무용 예술인 협회[현 한국 무용 협회 전신]를 창설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마산에 무용소를 개설하여 한국 무용계의 대들보 노릇을 하며 평생을 후진 양성에 이바지 했다. 어릴 때부터 춤추기를 좋아하여 부산 동래 고보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서 야마...
-
창원시 마산 출신의 공산주의 운동가. 김형두(金炯斗)[1892~?]는 경상남도 마산부 만정(萬頂)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귀국할 때는 마산구락부가 주최하는 환영회에 참석하였다. 1923년 7월 마산 무산 청소년단 고문이 되고, 8월 마산 노농 동우회의 집행 위원으로서 북성회(北星會) 순회 강연단의 활...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마산 출신의 사회 운동가. 김형선(金炯善)[1904~1950]은 1917년 마산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공립 간이 농업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 때문에 퇴학했다. 상점원 및 부두 노동자로 일하다가 마산 창고 회사 사무원으로 5년간 근무했다. 1924년 8월 마산 공산당 결성에 참여했고, 1925년 4월 경남 사상 단체 동인회(同人會)에 발기인으로...
-
일제 강점기와 8·15 해방 이후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신 언론인. 본관은 김해, 별호는 목발(目拔)이다. 김형윤(金亨潤)[1903~1973]은 1915년 마산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21년 귀국하여 창원 산업 조합에서 근무했다. 1923년 조선일보 마산 지국 기자 생활을 시작으로 『남선 신문』, 『동아 일보』에서도 활동했다. 1930년대와 194...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호원은 1919년 3월 23일 창원읍 장터에서 설관수(薛灌洙)·공도수(孔道守)·구재균(具在均)·조윤호(曺潤鎬)·신갑생(申甲生)·조희순(曺喜舜) 등과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4월 2일 수백 명의 군중들과 제2차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5월 19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6개월간 수감...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삼진 의거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김호현(金浩鉉)[1893~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이 연합한 삼진(三鎭) 의거에 참여하였다. 거사 당일 진전면 양촌리 냇가의 둑에 세워진 태극기 아래에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대동 청년단’의 변상태가 대한 독립 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이어 변...
-
창원시 마산 지역 출신의 기업인. 우리나라 간장업계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몽고 간장 브랜드는 1281년(고려 충렬왕 1) 몽고군이 일본 정벌을 위한 여몽 연합군을 편성해 마산에 주둔하면서, 병사들의 식수 조달을 위해 판 우물인 몽고정의 물로 간장을 담근 데서 유래하였다. 김홍구(金洪球)[1914~1971]는 진동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마산으로 이주 한...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출신의 법조인이자 정치인. 나길조(羅吉祖)[1923~2008]는 일본 메이지[明治]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47년 제 1회 조선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다. 부산·전주·서울·대구 등의 지방검찰청에서 검사를 역임하고 청주·전주·부산의 지방검찰청 지방검사장을 역임하였다.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대검 검사, 1973~1975년 광주고검장...
-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공산주의 운동가. 나영철(羅英哲)[1912~?]은 1928년 조선 박람회를 이용해 러시아로부터 비밀리에 들어온 이종림(李宗林)을 중심으로 고학당 학생과 화신 상회 점원 등에게 연락하여 주의 선전과 기관 조직 활동을 하였다. 1930년 4월 서울에서 이종림의 지도 아래 조선 공산당 재건을 위한 야체이까를 조직하였다. 1930년 7월에 마산으로 귀향...
-
마산 출신의 사진 예술가. 남기섭(南基燮)[1922~2007]은 10살이 되던 때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 오사카 음악 학교에서 3년 정도 공부하였고 틈틈이 이웃 사진관 주인인 ‘나카후지’의 조수 겸 제자가 되어 어깨너머로 사진 관련 기술을 익혔다. 해방 직후 한국으로 들어와 마산 오동동에 ‘사진 문화사’를 열었다. 남기섭은 이를 계기로 1948년 부산 일보 사...
-
일제강점기 창원 지역에 결성되었던 청년운동 단체. 남면청년동맹은 창원군 남면 지역에서 활동하던 남면청년회와 신흥청년회 두 청년단체의 동맹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9년 12월 5일 창원 지역에서 제일 먼저 결성되었던 남면청년회는 1925년 1월 신흥청년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몇몇 회원들은 계속 남면청년회라는 명칭으로 활동함에 따라 신흥청년회와 남면청년회의 2개...
-
일제강점기 창원 지역에서 최초로 결성된 청년운동 단체. 남면청년회는 지역의 교육, 문화, 산업, 농촌 생활 개선, 체육 장려 등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19년 12월 5일 안준(安浚)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1921년 조선청년회연합회에도 속해 있었다. 1925년 1월 남면청년회는 신흥청년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이후에도 남면청년회라는 명칭...
-
창원시 마산 출신의 사회 운동가·노동 운동가. 노현섭(盧玄燮)[1920~1991]은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하였다. 8·15 해방 직후 마산 보통 상업 학교[현 용마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6·25 전쟁 이후 3개 부두 노조를 통합한 단일 지역 노조인 대한 노총 자유 연맹 마산 부두 노조를 결성,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다. 1954년 마산 자...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농민 운동 단체. 1920년대 중반 이후 농민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전국 각지에는 수많은 농민 운동 단체들이 생겨났다. 특히 1930년대 초반에는 농민 운동 단체가 급격히 증가했다.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개량적 농민 단체에서부터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된 혁명적 농민 조합에 이르기까지 그 성격은 다양했다. 농민 운동의 내용에서도 생존권 확보 투쟁에서...
-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단계리에 있는 일제강점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옹기 가마 터. 단계리 옹기요지는 단계리 국방과학연구소 정문에서 우곡사(牛谷寺)로 이어지는 도로 입구부에 위치한다. 2005년 창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문화유적분포지도』 제작을 위한 지표 조사에서 단계리 옹기요지가 조사되었다. 마을 주민 양종무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유적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
-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덕산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건물 터. 덕산리 건물지는 덕산마을 배후의 도둑골에 위치한 건물 터이다. 덕산리 주민들에 의하면 조선시대 말에서 일제강점기에 목장과 민가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덕산마을과 사림동을 연결해 주는 등산로 옆에 있는데, 사림동에서 소목고개 마루를 지나 덕산리 방향으로 100여m...
-
데라우치 문고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에 있는 경남 대학교가 개교 60주년을 맞이하여 1996년 1월에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山口縣立大學]으로부터 기증 받은 조선 관계유물로, 모두 98종 135책 1축[개별 점수로는 편지와 시, 글씨, 그림 등 총 1,959점]에 이른다. 이들 유물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된 것들 중 일부이다. 유물은 일괄적으로 경...
-
우익 계열의 범 정당 정치 단체인 독립 촉성 국민회의 마산 지부. 이승만 계열인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와 김구 계열의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중앙 위원회가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통합 결성하였다. 건국 준비 위원회 마산 지부가 인민 위원회로 개편되기 이전 급속히 좌경화되었는데 건국 준비 위원회에 초기에 참여했던 우익계 민족주의 인...
-
일제 강점기 창원 지역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개되었던 항일 운동. 1910년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인의 저항을 막고 영구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무단 통치를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전역은 수탈과 착취 아래 놓였고 조선의 백성들은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항쟁하였다. 창원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청년 운동·문화 운동·3·1 만세 운동·농민·노동 운동...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한 항일 운동가. 마산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 해방 운동 비밀 결사 조직인 조선 국권 회복단 마산 지부에서 안확·이형재·김기성·배중세(裵重世) 등이 활동하였다. 1. 창원 읍내 3월 중순 들어 경상남도 각지에서 독립 만세 시위가 전개되자 창원 읍내에서도 애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 만세 운동이 비밀리에 계획되었다. 이...
-
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에서 일어난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의 노동자 쟁의. 일제는 약탈 정책에 따라 양잠을 장려하고 누에 실을 뽑는 제사 공장 설립을 추진하였다. 1930년에 준공된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은 그 중 하나로 한국인 공원들이 많았는데 노동 환경과 처우가 매우 열악했다. 이에 저항하여 남녀 공원들이 노동 쟁의를 일으켰다. 진해 공장 설립이 동양 주식회사 진해...
-
근대 개항기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전국적인 농민운동 중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전개된 운동.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고종 31)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으로 갑오농민운동 또는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당시 조선은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주도해왔던 청(淸)나라의 몰락과 함...
-
러일 전쟁이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 지역에 미친 영향. 러시아와 일본은 19세기 말에 서구 열강의 압력을 받으며 제국주의 국가로 변하고 있었다. 일본은 1894년에서 1895년에 걸친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국과 만주 지역에 대해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지만 곧 러시아의 견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에게 할양된 랴오뚱[遼...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출신의 의료인. 류광현(柳光鉉)[1919~1999]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갖은 고생 끝에 세브란스 의전[연세대 의학과]에 입학, 당시 스승이었던 김명선 박사를 아버지처럼 모시며 의사 교육을 받았다. 1941년 졸업한 뒤 경상남도 마산에서 유광현내과 원장, 가족 계획 협회 경남 지부장, 연세대 외래교수를 역임하였다. 류광현은 자신의 스승...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에서 권투 선수들을 양성한 체육인. 류명국(柳明局)[1918~1967]의 본명은 류무영(柳茂永)이며 함안 군북 소학교를 졸업한 뒤 1931년 일본 오사카 공립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민족 차별 구타 사건으로 퇴학을 당한 뒤 권투에 입문하였다. 1934년 야나기 시로[柳四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처음 프로 권투 선수로 데뷔하였다. 194...
-
창원시에서 활동한 화가. 할아버지는 을미의병 때 항일 투쟁한 류봉영이고 아버지 류소우 일제 강점기 때 항일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류시원(柳時原)[1928~2010]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1941년 안동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다이새이 중학교 4학년 재학 중 해방을 맞아 귀국하여 안동 농림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6·25 전쟁 이...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감천리에 있는 비석. 감천리(甘泉里)의 창선기적비(彰善紀績碑)는 이 마을에서 살다 죽은 수원 백씨(水原白氏) 백낙붕(白樂朋)의 선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비문에는 병오(丙午) 8월에 찬하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전안리 효행비’와 함께 1906년에 비석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감천리에서 일생을 보낸 백낙붕의...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에 있는 결핵 전문 의료 기관으로 많은 유명 인사들이 치료를 위해 머물렀던 곳. 마산 결핵 요양소의 주요 기능은 결핵 환자의 진료와 임상 연구, 그리고 기타 국가 결핵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요양소는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결핵 퇴치의 요람이었으며, 이곳에 머물렀던 많은 사람들의 애환을 담고 있다. 특히...
-
1924년 8월 17일 마산 지역에서 김명규, 김형선, 김상주, 김직성, 김기호, 황기룡이 모여 조직한 공산당 조직. 1924년 8월 17일 마산 지역에서 마산 공산당이 창립되었다. 당원이었던 김상주는 적기(赤旗)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1925년 7월과 8월 사이에 마산 공산당과 마산 공청을 조선 공산당 마산 야체이카, 고려 공청 마산 제1, 제2 야체이카로 개편하였다. 이때...
-
경상남도 마산에서 조선인 자본가들이 설립한 친일 단체. 1911년에 마산 경찰서장의 발기로 교풍회(矯風會)가 조직되었다. 이것이 전국 최초의 교풍회였다. 이 조직은 이후 경남 교풍회로 발전하고, 마산에는 1914년에 그 지부가 설립되었다. 한말 이후 교육과 계몽을 통해 마산의 근대화에 앞장서기도 하였지만 교풍회는 일제의 폭압이 드세었던 1910년대와 1930년대의 대표적...
-
마산 지역에서 ‘문화 운동’의 구심적인 역할을 한 청년과 노·장년층, 민족주의자와 친일적인 인물이 섞여 다양한 성격을 가진 단체. 1920년 6월에 마산 지역 문화 운동의 구심으로서 마산 구락부가 창립되었다. 마산 구락부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이었던 민의소(民議所) 건물을 회관으로 사용하고 민의소 대표였던 손덕우가 초대 회장이었다. 마산 구락부는 교육...
-
1945년 남한에 주둔한 미군에 의해 경상남도 마산에 설치되었던 행정 기관. 마산 군정청은 마산부, 창원군, 진해읍, 통영군, 고성군, 함안군, 창녕군 등 1부 1읍 5개 군을 담당하였다. 마산 군정청의 초대 장관으로 부임한 데일리 소령은 초대 한국인 마산 부윤에 옥기환을 임명하였으며, 옥기환은 1945년 12월 15일부터 1946년 5월 14일까지 6개월간 재임하였다....
-
마산 지역의 기독교 청년 운동 단체. 공려 청년회(共勵靑年會)는 1911년 김윤경, 이순상 등에 의해 창립되었다. 마산 교회의 청년 조직인 공려 청년회(共勵靑年會)는 이윤재 등 교회 청년들에 의해 면려 청년회로 개칭되었다. 마산 구락부와 함께 마산 지역 ‘문화 운동’의 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종교 활동 외에 강연회 토론회를 활발히 개최하여 교육의 보급,...
-
마산 신인회 주도로 1923년 3월 14일 마산 노농 동우회가 창립되어 노동절 행사와 노동 운동 지원 활동, 노동자의 파업과 분규를 중재하는 임무를 수행한 단체. 1923년 5월 1일 제37회 노동절을 맞아 마산에서도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이 행사에 오학선, 강덕보 등의 마산 노농 동우회 관계자와 이정찬, 김기호, 손문기 등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시가행진하였다. 여기에서 이...
-
개항기 경상남도 마산 지역에 국내 최초로 설립되었던 비정규 교육 기관. 마산 노동 야학은 마산 지역 유지로서 민족 교육에 뜻을 품은 옥기환(玉麒煥)·구성전(具聖傳) 두 사람이 자금을 내고 명도석·김명규·나인환·팽삼진 등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우려하던 청년 지식인들이 교사로 참여하였다. 이후 마산 구락부가 마산 학원을 설립하여 경영을 맡으면서 마산 중앙 야학교로 명칭이 변...
-
일제 강점기 마산 부내에 산재한 노동 단체가 마산 노동회와 마산 인쇄 직공 조합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 1920년대 이후 수많은 노동 조합과 노동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는 이들의 사소한 경제 투쟁마저 탄압하였기 때문에 개별 노동조합의 분산적인 투쟁은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지역을 포괄하는 지역 연맹 조직을 건설하게 되었는...
-
1908년 경상남도 마산 주민들이 자생적으로 조직한 사회 단체. 1899년 마산포 개항 이후 일본의 침탈에 맞서 상권 수호와 해안 매축권 확보 투쟁에 나섰던 마산[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 주민들의 저항 의식은 1908년 마산 민의소 설립으로 나타났다. 순수하게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권 옹호 자치 기구였던 마산 민의소는 마산 유일의 공회당 건물을 소유한 마산 주민들...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 봉암 나루터에 건립된 불망비 등 4기의 비석. ‘전주사 윤군옥 보시 불망비(前主事尹君玉普施不忘碑)’는 윤군옥(尹君玉)이 자신의 재산으로 1900년에 배 2척을 구입하여 도선장인 봉암 나루터에서 웅남(熊南)·상남(上南) 지역 주민들에게 무료로 배로 태워 건네주는 편의를 제공한데 대하여 그의 공을 기려 1909년 10월에 지역민들이 세운 불...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사동리에 있는 선정비(善政碑) 등 4기의 비석. 현재 남아 있는 4기 중 3기는 선정비로, 순상국(巡相國) 서기순(徐箕淳)과 행현감(行縣監) 조진달(趙鎭達) 그리고 행현감(行縣監) 권석우(權錫祐) 등이 지역 관리로 재임시 지역민에게 선정을 베푼 것을 칭송하기 위하여 돌에 공적을 새겨 건립하였다고 한다. 나머지 1기는 3·1 운동 당시 이...
-
개항기 마산 개항 이후 일본인이 마산에 세운 사립 일어 학교에 대한 마산항민들의 저항 운동. 1899년 마산항이 개항되면서 일본과 러시아는 마산항을 중심으로 토지를 매수하기 시작하였고, 마산포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토지매수 뿐만 아니라 구마산 시장권을 약탈하려고 하였다. 이에 마산항민들은 토지 불매 운동, 상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대일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인이 설립...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에 있는 6·25 전쟁 때 순국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 마산 산호동 충혼탑은 6·25전쟁 때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마산 지역 출신의 호국 영령 1,652명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탑으로 뒤편에는 호국 영령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봉안각이 있다. 마산 산호동 충혼탑은 순국자들의 유족들을 위로하기...
-
1919년 4월 3일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진전면·진북면 3개 지역 주민이 연합하여 봉기한 만세 시위. 1919년 3월 28일에 일어난 진동면 고현 의거를 뒤이은 만세 시위다. 고현 의거에서 검거되지 않은 변상태, 변상헌, 권영대, 권태용 등이 비밀리에 삼진 의거를 도모하였다. 진동면을 비롯한 진전면과 진북면 일대의 지도자들이 대거 가담했다. 거사일을 음력 삼월 삼짇날...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있는, 조선 고종의 죽음을 애도했던 이원순의 정신을 기리고자 세운 대(臺). 상곡 마을에 살았던 이원순이 1918년 고종이 승하하자 고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곡을 하던 곳에 기념하기 위하여 1937년 정월에 기념물을 세웠는데 이것이 서대이다. 이원순은 자가 도여, 호는 소여라고 하며 조선 시대 말 1863년(철종 14) 상곡리에서 태...
-
1900년 5월 마산포의 객주들이 설립한 근대적 상업 단체. 1899년 마산항의 개항 이후 식민 자본으로부터 마산포의 상권을 보호하기 설립하였다. 1900년 5월 이규철(李圭哲)을 비롯한 마산포 시장 객주를 중심으로 마산 상호회를 조직하였다. 1908년 5월 30일 신마산 일본인 조차지에서 일본 상인 30명이 마산 상업 회의소를 설립하였다. 이를 계기로 마산 상호회는 1908년 6...
-
마산항 개항기인 1906년 6월 마산 창포동 3가에 설립된 어류 위탁 판매 회사. 마산항 개항기에 일본인이 자본금 2만 원으로 설립한 근대적 주식회사로 주로 일본인을 상대로 영업하였다. 1년간 양륙(揚陸)고는 35만 6220㎏[94,992관]으로 부내 어업 종사자는 122명이었다. 거래는 어업자 이외 다른 사람이 시장에 반입, 경매로서 인수하였다. 중매인은 일...
-
일제 강점기에 마산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1908년 10월부터 발행한 신문. 1899년 개항 이후 마산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점점 늘어났고 1905년 삼랑진~마산 철도가 개통되면서부터는 급증하여 1906년 9월경에는 마산 일대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2,400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에 자신들과 관련된 소식과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신문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마산 거주 일본...
-
1923년 1월 마산 지역에서 최초로 결성된 사회주의 사상 단체. 마산 지역의 사회 운동·노동 운동의 발전을 위해 결성되었다. 1923년 1월 마산 지역에서 사회주의 사상 단체인 마산 신인회가 만들어졌다. 1922년 11월 마산 지역에서 만들어진 사상 단체이고 신인회 구성원이 중심이 되어 1923년 8월에는 혜성사(彗星社)라는 사상 단체를 새로 조직하였다. 신인회는 19...
-
경상남도 마산 지역에서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무정부주의자. 1925년 김형윤을 중심으로 조한응, 김계홍 등이 조직하였다. 1927년 서울에서 김산이라는 무정부주의자가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외국인 선교사나 일제에서 벗어난 자주적인 독립교회 활동을 전개하면서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 마산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창원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창원 흑우...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에 있는 3·1 운동 때 순국한 애국지사 8명의 묘. 1919년 4월 3일 마산시 진전면·진북면·진동면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삼진 의거가 일어났다. 이날 변상태·권태용·변상헌 등은 시위 군중을 규합해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였고, 규합된 2,000여 명의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진동면으로 시위 행진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마산 4·3 삼...
-
6·25 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들이 집단으로 희생된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일대에 있는 학살지. 마산 여양리 민간인 학살지는 2002년 9월 4일 태풍 ‘루사’로 인해 산태골 숯막에 매장되어 있던 유해 일부가 유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웃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일대에서는 6·25 전쟁 당시 진주 방면에서 끌려온 민간인들이...
-
1927년에 경상남도 마산부 구마산의 운송업 노동자들이 일본인 고용주에게 일으킨 동맹 파업. 1927년 3월 경성 철도국이 하나의 역에 하나의 사업체만 두겠다는 정책[일역 일점 주의(一驛 一店 主義)]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신마산, 구마산, 진영, 삼랑진역 등에서 운수업에 종사하던 한국인 업주[마산 선운 업주 조합]들은 이 정책이 자신들에게 파급될 악영향을 우려하여, 일본인과 한국...
-
1905년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의 외교권을 명박탈한 일본이 통상·외교 관련 업무를 담당하도록 마산 지역에 설치한 관청. 1905년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제국주의 일본은 같은 해 12월 '통감부급이사청관제(統監府及理事廳官制)'를 공포하여 중앙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한편, 각 지역의 일본 영사관은 이사청으로 개편하도록 하였으며, 이듬해 2월 통감부와 이사청을...
-
건국 준비 위원회 마산 지부에서 마산 인민 위원회로 개편된 민간 자치 기구. 1945년 9월 6일 건국 준비 위원회가 조선 인민 공화국으로 개편됨에 따라 1945년 11월까지 각지의 건국 준비 위원회 지방 조직들과 각종의 자생적 조직들이 전환되어 만들어진 전국적 민간 자치 기구로 마산 지역도 건국 준비 위원회 마산 지부에서 1945년 10월 마산 인민 위원회로 개편되었다...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었던 일제 강점기 일본 신사. 일제가 조선을 무력으로 위압한 것이 경찰과 군대였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이 바로 신사(神社)였다. 원래 신사는 일본의 토착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참배하는 곳이었다. 이 토착 신앙을 신토(神道)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의 악령에 대한 두려움과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참배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므로 신토는 뚜렷한 교리도...
-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적인 탄압에 마산의 지식인과 노동자들이 결합하여 혁명적 노동조합을 결성해 노동 운동을 전개하려는 운동.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 제국주의는 대륙 침략 수행을 위해 조선을 병참 기지화하는 과정에서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은 핵심적 억압 대상이었다. 이전까지 합법적 노동운동, 개량적 노동운동도 금지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은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고 점차...
-
1939년에 건립된 일한 와사 전기 주식회사 마산 지점의 직원용 사택. 마산 전등 회사 관사는 일한 와사 전기 주식회사(日韓瓦斯電氣株式會社)의 마산 지점 사택(社宅)으로 지은 근대기 일식(日式) 가옥이다. 이 회사는 1915년 9월 11일에 경성 전기 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 마산 지점으로 개칭되었다. 마산 전등 회사 관사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반월북...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중리에 있는 비각 완천각은 내서면장(內西面長)이었던 최장한(崔將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주민들이 건립한 불망비(不忘碑)가 있는 비각이다. 일제 강점기에 내서면장(內西面長)으로 10년간 활동하면서 지역 농민들을 위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하여 노력한 최장한(崔將翰)의 행적을 칭송하기 위하여 지역 주민들이 뜻을 모아 1913년 10월 20...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지산리에 있는 창의탑.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일제의 폭거에 항거하고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3·1 운동이 전개되었다. 마산 지역에서는 3월 3일 두척산에서 김용환(金容煥) 등이 모여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발기한 이후, 3월에만 여러 차례의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만세 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외곽 지역으로 확산되...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지산리에 있는 전첩비. 1950년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호남 일대와 영남의 동북 지역까지 점령하고, 최후의 거점인 대구와 부산까지 진격해 왔다. 7월 말부터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가 대치하는 이른바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시작되었다. 당시 지금의 창원 지역은 낙동강 전선의 중요 지점으로 8월 초부터...
-
1920년대 마산 지역에서 결성된 직업별 노동 조합. 1925년 5월 마산 인쇄공 조합이 결성되어 같은 해 11월 부산 인쇄 직공 조합의 총파업에 이어 다음 해 3월에 총파업을 벌였다. 인쇄 직공들의 쟁의는 활발하였으며 상호 부조에도 적극적이어서 1926년 3월에는 이 시기 각지에서 전개된 인쇄 직공들의 연속 파업 투쟁을 기반으로 전조선 인쇄 직공 총연맹이 결성되었다. 1925년...
-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기생집 주인의 학대에 저항한 기생들의 동맹 휴업 일제 강점기의 기생은 식민지라는 통치 제도와 근대 자본주의에 노출됨으로서 새로운 환경에 처하게 된다. 조선 시대까지 예악을 담당하고 사대부가의 여흥을 주도하였던 기생은 신분 해체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도 전통 가무악을 전승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식민지 공창 정책의 대상자였던 창기와 비슷하게 통제되었다. 이처럼 일...
-
마산 지역의 분리 되어 있는 여러 청년 단체들이 마산 청년 연합회에서 발전적 해소로 결성된 단체. 조선 청년 운동의 방향 전환기를 맞아 같은 사상과 정신 아래 여러 개의 청년 단체의 분리 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인식하에 마산 청년 동맹이 결성되었다. 마산 청년 연합회는 정우회 선언 이후 민족 운동의 전국적인 방향 전환기를 맞아 1927년 4월[또는...
-
마산 지역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4개 단체가 연합하여 만든 단체. 일제하 사회 운동의 발전에 따른 결과로서 신간회 마산 지회 이외에도 일제의 탄압에 효율적인 대처를 위해 마산 지역 각종 청년 단체들이 연합하여 결성하였다. 1925년 9월 26일 마산 수양 청년회의 발기로 마산 청년회, 어시장 공조 청년회, 형평 청년회의 4개 단체가 연합하여...
-
마산 지역에서 ‘문화 운동’의 구심적인 역할을 한 청년과 노·장년층, 민족주의자와 친일적인 인물이 섞여 다양한 성격을 가진 단체. 마산 청년단에서는 마산 지역에 운동장이 없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해 김지철(金知喆), 이윤재(李允宰), 손문기(孫汶岐), 김인숙(金仁淑), 김재○(金宰○), 박성우(朴成宇) 등이 발기하여 1920년 9월 8일 오후 3시 마산 원(元)...
-
1924년 6월 마산 구락부의 청년부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단체. 마산 청년회는 마산 구락부의 재산을 넘겨받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마산 청년회의 활동은 마산 구락부의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계몽의 내용에 반제·반봉건사상, 특히 사회주의 사상이 많이 포함되었다. 창립 이후 마산 청년회는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으나 조선 공산당 창립 이후 활기를 띠...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평성리 입구 도로변에 있는 4기의 송덕비(頌德碑). 근대 시기에 건립된 4기의 비석이지만 비석의 주인공은 최익백(崔益伯)과 최병화(崔丙化) 2명이다. 최익백(崔益伯)과 관련된 혜휼비(惠恤碑)가 1기이고, 나머지 3기는 모두 최병화(崔丙化)와 관련한 송덕비(頌德碑)와 기혜비(記惠碑) 그리고 자선찬양비(慈善讚揚碑)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에 있는 송덕비(頌德碑). 통정대부 우승지(通政大夫右承旨)를 제수받은 김홍백(金洪栢)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하여 지역 동민들이 건립하였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호계리 70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의 정면에는 ‘통정대부 우승지 김해김공홍백 송덕비(通政大夫右承旨金海金公洪栢頌德碑)’라고 새겨져 있다. 측면에는 1914년 2월에...
-
일제 강점기 마산 호신 학교에서 일어난 항일 학생 운동. 일제는 1905년 3월에 사학 취제법을 공포하여 한국인을 가르치는 모든 사립학교에 이 법을 적용했다. 그 취제 내용은 역사 지리 과목의 폐지, 성경 과목의 폐지, 각급 학교 교원의 국어[일어] 통달, 고등 보통학교 규칙의 준용 등으로 우리나라 사학의 대부분인 종교계 학교를 탄압하고 황국 신민화 교육을 강요했다. 호...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원동에 있는 달성 서씨(達城 徐氏) 부인의 비석. 1908년 서모(徐某)라는 여인이 갑부 최씨(崔氏) 가문에 출가하였는데 갑작스럽게 남편이 죽자 전 유산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희사(喜捨)하였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베푼 달성 서씨 부인의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1916년 4월 동민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
1910년부터 해방 전까지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역. 조선 시대의 마산은 창원부 혹은 창원군에 속한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1760년(영조 36)에 마산포에 조창(漕倉)이 설치되고 세곡(稅穀) 운송에 따른 상품 유통량이 늘어나면서 마산포는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김해의 칠성포(七星浦)와 더불어 경상도의 유력한 포구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함경도...
-
일제 강점기 마산부(馬山府)의 ‘부세(府勢)’에 대한 통계 자료. 『마산부 세 일람』은 일제에 의한 강제 합방 이후 펴낸 마산부에 관한 공식적인 편찬물로, 마산 사회의 거의 모든 방면에 대한 통계를 싣고 있다. 마산부가 이 책을 발행한 것은 당시 천혜의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근대도시로 발전하고 있던 마산부의 미래를 위해 마산의 산업, 교육, 교통, 운수, 기타 현상을 자세...
-
1899년 마산포의 개항에 따라 무역 등에 종사하는 여러 나라 외국인들이 거주·영업할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1876년 일본과 수호조규를 체결하면서 문호를 개방한 한국은 1890년대에 들어와 열강의 세력 균형을 위해 교류를 확대하려는 정부의 정책과 무역 확대에 따른 이익을 노린 외국의 요청이 맞물리면서 개항장·개시장(開市場)을 확대해 나갔다. 1897년에 증남포와 목포를 추가로...
-
1899년 창원의 마산포를 외국인에게 개방하여 거주와 무역 등을 가능하게 한 사건. 1876년 일본과 수호 조규를 체결하고, 1880년대에 들어와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과 잇따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은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호를 열게 된다. 문호의 개방은 1876년 동래의 부산포, 1880년 덕원의 원산포, 1883년 인천의 제물포 등의 개...
-
개항기 마산 지역의 정기 장시인 마산포 구강장을 일본인 거류지로 옮기려는 일본 영사관과 일본 상인들의 시도를 막아내어 한국 상인들의 상권을 지킨 운동. 1899년 마산포 개항 당시 일본 상인들은 몇 사람 되지 않은데다가 자본도 영세하여 대부분 단순 잡화상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산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일본 영사관은 일본 상인들의 상권 확대를 돕기 위해 전통적...
-
일제 강점기 일제가 외교부와 해군성 등의 주도 하에 마산만 지역에 대한 정세를 조사·보고한 극비 문서를 모은 문서철. 1899년 조선은 마산포를 비롯해 세 곳에 개항장을 설치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일본은 러시아와 개항장으로 지정된 마산 일대, 즉 마산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이곳은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일본을 직접 겨냥할 수 있는 천혜의 요항이었던 반면, 일본의 입...
-
개항장인 마산포 부근의 월영리, 자복포 일대에 일본의 단독 조계 설정을 허용하는 조약. 1899년 마산포의 개항을 전후하여 러시아는 남해안의 항구로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마산포에 동양함대를 위한 조차지를 설정하기 위해,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 결과 마산포에는 다른 개항장에 없는 러시아와 일본의 단독 조계지가 설정되기도 했다. 먼저 러시아는 마산포...
-
일제강점기 마산과 창원 지역에 산재해 있는 사회단체 간 연락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 1928년 신년 경상남도 마산과 창원의 각 사회단체 신년 간담회 석상에서 두 지역에 산재해 있는 마창 사회 단체의 연락을 위해 상설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8년 1월 4일 마산에서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다. 1928년 1월 31일 창원읍 청년회관에서 창립대회 및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였다....
-
조선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배병원의 문집. 배병원(裴炳元)[1866~1930]은 자가 윤장(允章)이고, 호는 만산(晩山)이며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아버지는 증중추원의관(贈中樞院議官) 죽초(竹樵) 배치규(裵致奎)이며,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밀양(密陽) 변씨(卞氏)로 변응점(卞應點)의 딸이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
1935년에 간행된 경상남도 창원 출신 학자 김만현의 문집. 『만휴집(晩休集)』은 김만현(金萬鉉)[1820~1902]의 재종손 김병린(金柄璘) 등이 김만현의 시문을 모아 1935년 간행하였다. 총 5권 2책 138면으로, 책의 크기는 가로 19.5㎝, 세로 27.5㎝이다. 전통적 고서의 실묶음을 하였다. 『만휴집』은 권1에 시(詩) 84수, 권2에 서(書) 2...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신의 사업가·민족 운동가. 명도석(明道奭)[1885~1954]은 어시장 객주 출신으로 1907년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후진의 양성을 통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옥기환, 구성전 등과 함께 마산 노동 야학을 운영하여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높이는데 힘썼다. 학교생활을 계기로 김철두·이형재·김용환·김명규·...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동에 있던 목동의 옛 이름. 목리는 창원시 목동의 이전 이름이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으나 창원공단이 조성되면서 마을과 농경지는 공단부지로 변했고, 목동이라는 이름도 1989년까지 유지되다가 그 마저도 사라졌다. 목리의 오래전 이름인 진목리(眞木里)는 『창원도호부권역 지명연구』에 따르면, ‘정남(正南)에 형성된 마을’을 뜻한다...
-
일제 감점기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문맹근(文孟根)[1914~1967]은 경상남도 진해시 이동리(泥洞里) 사립 야학교에서 김상복(金相福), 박영수(朴永守), 박홍목(朴弘穆) 등과 함께 비밀결사 ‘이동 독서회 동맹 구락부(泥洞讀書會同盟俱樂部)’를 조직하여 식민지 지배 체제를 비판하고, 독서회를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등의 항일 운동을 하다가 김상복 등과...
-
창원시 마산 출신의 상공인·문화인. 문삼찬(文三贊)[1914~1978]은 8·15 해방 후 일본인 경영의 양조장을 불하받아 대흥 주조장(大興酒造場)을 경영하였고, 1948년 민족 청년단 경남 지부 마산시 단장을 지냈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 마산 상공 회의소 부회장,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마산 상공 회의소 상임 위원을 역임하였다. 1955년 제...
-
한말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 문석윤(文錫胤)[1879~1913]은 1904년 경상남도 진해 웅천현의 향장(鄕長)이 되었다. 1904년 일제가 가덕도에 육군 포병대를 설치한 것을 보고 반일(反日) 감정을 갖게 되었다. 문석윤은 현대적 교육을 통해 민족적 역량을 높여 일제의 침략을 막고자 다짐하였다. 현대적 지식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마천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문석주(文錫柱)[1899~1934]는 1919년 4월 3일에 경남 창원군 웅천면(熊川面) 마천리(馬川里)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거사를 도모하던 중 일경(日警)에 체포되었다. 웅천의 독립 만세 운동은 계광 학교(啓光學校) 교사 주기용(朱基溶)의 제의하고 문석주, 김병화(金炳和), 정운조(鄭雲祚) 등이 참가 의지를...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예술가. 문신(文信)[1923~1995]은 일본 큐슈 사가현[佐賀縣] 다케오[武雄]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이 남달랐던 문신은 16세 때 일본 유학생이었던 친구 서두환과의 대화 중 일본 행을 결심하고 친구의 주선으로 당시 일본 중학생의 교복을 구해 입고 연락선을 타고 밀항하였다. 그곳에서 동경미술학...
-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법학자. 문홍주(文鴻柱)[1918~2008]의 호는 해암(海巖)으로 1934년 경성 제1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서울 대학교 예과를 졸업한 뒤 1940년 서울 대학교에서 법학 학사를 받았다. 1955년에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헌법학을 수학하고 부산 대학교 법대 조교수가 되었다. 1960년 부산 대학교 총장을 거쳐 법제처 처장,...
-
한국전쟁 개시 이후에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 해방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반도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학살을 자행한 주체는 남한 측의 경우 주로 미군, 국방군, 경찰 등이었으며 북한 측의 경우 인민군, 빨치산, 지방의 좌익세력 등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로는 한국전쟁 초기 남한 측 정부의 방침에 의해 군·경찰이 전국적으...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경상남도 창원·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주화 운동. 민주화 운동이란 3·15 의거, 4·19 혁명, 부마 항쟁, 6·10 항쟁 등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으로 대통령령이 정하는 활동을 말한...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출신의 공무원이자 정치가. 민충식(閔忠植)[1920~1993]은 1944년 도쿄 대학을 중퇴하였다. 해방이 된 뒤 1946년 부산관재처 처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에는 미대사관 공보 원장을 역임하고 1955년 공리 양행 지배인이 되었다. 1962년에 다시 농림부 운영 차관보를 지내고 1963년에 대통령 정무 비서관, 1966년 주일 공사...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남성(朴南誠)[1912~1972]은 1932년 창원시 진해구 웅동면(熊東面)에서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회과학 사상 강좌를 열고 현재의 사회 제도를 개혁해야만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박남성은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1933년 5월 김잠진(金蠶鎭), 백태식(白泰植) 등과 함께 비밀 결사...
-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노일(朴魯一)[1894~1963]은 1919년 3월 19일 경남 함안 장날 대한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함안 장날의 만세 운동은 조한휘, 한종순, 이찬영, 조병흠, 박건영, 강기수, 한관렬 등이 계획하고 대산면(代山面)의 한문 교사인 안지호와 연락하여 3월 19일 함안 장날에 거사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대근은 경상남도 창원시 중동 616번지에서 태어났다. 1931년 만주 침공과 1937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기우는 상황 속에서 일본은 우리 민족의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했다. 이에 박대근은 1942년 7월경 당시 경상남도 창원면 동정리 창원신사(昌原神社) 뒤에 있던 창원보통학교 출신 급우들과 청년독립...
-
일제강점기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상규의 호는 우정(愚庭)으로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났다. 1931년 만주 침공과 1937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기우는 상황 속에서 일본은 우리 민족의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했다. 박상규는 당시 경상남도 창원군 창원면 동정리에 있던 창원보통학교 출신의 급우들과 청년독립회를 조직하여 일제가 강...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지주이자 자선가. 박수석은 창원군 북면에 살았는데, 3대째 내려오는 대지주였다. 가뭄과 홍수 등으로 흉년이 들자 소작료를 감면하는 제도를 정하여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였다. 1938년 12월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무곡리 갈곡고개를 넘어 신촌리로 향하는 지방도 1045호선 변에 소작인들이 마음을 모아 박수석의 덕행을 기리는 사인박수석송덕비(士人朴...
-
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여성 정치가. 박순천(朴順天)[1898~1983]은 부산 동래 여자 고등학교 전신인 부산진 일신 여학교를 졸업하고 마산(馬山) 최초의 여학교인 의신 여학교(義信女學校)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2월 이갑성을 만나 3월에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의 거사가 있을 것임을 전해 듣고 마산의 만세 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하였다. 3...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영수(朴永守)[1914~1950]는 경상남도 진해에서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야학 활동을 주도하였다. 1930년 9월부터 김상복(金相福), 박홍목(朴弘穆) 등과 함께 진해 이동리(泥洞里) 사립 야학교에서 비밀 결사 ‘이동 독서회 동맹 구락부(泥洞讀書會同盟俱樂部)’를 조직하였다. 박영수는 독서회 활동을 통해 식민지 지배 체제를...
-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기업가. 박용포(朴容甫)[1912~2004]는 1931년 진주 농림 고등학교 졸업 후 8·15 해방이 되자 1945년 마산에 와서 마산 금업, 마산 섬유를 설립하였다. 아주 모직 사장[1950~1958], 신창 모직 사장[1959], 유성 모직 사장[1960], 유성 모직(裕城毛織) 회장[1976]을 지냈다. 섬유 산업 경영인으로...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시인. 박재호(朴載護)[1927~1985]는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태어났다. 1945년 경상북도 김천의 김천 중학을 졸업하고 1947년 서울 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중퇴했다. 1955년 『문학예술』지에 「작은 고동」이 조지훈, 이한직, 박남수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그리고 1959년에 『사상계』에 신인으로 작품이 당선되었다. 이때는 주...
-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정치인. 박종규(朴鍾圭)는 건국 대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72년 연세 대학교 행정 대학원을 졸업하고 타이완 문화 대학원 명예 철학 박사를 받았다. 1961년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장 경호 대장으로서 5.16 군사 정변에 깊이 관여하였다. 1964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고 대통령 경호 실장으로 부임한 뒤 박정희 대통령...
-
경상남도 창원시를 중심으로 활동한 노동운동가. 박창수는 1990년 7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에 당선되어 활동하였으며,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동조합회의 의장으로도 활동하였다. 거제의 대우조선 전면 파업(1991년 2월 8일)에 대한 공동 대응을 모색하기 위하여 1991년 2월 9일~1991년 2월 10일에 열린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동조합회의의 간부수련회에 참석한...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출신으로 사회단체 운동가. 박청수(朴淸壽)는 1929년 2월 18일 마산 예수 교당에서 윤열(尹烈)의 사회로 열린 제2회 마산 청년 동맹 임시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9년 9월 16일 오후 8시 동맹 회관에서 제10회 마산 청년 동맹 집행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이 집행 위원회에서 위원장으로 사회를 맡았다. 1930년 3월에는 신간회...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홍목(朴弘穆)[1914~1971]은 1931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이동리(泥洞里) 사립 야학교에서 김상복(金相福), 박영수(朴永守), 문맹근(文孟根)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이동 독서회 동맹 구락부(泥洞讀書會同盟俱樂部)’를 조직하여 식민지 지배 체제를 비판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의 독립 운동을 하였다. 박홍목은...
-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창원 지역의 축구 발전에 기여한 체육인. 박효제(朴孝濟)[1913~1987]는 보성 전문학교[현 고려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연희대[현 연세 대학교]에서 축구선수로 활동하였다. 이후 경성 축구단, 마산 상업 고등학교, 마산 고등학교, 헌병 사령부, 육군 사관학교 등의 축구 감독을 역임하였다. 또한 영남 4도시 축구 대회 마산팀 선수 겸...
-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시인. 방창갑 시인이 태어난 곳은 지금의 창원 귀산동이다. 그러나 아주 어릴 때 진해로 와 평생을 살았으니 진해사람이라 해야 옳다. 진해에서 평생 문학을 하며, 진해 문학의 산 증인으로 활동해왔다. 천성이 착해 악한 말을 못하는 성격으로 부인 박순자와 아들 효준, 딸 혜진, 이진을 두고 50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방창갑(方...
-
일제 강점기 진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상권(裵祥權)[1915~1942]은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神戶]에 정착하였다. 연구소 급사, 백화점 취사부, 우체국 집배원, 세탁소 직원, 신문 배달원 등의 일을 하면서 즙합 상공 실수학교(葺合商工實修學校)에서 공부하다가 사립 학교 북신 상업학교(北神商業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38년 하순 같은 학교에 유학 중이던 최창...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장실은 1942년 경상남도 창원군 창원면 동정리의 신사 뒤에서 창원보통학교 출신인 박상규·박대근·백정기 등과 우리 민족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단체인 청년독립회를 조직하였다. 이때는 중일전쟁이 끝나고 이어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전세가 꺾이고 있는 상황이라 그 어느 때보다 우리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던...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재황(裵齋晃)[1895~1966]은 경상남도 진해의 개통 학교와 계광 학교 고등과를 수료하고 상경하여 경성 청년학교 중학과를 졸업하였다. 주시경(周時經)의 한글학교에서 국어학을 공부하였으며, 19세에 고향으로 내려와 계광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승복(僧服)으로 혹은 노동자 차림으...
-
해방 이후 활동한 창원 출신의 민족운동가. 배정세의 아버지는 배홍기이고, 형은 의열단원이었던 배중세이다. 배정세는 상남면 건국준비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일본 해군경비대 군인들에 의해 바다에 던져져 억울하게 죽었다. 미군 관여 하의 일본 해군군법회의에서 이 사건을 저지른 일본 군인들의 재판이 열렸는데, 10여 명의 일본인들이 죄질에 따라 형이 언도되었다. 10년형을 언도...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두동 출신으로 마을에 헌신한 인물. 배종경(裵鍾景)[1933~1994]의 원래 호적에 등재된 이름은 배종선(裵鍾先)이다. 자신이 살던 마을인 두동에 진입로가 좁고 협소하여 길을 넓히고 포장하여 마을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배종경의 공적을 기리는 송덕 기념비가 1979년에 세워진 것...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배종인(裵鍾仁)[1901~1965]은 1919년 4월 3일 경상남도 창원시 웅동면(熊東面)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계광 학교 교사 주기용(朱基瑢), 동지 정운조(鄭雲祚), 문석주(文錫柱), 김병화(金柄和)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우고 군중 동원에 총력을 다했다. 거사 당일, 이른 아침부터 마천리(馬川里) 면사무소...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중세는 1895년(고종 32) 12월 18일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상남동에서 아버지 배기홍(裵基洪)과 반남박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되던 1910년에 김해김씨 김달근(金達根)의 딸과 결혼했다. 배중세는 1919년 3·1운동 당시인 4월 3일 진전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6·25 전쟁 시기 우리 해군의 유일한 전투함이던 백두산호가 북한 수송선을 상대로 수행한 최초의 해상 전투. 백두산호(白頭山號)[PC-701]는 6·25 전쟁 시기 우리 해군의 유일한 전투함이었다. 이 군함은 국민과 해군 장병들의 성금으로 구입한 것으로 1950년 4월 10일에 진해에 입항한 3″포를 장착한 주력함이었다. 백두산호는 약 2개월 동안...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백승인(白承仁)[1899~1970]은 1919년 3월 28일의 창원 진동면(鎭東面) 고현(古懸) 장날 독립 만세 운동과 4월 3일의 삼진 의거(三鎭義擧)를 주도하였다. 그는 3월 1일 서울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변상태(卞相泰)와 동지 권영조(權寧祚), 권태용(權泰容), 권영대(權寧大), 변상섭(卞相攝), 변상헌(卞相憲)...
-
조선 말기 창원 출신의 기생이자 자선가. 백영월의 양아버지는 하유언이며 양오빠는 하성복이다. 후사가 없어 하씨 집안의 하소두를 양자로 삼아, 현재 하찬석으로 대가 이어지고 있다. 백영월은 3~4세 때 당시의 창원군 북동마을의 유지였던 하유언의 집 대문 앞에 버려졌다. 이에 하유언이 양녀로 받아들이고는 수소문하여 백영월의 본 수원백씨(水原白氏)를 찾아주었다. 1...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백태식(白泰植)[1915~1965]은 1931년 12월 창원군 웅동면(熊東面)에서 항일 동지들과 함께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상을 선전하는 사회 과학 강좌를 열었다. 1933년 5월 독립 운동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동지 조맹규, 조원갑, 박남성, 김잠진 등 54명과 함께 비밀 결사 ‘웅동 적색 농민 조합(熊東赤色農...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삼진 의거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변갑섭(卞甲燮)[1892~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三鎭)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삼진의거는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古懸) 장날 만세 운동 시위 때 잠시 변갑섭, 변상태, 권영대, 권태용 백승인, 황태익 등이 협의하여 진전면 양촌리의 냇...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삼진 의거에 참여하였던 독립운동가. 변상복(卞相福)[1893~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三鎭)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삼진 의거는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古懸) 장날 만세운동 때 일본 경찰을 피해 잠시 은신했던 변상복, 변상태, 권영대, 권태용, 백승인 등이 계획하고 주도하여...
-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활동하였던 화가. ‘수묵의 누드화’하면 변상봉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그는 여성을 모델로 한 누드작품을 구상과 비구상 전 영역에서 선보였다. 그는 1978년부터 경남 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로 근무하면서부터 창원에 정착하여 마산 미술 협회 회장, 경남 선면 예술가 협회 초대 창립 회장, 마산 대동제 공동대회장 등을 맡으며 지역미술의 발전에 힘썼다....
-
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변상섭(卞相攝)[1891~1950]은 1919년 4월 3일의 창원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 의거를 주도하였다.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古懸) 장날 만세 운동 때 일본 경찰을 피해 잠시 은신하였던 변상태, 권영대, 권태용, 백승학 등이 계획하고 도모하였는데, 이들은 지방 유지들과 협의하여...
-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변상태(卞相泰)[1889~1963]는 부산상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최기백, 성학년 등 6명의 동지와 함께 조국 광복을 위해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대붕회(大鵬會)’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시작하였다. 1915년 국내의 독립 세력을 확장하고 해외의 독립 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최후로 독립을...
-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변상헌(卞相憲)[1897~1965]은 1919년 3월 28일 창원 진동면(鎭東面) 고현(古懸) 장날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을 피해 잠시 은신하였다가 4월 3일의 진동면,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의거(三鎭義擧)를 계획하고 도모하였다. 그는 지방 유지들과 협의하여 진전면 양촌리 냇가에서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의하고...
-
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변우범(卞又範)[1898~1974]은 1919년 4월 3일 창원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 의거를 주도하였다. 삼진의 만세 운동은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 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잠시 피신했던 변상태, 권영대 등이 계획하였다. 변우범은 변상태와 황태익의 권유를 받아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변종열(卞鍾悅)[1896~1974]은 1919년 4월 3일 창원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 의거에 참가하였다. 변종열은 ‘대동 청년단’의 변상태와 동지 권영대, 권태용, 백승인, 황태익 등이 계획하고 도모한 삼진 의거에서 군중 동원 연락을 도맡아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저술가이자 독립운동가. 변지섭은 1926년 지금의 마산시 진전면에서 태어나 1999년 6월 17일 타계하였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었던 변상태(卞相泰)이다. 큰형은 변성섭(卞晟燮), 작은 형은 변경섭(卞坰燮)이다. 창원시와 마산시 지역에서 저술과 서예가로 활동하였다. 1985년 진주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변지섭은...
-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본포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옹기 가마 터. 본포리 옹기요지는 높이 100m인 본포마을 뒷산 사면 말단부 과수원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2005년 창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문화유적분포지도』 제작을 위한 지표 조사에서 본포리 옹기요지가 확인되었다. 현재 유적이 위치하는 곳은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가마의 흔적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과수원 일대...
-
1910년 설립된 부산 본감 소속의 마산 분감으로서 현재 창원 교도소의 전신.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시설을 갖춘 최초의 감옥은 1908년에 문을 연 서대문 형무소이다. 일제가 조선의 사법과 감옥에 관한 업무를 행사하게 된 것은 1907년 7월 한일 협약에 따른 것이다. 이완용과 조선 통감이 사법·감옥 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를 조인했고 이에 따라 일제는 1907년 11월 통감부 재판소...
-
1899년 마산포의 개항과 함께 관세의 부과와 징수, 조계지의 토지 경매 등의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개설된 부산 세관의 마산 출장소. 세관[당시 명칭은 해관(海關)]은 조선 말기 개항장(開港場)·개시장(開市場)에서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의 부과 및 징수를 담당하던 부서로서 무역 및 외국인 거류지와 관련된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감리서(監理署)와 함께 개항장·개시장에 필수적인 관청이었...
-
1899년 마산포의 개항과 함께 일시적으로 창원에 설치되었던 일본 영사관의 분관. 영사관(領事館)은 외국에 주재하면서 자국민을 보호·감독하고 통상을 촉진하는 것을 업무로 하는 외교기관이다. 한국이 1876년 한일수호조규를 맺어 문호를 개방하기로 하고 같은 해 동래의 부산포를 제일 먼저 개항함에 따라 콘도 마스키[近藤眞鋤]가 부산관리관(釜山管理官)으로 파견되어 영사업무를 수행하다가...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사치홍은 1919년 3월 중순경 창원읍 중동 청년회관에서 설관수(薛灌洙)·송석민(宋錫敏)·신경환(申璟煥)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여기에서 창원군 동면의 군중 동원 책임을 맡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500여 개를 만들기도 했다. 3월 23일 사치홍은 창원보통학교에 모인 7,000여 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
1911년에 간행된 경상남도 창원 출신 학자 감경인의 문집. 감경인(甘景仁)[1569~1648]의 후손 감재원(甘在元)과 감재규가 흩어져 있던 감경인의 시문을 모아 이종기(李鍾杞)에게 감수와 서문을 부탁하였다. 1911년에 간행되었으나 정확히 감경인의 후손들이 간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총 70장 1책이며 목판본이다. 크기는 가로 20.7㎝, 세로 30.8㎝이며, 전통적...
-
1919년 3·1 운동 때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1. 마산 지역 일제 강점으로 인한 억압과 수탈은 일부 매판자본가·기생지주(寄生地主)들을 제외한 우리의 대다수 민중들을 몰락과 고통으로 몰고 갔다. 마산 지역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는 마산에 1909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마산 출장소를 설치하고, 농민들의 토지 박탈과 고율의 소작료...
-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 용지리에 있었던 미국 공보원 영화과 산하의 영화 제작 부서. 상남 영화 제작소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즉 ‘상남 라보라토리(Laboratory)’ 또는 이를 줄여 ‘상남 라보’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2년 5월 16일부터 이곳에서 『리버티 뉴스』가 제작·상영되기 시작한다. 『리버티 뉴스』가 지닌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많...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에서 전개된 농민조합 건설 운동. 상남면 농민조합건설운동은 일제의 경제적 착취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창원 지역에 지사를 설치함과 더불어 당시 창원면, 상남면, 웅남면 등의 토지 대부분을 약탈하는 등 경제적인 수탈이 심해지자 이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농민조합을 건설하기 위해 1927년에 일어난 운동이다. 창원 지역에 동양...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에서 일어났던 독립 만세 운동. 상남면 항일의거는 1919년의 3·1운동에 호응하여 같은 해 4월 29일 오후 1시 창원군 상남면 마산헌병대 사파정(沙巴丁)분견소로부터 남쪽으로 약 400m쯤 떨어진 진해~창원 간의 대로상에서 학생·청년을 중심으로 하는 50여 명의 군중이 상남면의 장날을 이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벌...
-
1929년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과 웅남면 농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동양척식주식회사 반대투쟁. 상남면민 동양척식회사 반대투쟁은 일제의 경제적 착취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창원에 지사를 설치함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소작인들에 대해 자행해 온 경제적 수탈과, 특히 1929년 가뭄으로 인한 수확량의 급격한 감소를 무시한 이전 그대로의 소작료 강제 징수에 항거하여 일어난 농민운동...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당시 창원면 중동리에 살았던 설관수는 상남면 토월리에 살던 배중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읍내 중동 청년회관에서 여러 사람과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다. 그는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적당히 줄여 공도수(孔道守)에게 맡겨 500여 매를 등사하게 하였다. 이때 송석민과 김호원은 태극기 500여 매를 만들었다. 3월 23일 설관수는 주...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항일운동가. 설철수는 창원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대구사범학교 심상과(尋常科)를 졸업하고, 같은 해 9월 삼동공립보통학교 교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역사 시간을 통해 학생들에게 조국의 역사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무엇보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등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그의 항일적 교육관은 삼동공립보통학교와 그 후 통영제...
-
1915년에 간행된 경상남도 창원 출신 학자 김기호의 문집. 김기호(金琦浩)[1822~1902]는 학문적으로 근기실학(近畿實學)의 학풍을 널리 전파한 성재(性齋) 허전(許傳)[1797~1886]의 문도로 경상우도의 성재학파(性齋學派)를 주도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기호는 40세를 전후하여 창원 지역의 선비들과 요천시사(樂川詩社)를 결성하고 소산재(小山齋...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진동면 출신의 기업인이자 정치가. 손성수(孫成守)[1903~1978]는 진동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청산 학원에 입학한 뒤 중퇴하였다. 1940년에 대동[동양] 제모 회사를 설립하여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1951년 민주 국민당 시당 부위원장을 지낸 뒤 1956년 마산 시장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7년 민주당 위원장을 지내다...
-
해방 이후 창원 지역에서 대한민국 해군 창설을 주도하였던 장군. 아버지는 상해 임시 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정도(正道)이며, 어머니는 박신일(朴信一)이고 부인은 홍은혜이다. 손원일(孫元一)[1909~1980]은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가서 1925년 원광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가서 1927년 중앙 대학교 항해과에 입학했다. 졸업하고 1930년부터 외국상...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창원읍에서는 3월 23일과 4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송석민은 창원 지역의 중요한 3·1운동 가운데 하나인 창원읍 항일의거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송석민은 설관수가 상남면 토월리에 살던 배중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읍내의 중동 청년회관에서 여러 사람과 비밀리에 거사준비를 논의할 때 함께...
-
1911년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감기현이 간행한 시문집. 『수첩시(壽帖詩)』는 회갑연이나 칠순기로회 등에서 만수무강을 비는 수시(壽詩)들을 모은 것이다. 수시는 원래 회갑이나 칠순을 맞이한 사람이 지은 시의 운에 따라 짓는 것이 원칙이다. 감기현(甘麒鉉)[1880~1965]이 1909년(순종 3) 4월 부친 감재원의 회갑연에서 많은 문사들이 주고받은 수시들을...
-
1979년 8월 25일 태풍 쥬디스 상륙 당시 죽은 38명과 수마를 극복한 진해 시민들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 1979년 8월 24일부터 상륙한 태풍 쥬디스로 인해 38명이 죽었고, 13억 원의 재산 손실과 4,000명이 넘는 수재민이 발생했다. 이에 진해[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시민들이 수재 복구에 자원하여 참여했고, 군부대에서도 중장비와 인력을 지원하였으며, 정부...
-
1927년 마산 지역의 항일 민족 운동 연합 전선체. 마산에서는 1927년 7월 20일 신간회 마산 지회가 설립되었다. 1929년 12월 27일 제3회 정기 대회를 개최하려고 했으나 12월 23일 일제 경찰이 금지 명령을 내렸다. 1930년 1월 5일 신간회 마산 지회 집행 위원회를 열려고 마산 경찰서에 집회 계를 제출했으나 일제는 '연말 경계'란 구실로 집행 위원회도...
-
일제강점기 창원 지역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통일전선체로서 결성된 단체. 1926년 11월 15일 정우회선언을 통해 방향전환론이 제기되면서 6·10만세 사건으로 위축된 사회운동은 새로운 활기를 되찾는다. 그 결과 1927년 2월 15일 비타협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통일전선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신간회는 창립 10개월 후인 1927년 12월 전국에 100여 개 지회를...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갑선은 1919년 창원군 창원읍 장터에서 3월 23일과 4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창원읍의 만세운동은 배중세로부터 설관수가 독립선언서를 받아, 읍내의 중동 청년회관에서 신갑선·공도수(孔道守)·구재균(具在均)·김호원(金浩元)·조윤호(曺潤鎬)·조희순(曺喜舜) 등과 비밀리에 논의하여 진행되었...
-
창원시 진해 출신의 문학가·교육자. 신상철(申尙澈)[1936~2010]은 서울 대학교 국어 교육과를 졸업하고 동아 대학교에서 문학 박사를 받았다. 1965년 『경남 신문』에 소설 「어떤 밤길」을 연재하며 등단했다. 이어 수필집 『옛 생각 이제생각』, 『벽을 허물고』, 『삶을 뒤돌아 보며』 등의 수필집을 펴냈다. 이론서로는 『문학 개론』, 『현대시와 님의 연구』...
-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기업가. 신태을(申泰乙)[1915~1995]은 1972년 경남 연탄 주식회사 설립 때 창립 대표이사 및 부회장에 선임되었다가 1974년에 대표이사 겸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69년 한국 연료 공업 협동조합 연합회 고문을 역임하였다. 이후 1976년 마산 상공 회의소 부회장, 1977년 대한 석탄 공사 부회장, 1980년 마을금고...
-
일제강점기 창원 지역 청년들을 계몽하기 위해 설립된 청년단체. 신흥청년회는 계급의식의 촉진, 미혹적 인습의 타파, 조직적 단결 도모를 강령으로 설립하였다. 1925년 1월 26일 남면청년회에서 새롭게 회명을 고치고 새로운 활동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남면청년회의 회원 중 일부는 신흥청년회가 아닌 남면청년회라는 회명을 그대로 사용하며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 지역에 있었던 아시아 국가 연대를 목적으로 한 국제기구. 아시아 민족 반공 연맹은 1954년 공산 침략의 위협을 받는 아시아 민족 상호 간의 반공 유대를 강화하여 자유 아시아의 집단 안전 보장에 공헌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구이다. 한국, 자유중국, 필리핀, 베트남, 태국, 홍콩, 마카오, 류구 8개국이 참여하였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
창원시 마산의 문화 예술 발전에 헌신한 인물. 안윤봉(安允奉)[1926~1983]은 마산 공립 상업학교[현 용마 고등학교]를 거쳐 경성 고등 상업학교를 다녔다. 이후 조선 식산 은행 마산 지점, 동양 주정 공업 주식회사에서 근무하였다. 서울 신문사의 총무국장, 삼창 산업 진흥 주식회사를 거쳐 경남 매일 신문[현(現) 경남 신문]에서 근무하였다. 1950년대 마...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리에서 마을을 위하여 헌신한 인물. 안응규(安應奎)[1899~1938]는 출신과 생장지에 대한 내용은 거의 전무하나 마을에서 10년이라는 비교적 오랜 기간 구장을 하면서 선행을 베푼 것으로 보아 제덕리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일 것이다. 안응규는 40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안응규가 세상을 떠난...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사회주의운동가. 안준은 1919년 12월 5일 남면청년회를 결성하여, 3·1운동과 관련하여 옥고를 치른 설관수·송석민 등이 1920년 6월에 결성한 창원청년단과 함께 초기 창원 지역의 청년운동을 이끌었다. 1920년 12월 1일 조선청년회연합회가 서울에서 출범하자 경상남도 지역 청년단체 30개가 여기 포함되었는데, 안준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또 사...
-
경상남도 진양 출신으로 창원시 마산에서 기업가와 정치인으로 활동한 인물. 안차갑(安次甲)[1907~1997]은 일본 동경에서 공업을 공부하고 해방 후 귀국하였다. 안차갑은 진양 출신으로 일본에서 공부하고 해방 후 귀국하여 1947년 흥안 공업사를 운영하면서 디젤 엔진을 생산하였다. 1956년 제2대 마산 시의회 의원, 1960년 제3대 경상남도 의회 의원 등...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국학자. 본관은 안흥. 호는 자산(自山), 운문생(雲門生)이란 필명과 팔대수(八大搜)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안확(安廓)[1886~1946]은 서울에서 태어나 소학교에서 신학문을 교육받고 독립 운동과 국학 연구에 참여하였다. 마산 창신 학교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일본에 유학하여 정치학을 수학하기도 했다. 독립 운동 단체...
-
조선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해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신태우(申泰佑)[1851~1926]의 문집. 신태우는 자가 경선(敬善)이고, 호는 야은(野隱)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아버지는 신석범(申錫範)이고 어머니는 풍산(豊山) 홍씨(洪氏) 홍희택(洪羲宅)의 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지고 난 뒤 항상 지내던 서실(書室) 근처에 산소를 썼는데, 주변 한 사람이 앉을...
-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일제 강점기 초등 교육 기관 기능을 수행한 비정규 교육 기관. 일제 강점기 야학은 크게 농민 야학·노동 야학·여성 야학으로 나눌 수 있으며,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애국 계몽 운동·실력 양성 운동·자강 운동 등의 일환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었다. 야학은 일제 강점기 거의 전 계층의 지지와 참여가 있었던 대중 운동이었으며 192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빠른...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양명수는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당시 창원군 상남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같은해 6월 마산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선고받고 마산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출소 후 1920년 12월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조선청년회연합회에 남면청년회 부대표로 참가하는 등 활발한 청년운동을 펼쳤으며, 이후에도 청년...
-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에서 웅천면장을 지낸 인물 양제환(梁濟煥)[1878~1945]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 9월 20일에 창원군 웅천면장을 지냈다. 1921년 2월 21일에는 웅천 어업 조합장에 취임하였고, 1926년과 1932년에도 웅천 어업 조합장에 재선임 되었다. 1921년에 양제환의 선정을 기리는 선정비가 건립되었는데, 내용을 보면 진해 웅...
-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사회 운동가. 여해(呂海)는 1923년 3월 마산 노농 동우회 집행 위원장 겸 서무부 주임이 되었으며, 6월 창원에서 구산(龜山) 소작 조합을 창립할 때 ‘소작 조합의 필요와 농촌의 진흥책’이란 강연을 하였다. 1923년 7월 마산 무산 소년단 고문을 맡았고, 사상 단체 혜성사(彗星社) 결성에 참여했다. 1924년 3월 마창(馬昌) 노농 운동자...
-
경상남도 창원시 웅남동에 있던 연덕동의 옛 이름. 연덕리는 창원시 연덕동의 이전 이름이다. 연덕동에는 소코(속구)·상덕·연덕의 3개 자연마을이 있었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으나 창원공단이 조성되면서 마을과 농경지는 공단부지로 변했고, 연덕동이라는 법정동도 도시계획의 정비에 따라 인근 법정동에 분속되었다. 연덕리는 연변리(淵邊里)의 연과 상덕리(上德里...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지역 출신의 사업가. 본관은 의령이다. 아버지는 옥점진(玉点振)이고 어머니는 인동 장씨이다. 옥기환(玉麒煥)[1875~1953]은 4대째 마산에 정착하며 살았던 지주 집안이었으며, 어시장에서 객주(客主)로 활동했다고 전한다. 마산 지역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07년 구성전(具聖傳) 등과 함께 재원을 마련하여 한국 최초의 노동야학인 ‘마산...
-
경상남도 창원시 사화동 운암서원에서 1891년 간행된 박신윤의 문집. 박신윤(朴身潤)[1661~1698]은 뛰어난 효행과 깊은 학문으로 1712년(숙종 38) 호조좌랑에 추증되었으며, 운암서원(雲巖書院)에 배향되었다. 박신윤의 후손 박기환(朴琪煥)이 시문을 모아 1891년 운암서원에서 간행하였다. 현재 초판본은 구하기 어려우며, 1999년 운암서원에...
-
경상남도 진해 웅동면 마천리 청년들을 중심으로 1920년대에 조직된 청년회. 1920년 웅동 청년회가 창립되어 지역 문화 향상에 노력하였으나 면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勢力)계급의 방해를 받아 웅동 청년회의 활동이 부진하던 차에 1925년 8월 1일 유학생 10여 명이 중심이 되어 웅동 면려 청년회에 합류하였다. 웅동 청년회는 조선 일보 진해 지국의 후원으로 경...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해 웅천 지역의 공립 보통학교. 1906년 설립되었던 사립 개통 학교가 경제난과 웅천 지역에 설치된 일제 헌병 파견대에 탄압으로 1915년 폐교되고 난 뒤, 1917년 설립된 공립 보통학교이다. 지금의 웅천 초등학교이다. 1906년 설립되었던 사립 개통 학교가 1915년 폐교되었고 1917년 4월 14일 웅천 공립 보통학교로 개교하였다. 사립 개통 학교가 폐...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에 있는 일제 강점기에 건립된 일본식 건물. 웅천 방앗간은 웅천 읍성 내에 위치한 재래시장 입구에 있는 2층 일본식 건물이다. 상량문을 보면 ‘소화 18년 10월 1일 계미 구월 초 3일 임진 신시 입주 상량(昭和十八年十月一日癸未九月初三日壬辰申時立柱上樑)’이라 묵서되어 있어 1943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웅천 방...
-
경상남도 진해 웅천 지역 소년 소녀들로 구성된 단체. 1920년 8월 1일 웅천 지역 향교에서 웅천 소년단 창립 준비 위원회를 열고 8월 8일 웅천 보통학교[현 웅천 초등학교] 교정에서 웅천 소년단 결성 대회를 열었다. 민족정신 고취와 청소년들의 단합을 위해 체육회와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소년 단가와 소녀 단가를 만들어 청소년들의 기상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1...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해 웅천의 웅천 청년단을 개편해 조직된 청년회. 1924년 3월 27일 조성복, 주국녕, 문석주 등 5명이 중심이 되어 80여 명으로 웅천 청년단에서 웅천 청년회로 개편을 하였다. 당시 웅천 청년단의 주기철이 평양 신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어 청년단에서 청년회로 개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본 제국주의의 청년 운동에 대한 탄압이 날로 심해지...
-
개항기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역. 창원시로 통합되기 전까지의 진해시 지역은 1452년(문종 9)에 웅신현(熊神縣), 완포현(莞浦縣), 천읍부곡(川邑部曲)과 창원 남산 일부를 합하여 웅천현이 된 이래 조선시대에 계속해서 웅천현(熊川縣)으로 존재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실시된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전국 행정 구역이 23부 336군으로...
-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월잠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옹기 가마 터. 동읍의 북쪽에 위치한 다호리에서 주남저수지 방향인 화양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다. 2005년 창원대학교 박물관에서 『문화유적분포지도』 제작을 위한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다. 월잠리 옹기요지가 있던 지역에 최근 준공된 공장 부지 일대에서 옹기편과 소토가 일부 채집되었다. 현재 유적지로 추정되...
-
창원 출신의 음악가. 윤병구[1941~1985]는 마산 중학교, 마산 상업 고등학교[현 용마 고등학교] 거쳐 1962년에 경희 대학교 음악 대학 기악과를 졸업하고 1970년에 마산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창신 중학교 교사를 역임하면서 마산 실내악단 즉 지금의 마산 시립 교향악단을 창단하고 초대 상임 지휘자를 지냈다. 1977년까지 3회에 걸쳐 지휘자를...
-
경남 대학교 총장을 지낸 법조인·행정 관료·교육자. 윤태림(尹泰林)[1908~1991]은 경성 제일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제국대학 철학과 및 법학과에서 수학하였다. 일제 말기 고등 문관 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1943년 8월부터 황해도 금천군수로 부임하여 해방될 때까지 재임했다. 해방 후, 1945년 11월 경성 지방 법원 사법관 시보에 임명되었고,...
-
근대 개항기 개항장인 마산포 부근 율구미 일대 30만 평에 러시아의 단독 조계를 설정하도록 허용하는 계약. 1899년 마산포의 개항을 전후하여 러시아는 남해안의 항구로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마산포에 동양 함대를 위한 조차지를 설정하기 위해,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 결과 마산포에는 다른 개항장에 없는 러시아와 일본의 단독 조계지가 설정되기도 했다....
-
1980년부터 1991년까지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있었던 행정구역. 창원 지역은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 때는 의안군(義安郡)이었다. 1274년(원종 15)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위하여 지금의 마산 지역인 합포(合浦)에 정동행성이라는 관청을 설치했는데, 정동행성의 활동에 기여한 공으로 1282년(충렬왕 8) 의안군은 의창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인 1408년(태종 8)에는 회원...
-
조선 말기 창원 출신의 지주이자 자선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범(成範). 효령대군의 19세손이며, 부인은 함안조씨(咸安趙氏)이다. 현재 증손 이정길(李廷吉)이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상천리에 살고 있다. 이강하는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상천리에서 태어나 경기도 남양주 구리읍 인창리 동구릉에 있던 현종의 정비 효현왕후(孝顯王后) 김씨의 묘를 관리하는 경릉참봉(...
-
조선 후기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 살면서 덕을 베푼 인물. 이경팔(李庚八)은 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서 활동한 인물로 송덕비의 관아 보수와 사당건립 등에 관해 기록된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1800년대 안골포 일대에서 상당한 재력과 지위를 가진 인물로 파악된다. 비석에 “그 출연하신 재물이 50이요, 은혜를 베푼 재산이 삼백석이로다. 관아를 고쳐 수리하고 당집을...
-
창원시 마산 출신의 극작가·연출가. 본명은 흥근(興根). 호는 온재(溫齋)이다. 이광래(李光來)[1908~1968]는 1930년대 극예술 연구회를 시작으로 30여 년 동안 연극계에 몸담았다. 1928년에 배재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도쿄 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 3학년 때 중퇴했다. 귀국 후에는 조선 일보와 중앙 일보 기자...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교재(李敎載)[1887~1933]는 3·1 운동 때는 동지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돌리다가 진주에서 붙잡혀, 2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처음으로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출옥한 뒤 상해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금과 국내 연락책으로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비밀 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통영에서 군자금을...
-
창원시 마산 창신 학교 출신의 학자. 이극로는 어문학자로서 일제 치하에서 민족 어문운동을 주도하여 한글 보급과 민족 정신 고취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이극로(李克魯)[1893~1978]는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출신으로 글을 배울 가정 형편이 못되어 어릴 적에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다가 한말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권 회복과 실력 양성을 위해 신문...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삼진 의거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이기봉(李基鳳)[1883~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三鎭)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삼진의거는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古懸) 장날 만세운동 때 일본 헌병을 피해 잠시 은신하였던 변상태, 권영대, 권태용, 백승인 등이 계획하고 지방 유지인 변갑섭, 변...
-
경상남도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법조인이자 정치인. 이도환(李道煥)[1925~1983]은 마산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고시 사법과에 합격하고 서울고검 검사, 대구·서울 지검 부장검사 등을 지냈다. 이후 대전·부산 지검에서 차장검사를 거쳐 대검찰청 검사, 중정차장보, 고시동지회 회장, 마산 고등학교 총동창회 회장, 민주공화당 경남 제1지구당 위원장 등을 지냈다....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 이동에 있었던 비정규 학교. 정규 교육기관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으로 민족 교육이 어렵게 되자 야학교를 세워 일부 교사들이 비밀리에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교육을 하고 있었다. 정규 학교는 모집 인원의 제한, 수업료의 부담 등 제한이 있어서 다닐 수 없는 어린이가 많이 나타났다. 일찍이 통감 통치가 시작될 무렵부터 구국 운동의 목적으로 독지가들이 지도...
-
경상남도 창원 등지에서 활동한 판소리 명창. 이동백의 본명은 이종기(李鍾琦)이며, 아명은 동백(東白)이다. 1867년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에서 태어났다. 은산별신굿 보유자이었던 이어인련(李於仁連)[1894~1986]과 육촌 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무속과 혈연 관계에 있던 창우(倡優) 집단 출신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동백은 15세 무렵부터 소리 공부...
-
창원시 마산 출신의 서양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정규(正揆). 한의사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림(李林)[1917~1983]은 마산의 호신 농업학교[창신 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에 서울의 조선 미술원에서 서양화가 박광진(朴廣鎭)에게서 유화를 배웠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동경(東京)으로 가서 데이고쿠 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서양화과에 입학하...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명상(李明祥)[1909~1969]은 웅천 공립 보통학교(熊川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였고 1929년 3월에 진주 사범학교(晋州師範學校)를 졸업하였다. 이후, 창원 진동 공립 보통학교(鎭東公立普通學校)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이명상은 1933년 1월 뜻을 같이 하는 동료 교원들과 비밀 결사를 조직할 것을 논의하여 그들의 찬동을 얻어서 교...
-
창원시 마산 경남 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한 교직자이자 소설가. 이병주(李炳注)[1921~1992]는 진주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1941년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문예과를 졸업하고, 이어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불문과에 진학하였으나 학병으로 동원되어 중퇴하고 중국 소주(蘇州)에서 잠깐 동안 생활하였다.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1948년...
-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기업인. 이병진(李炳珍)[?~?]은 1945년 마산 중앙동에서 마산 주조를 설립하여 1960년까지 운영하였다. 위치는 현재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앙동 3가 경남 데파트 뒷길로 추정된다. 마산 주조와 함께 대동 주조도 운영하였다고 한다. 대동 주조는 1921년 창업된 시미즈[淸水] 양조장의 후신으로 알려져 있다. 시미즈 양조는 1928...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동의 지서장으로 헌신적으로 마을 일을 돌보아 준 인물. 이봉하(李鳳夏)[1926~?]는 1958년부터 1961년까지 당시 진해 웅동의 지서장으로 재직하면서 웅동 경노당을 건립하고, 소사마을의 다리를 가설하는 한편 집안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 사업을 하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이봉하는 이후에 진해경찰서로 이직하여 수사 과장...
-
경상남도 창원 마산 출신의 화가 이상갑(李相甲)[1920~1996]은 마산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4월 일본 동경 제국 미술학교 양화과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1938년에 조선 미술전에 입선하였고 1941년 일본 도쿄 독립전에 입선하였다. 6·25 전쟁을 피해 제주도를 거쳐 거창 마리면에서 거창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거창읍에서 1954년에...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시인. 이석(李石)[1927~1999]은 1945년 진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부터 1962년까지 14년간 마산 고등학교에 근무했다. 약 20년간을 마산에서 거주하면서 1955년 『현대 문학』에 청마 유치환[1, 2회] 박두진[3회]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처녀 시집 『하초(夏草)』를 발표하면서 『남대문』, 『향관의 달』...
-
창원시 마산 출신의 시인. 이선관(李善寬)[1942~2005]은 1942년 마산에서 태어나 마산 성호 초등학교, 마산 창신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마산 3·15 의거에 직접 참여하였다. 1963년에 경남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년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어릴 때부터 뇌성 마비를 앓아서 아픈 몸이었음에도 불굴의 의지로 정의로운 삶을 노래했던 마산의 시인이다. 시집...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수강(李壽康)[1912~1262]은 1936년 3월 중순 경에 당시 가덕도 출신 재일 교포 단체인 재대판(在大阪) 가덕인 친목회(加德人親睦會)에 가입하였다. 여기서 1938년 6월경까지 동지들과 함께 조선 독립을 위한 구체적 실행 방법을 연구 하고 논의 하였다. 그리고 가덕인 친목회(加德人親睦會)의 확대 강화를 방안을 모색하였다....
-
창원시 마산 출신의 배우. 이수련(李秀鍊)[1935~2007]은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의 배우였다. 1935년 마산에서 출생하였다. 동국 대학교 경제학과를 중퇴하고 1959년에 「가난한 애인들」로 데뷔하였다. 한형모 감독의 이 작품은 최은희가 주연이었다. 이 작품으로 제3회 부일 신인상(釜日新人賞)과 제4회 국제 영화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1960년대...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수룡(李守龍)[1911~?]은 가덕도에서 사립 소학교 4학년을 수료하고 1927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모멸적 언동과 차별 대우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한 속에서 민족 의식을 쌓아가던 중 김근도(金根道)가 중심이 된 재대판 가덕인 친목회(在大阪加德人親睦會)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독립 운동에 헌신할 것을...
-
창원시 마산 출신의 화가. 이수홍(李水洪)[1920~1969]의 본명은 준섭이다. 1939년 일본 동경 제국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양화를 공부하였다. 8·15 해방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이수홍은 의신 여중, 칠원 중, 성지 여고 등에서 교편 생활을 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1950~1960년대는 미술평론을 통해 지방 화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
-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교육가·민족 운동가. 이승규(李承奎)[1860~1922]는 경남 마산의 유지로 1906년 창신 학교(昌信學校)의 전신인 독서숙(讀書塾)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그는 호주 선교 본부의 승낙을 얻어 1913년 4월 5일 의신 여학교(義信女學校)를 설립하고 창신 학교 유지회를 조직하였으며, 1914년 5월 7일 추산정에서 민족 자주...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승종(李承綜)[1907~1969]은 주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 과학 강좌와 강연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강압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대안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주제로 강연하였다. 따라서 그의 독립 운동의 목적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신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주로 창원군 웅...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안호는 경남 창원에서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26년 아버지를 따라 일본 오사카(大阪)로 가 제면소(製綿所) 노동자로 일했다. 그 후 일본인 사회주의자 오리메의 영향을 받아 노동운동에 전념하였는데, 도쿄에서도 토목하수공사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일본 공산주의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1년에는 도쿄의 관동자유노동조합에 가입하여 격문을...
-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기업인. 국내 기계 공업의 선구자. 8·15 해방 이전에 소규모 주물 공장으로 출발 1950년대 후반 육상용 디젤과 해상용 디젤기관을 대규모 생산 영세했던 기계공업을 궤도에 올렸던 기업인이다. 일제 후반, 일본의 한반도의 공업 중 규모가 기계공업은 대륙 진출을 위해 북한 지역에 집중되었고, 남한 지역은 농업과 상대적으로 영세한 경공업이 있었을 뿐이다...
-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아동 문학가. 호는 동원. 아버지 이문술과 어머니 진순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36년 6월, 「오빠 생각」의 작가인 최순애와 결혼하였다. 이원수(李元壽)[1911~1981]는 1916년에 창원의 서당에서 수학하였고 1922년에 마산 공립 보통학교에 2학년에 입학하였다. 1926년 동시 「고향의 봄」이 소파 방정환이 만든 잡지인 『...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우국지사. 호는 소려(小廬). 자는 도여(道汝)이다. 이원순(李元淳)[1863~1932]은 농사와 책읽기를 업으로 삼고 어버이 섬김에 정성을 다하는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었으며 가정생활에도 검소하였다. 초야에 묻혀 살았으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8년 고종 승하 시까지 조선 멸망을 슬퍼하여 상곡리 14~5 뒤편에 대를 모으고 매일 북향재배했...
-
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한글학자·교육자. 호는 한뫼·한메·환산(桓山)이다. 이윤재(李允宰)[1888~1943]는 어렸을 때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김해 공립 보통학교, 대구 계성 학교, 대구 춘잠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김해 협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했고 이후 마산 창신 학교, 마산 의신학교와 평안북도의 영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
창원 출신 시인·사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노산(鷺山), 강상 유인(江上遊人), 노산 학인(鷺山學人). 필명은 남천(南川), 두우성(斗牛星)이다. 이은상(李殷相)[1903~1982]은 1918년 아버지 이승규가 세운 마산 창신 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학교 문과를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1923년 이후 창신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다시 1925...
-
창원시 마산 출신 동요 작가. 이일래(李一來)[1903~1979]는 1920년에 창신 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서울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는데 우연히 천도교 낙성식에 참석하여 김영환 선생을 만나면서 음악 교육을 받게 되었다. 연희 전문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낙향하여 창신 보통학교, 창녕군 이방면 이방 보통학교[현 이방 초등학교]에서...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일윤(李一允)[1890~1954]은 1919년 3월 경상남도 마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하였다. 3월 1일 서울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마산으로 내려온 대동 청년단(大同靑年團)의 김관재는 동지 이형재 등과 회동하여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마산의거(馬山義擧)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창신(昌信) 학교, 의신(義信) 학교 학생...
-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재성(李在性)[1910~1950]은 창원군 진동 공립 보통학교(鎭東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33년 1월 김두영(金斗榮), 정두명(鄭斗明) 등이 조직한 ‘혁명적 교육 노동자 협의회(革命的敎育勞動者協議會)’에 참여하여 항일 투쟁 활동을 하였다. 1933년 3월 마산(馬山)에서 김두영, 정두명과 함께 ‘적색 교육 노동자 협의회(赤色敎...
-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활동한 기업인. 이정석은 경상남도 진해시 근화동에서 이기두와 김가우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2년 일본 후쿠오카[福岡]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진해석유상사 대표로 취임해 경제인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의 9월에 해영산업의 대표를 맡았고, 1955년에 진해상공회의소를 설립, 초대부터 6대까지 회장을 역임하며...
-
창원 출신의 언론인·화가. 이진순(李珍淳)[1917~?]은 청년 시절 일본 명치 전문 대학을 수료하고 동경 입정대학 국어 국문학과를 수료하였다. 일본의 여자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광복 후 귀국하여 마산에 정착하였다. 이후 부산에서 자유 민보사 편집국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마산에서 서울 신문, 국제 신문 지국장을 지냈다. 암울했던 1950~1960년대와...
-
창원시 마산 출신의 무용가. 이필이는 마산 출신의 무용가로서 주로 마산에서 활동해왔다. 활동 기간 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며 수차례의 공연을 통해 전통 무용 보존과 보급에 힘써 온 인물이다. 아버지 이찬종과 어머니 구막이 사이에 3남 4녀 중 셋째다. 이필이(李畢伊)[1935~2009]는 명랑 쾌활한 성품과 예술적 재능을 천부적으로 지니고 태어났다. 어...
-
창원시 마산 출신의 언론인·향토 사학자. 이학렬(李學烈)[1929~2008]은 마산 공립 중학교를 거쳐 마산 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성균관대 경제학부를 수료하였다. 경상남도, 부산 지역의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마산 지역의 다양한 문화지 발간에 참여하였다. 1983년 『마산 시사』 편찬 위원회 상임 위원, 『통합 마산 시사』 편찬 위원, 1987년 『마산 상공회의소...
-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미군정 산하 행정 총사령관. 이한식(李漢植)[1898~1947]은 1921년 마산의 창신 학교(昌信學校)에서 수학하다가 1922년 중국으로 건너가 서주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30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이한식은 남가주 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하여 공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1942년 미육군에 여섯 번 자원했지만 입대하지 못...
-
근대 개항기 경상남도 마산에 있었던 최초의 금융 기관. 일본의 제일 은행은 일제의 조선 침략에 첨병 역할을 담당한 곳으로, 1905년[을사늑약] 일본인 재정 고문에 의해 화폐 개혁이 단행되었고 신-구 화폐의 교환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많은 금융 자산을 수탈당해 심각한 금융 공황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때 화폐 개혁을 전담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07년 마산 지역에 최초로...
-
일본이 한국의 청소년을 태평양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1943년 진해에 설치한 해군지원병 훈련소.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제국주의 일본은 병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38년 ‘육군 특별 지원병령(陸軍特別志願兵令)’을 공포하여 한국 청년들을 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3년 5월 범위를 더욱...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해에 있었던 일본의 해군 항공 부대. 제국주의 일본은 군사력을 확충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해군 항공대의 증설을 계획하였으나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어렵게 되자 1924년 그중 하나를 진해에 설치하기로 했다. 이 계획에 따라 1936년 안곡동[현 해군 사관학교 자리]에 일본 해군 항공대가 들어섰다. 이곳은 이미 1909년에 진해 군항 예정지로 결정되어 가옥을...
-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필요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1943년 진해에 설치한 해군 항공기 수리·정비 공장.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41년 하와이에 있는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함으로써 태평양으로 전쟁을 확대한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시베리아 방면의 군사력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군사 시설을 설치할 계획을 수립하고 대륙 전에 필요한 항공기의 제조, 수리는 한...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황산 정상에 있는 일본 해군의 러일 전쟁 전승 기념탑. 일본은 1904년 러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대규모의 군대를 한국에 진주시켜 창원·마산·거제 등 진해만 일대를 중심으로 한 주요 지역을 사실상 강점하고 여기에 거제도 송진포의 해군 방비대 등 여러 군사 기지를 설치하였다. 일본군은 이들 기지에서 함포 사격과 해상 훈련 등 장차 러시아군...
-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창원 지역에서 이루어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 시기. 1. 마산 1914년 3월 1일 부·군제의 실시와 함께 창원부 외서면 마산포 일대는 마산부로 개칭되었다. 당시 마산포의 인구는 2만 3000여 명에 불과하여 부(府)의 기준에 미달하였다. 그러나 마산항의 병참 기지로서의 중요성과 대일 교역상의 입지적 특성이 중시되어 부로 편...
-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마산만을 매립한 일. 개항을 계기로 마산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방대한 규모의 마산만 매립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에 의한 마산만의 매립은 도시의 전체적인 균형과 발전을 위해 거시적으로 일관되게 계획되어 시행된 것이 아니라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필요 및 투기성 경제 활동의 수단으로 시행된 매립이었다. 마산 도시가 끼고 있던 해안의 간...
-
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에서 지주와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횡포에 맞서 소작 관계 개선과 농조 건설을 위한 농민 운동. 지나친 소작료의 징수 고리대의 악용 등 농민들은 늘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여기에 마름들의 농간과 그들에 의한 소작권의 빈번한 이동으로 소작 농민들의 삶이 매우 힘들어졌다. 이에 지주와 동척의 횡포에 맞서 소작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농민 조합의 건설이 필요하였다....
-
일본 해군의 군사 도시이자 근대적 계획도시로 건설된 일제 시기의 진해. 경상남도 창원시로 통합되기 전까지의 진해시 지역은 조선 시대에는 웅천현(熊川縣)이었으나 1912년 1월 웅중면 전부와 웅서면의 일부를 통합하여 진해면(鎭海面)으로 개편하면서 ‘진해’라는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이 지역에 일본 해군의 군항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를 가진 ‘...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언론인·시인. 호는 일묵(一默)·한가람. 필명은 임삼(林三)이다. 임영창(林泳暢)[1917~2001]은 건국 대학교 정치과를 졸업하였다. 마산 일보 주필, 마산 문인 협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문인 협회 성남시 지부장을 역임하였다. 현대 시조 시인 협회장 및 한국 문교 문인 협회장을 역임하였고 해군 사관학교, 효성 여자 대학교, 한국 항공...
-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활동했던 노동운동가. 임종호는 1964년 12월 14일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나 1983년 창원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전인 1982년 10월 동양기계[현 세일중공업]에 입사하였다. 임종호는 입사 후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정당방위대에서 활동하였다. 1989년 5월 창원대로투...
-
1899년 마산포의 개항을 전후하여 단독 조계를 설정하기 위해 마산 자복포 일대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사들이려는 러시아와 일본의 요구를 거부한 사건. 1899년 마산포의 개항을 전후하여 러시아는 남해안의 항구로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마산포에 동양함대를 위한 조차지를 설정하기 위해,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갈등을 빚고 있었다. 먼저 러시아는 마산포 개항 몇 개월 전부터 주한...
-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에 있는 근대 청주 주조 공장. 장군동 공장은 1909년 일본인 사업가 엔도 도요키치[遠藤豊吉]가 장군동 일대에 세운 청주[사케] 공장이다. 마산 지역은 물과 공기가 좋고, 인근에 김해 평야가 있어 쌀을 구하기 쉬웠다. 술을 만들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에 엔도는 청주 공장을 세우고, 이름을 지시마엔[千島園] 주조장이라 했다. 지시마...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재상은 1942년 7월 20일 창원면 동정리에 있는 창원신사 뒤 숲에서 10여 명의 급우들(박대근·최을석·조문대·김명수·배장실 등)과 밀회를 거듭한 후 청년독립회를 조직했다. 청년독립회는 이후 일본의 감시가 극심하여 공식적인 활동보다는 백정기의 지시에 따른 은밀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들은 학교에서 강요하는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기로...
-
근대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언론가·애국 계몽가. 본관은 인동(仁同). 초명은 지윤(志尹),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아버지는 장용상(張龍相)이며, 장석봉(張錫鳳)의 문인이다. 장지연(張志淵)[1864~1921]은 1894년(고종 31)에 진사가 되었다. 1895년 8월에 일본의 명성 황후 시해 만행이 자행되자 의병의...
-
근대 개항기 경상남도 마산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조직한 단체. 1899년 마산포 개항 당시 마산포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2, 3명에 불과하였지만, 각국 공동 조계 경매 이래 이주자가 점차 증가하여 다음 해인 1900년 봄에는 30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마산 거주 일본인들은 야마타[山田敎文]를 총대(總代)로 추대하고 평의원 3명을 선출하여 ‘마산 일본인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마산...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와 마산합포구에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소유였던 농지나 주택, 기업 등의 재산을 미군정에 몰수하여 이승만 정부의 정책으로 이 귀속재산을 불하[매각]한 것. 마산에서도 일본인이 독점적으로 관리해 왔던 시내의 모든 제조업체들이 미 군정청의 손을 거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기술 부족과 자재난, 전력난...
-
일제강점기 창원 지역 주민들에게 무산계급 이념을 선전·교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를 기점으로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항일운동은 종래 민족부르주아 중심의 항일운동이 지녔던 한계를 극복하고 일반 대중들을 자각시키면서 대중들의 실질적 권익신장을 보장하는 항일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처럼 민족부르주아 중심의 운동에서 무산계급 중심의 사회...
-
창원시 마산어시장에서 제일 수산을 경영한 유통 객주. 전삼도는 소달구지에 염장고기를 싣고 김해장 등을 다니면서 장사를 했던 아버지를 따라 장사를 배웠다. 전삼도가 처음에 자전거를 타고 북면을 다니면서 장사를 했다고 한다. 전삼도가 운영했던 제일 수산은 현재 수산업 협동조합 옆쪽에 있었다. 젓갈 탱크 위에 마루를 넣은 서기들의 사무실이 있고, 그 안쪽으로 전삼도...
-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활동한 시인. 정규화(鄭圭和)[1949~2007]는 청소년기 마산으로 이주하여 마산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1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낸 신작 시집 『우리들의 그리움은』에 「풀잎 1」, 「고향에서」, 「술 노래」, 「한국 돈」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경남 민족 문학 작가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 정기헌의 호는 백당(白堂)이며, 1886년 현 경상남도 창원시 상남면 봉림리 62번지에서 정규엽(鄭珪燁)과 이근수(李根秀)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배일사상이 철저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일제에 협력이 되는 일이라면 아예 손대지 않았다. 아울러 일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개인이나 단체하고는...
-
창원 출신의 전각 장인. 정기호(鄭基浩)[1899~1989]는 창원에서 부유한 면장집 외아들로 태어났다. 전각가로는 독보적인 존재로 명성이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졌다. 1912년 마산 창신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6세 때 황소산(黃蘇山)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조선 옥새 전각장 계보(朝鮮玉璽篆刻匠系譜)에 의하면 황소산은 옥새전각의 계보를 이어 온 인물이다. 옥새...
-
창원시 마산 지역의 정치인. 정남규(鄭南圭)[1917~1993]는 일본 나니와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청년 시절에는 일제에 맞서 항일투쟁을 하였고 『대동 일보』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1952년 초대 마산시의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1956년 제 2대 경상남도의회 의원, 1960년 제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도의원 재임 기간에 3·15 부정 선거 부정 신고 현장을...
-
마산에서 활동한 무용가. 정민(鄭珉)[1928~2006]은 본명이 정순모(鄭淳模)이고, 어릴 때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주로 한국에서 한국의 전통 무용을 익히고 공연한 한편, 서양 무용인 발레까지도 섭렵하여 무용의 전 분야를 두루 섭렵하고 공연하였다. 일찍이 신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1933년 5세에 가수로 데뷔하여 1936년에 일본, 조선, 중국...
-
일제 강점기 창원 지역의 독립운동가. 정운조(鄭云朝)[1888~1951]는 1919년 4월 창원군(昌原郡) 웅동면(熊東面) 지역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적으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웅동면 계광 학교의 교사인 주기용(朱基容) 등이 웅동면 사무소에서 주도한 4월 3일 만세 운동에 참여 하였는데, 이 시위는 당시 인근에서 가장 큰 시위였다. 시위가 있던 날 11...
-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학 평론가·시인. 정재관(鄭在寬)[1931~1986]은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현대 문학』에 시로 등단하였다. 1975년 『동아 일보』 신춘문예 평론에 당선되었고 1975년 『중앙 일보』 신춘문예 평론 입선되었다. 1968년에는 ‘자유 교양 대회’ 논문분야 1위를 수상하였다. 한국 문인 협회,...
-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연극인·시인. 본관은 동래. 호는 월초(月礁)이다. 정진업(鄭鎭業)[1916~1983]은 마산 공립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 전문학교 문과를 중퇴하였다. 1936년부터 연극인 이광내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극단 극연·낭만파·태양에서 연극 수업을 받았다. 1939년 단편집 「카츄사에게로」가 『문장』지에 추천받아 등단하였다. 1940...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의료인. 제길윤(諸吉允)[1906~1965]은 1918년 진영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6년 일본에서 일본 의사 고시에 합격하여 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1931년 의령 등에서 보건의(保健醫)로 근무하였다. 1935년에서 1940년까지 국립 마산 병원에 재직하였고, 1941년에 수상 의원[제내과]를 개업하여...
-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계승(曺啓承)[1880~1943]은 1919년 3월 19일 경상남도 함안 장날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함안 장날의 만세 운동은 조한휘, 한종순, 이찬영, 조병흠, 박건영, 강기수, 한관렬 등이 계획하고 대산면(代山面)의 한문 교사 안지호와 연락하여 3월 19일 함안 장날에 거사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이때 조계승도 이 계획에 적극...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작곡가·피아노 연주가. 조두남(趙斗南)[1912~1984]은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미국 출신의 신부 조지프 캐논스로부터 서양 음악과 작곡을 배웠다. 11세 때 가곡 「옛이야기」를 작곡하였고, 17세 때 첫 가곡집을 발간했으며, 21세 때 가곡 「선구자」를 작곡하였다. 평양 숭실 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의...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해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조맹임(曹孟任)[1905~?]은 1928년 ‘웅동 여자 청년회’를 창립하여, 여성 운동으로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이 문맹 퇴치 운동이었다. 또한 야학교를 설립하여 가르쳤고, 사립 계광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하였는데, 재주가 많아서 음악과 무용도 가르쳤다고 한다. 바느질 솜씨가 좋아서 찾아오는 여...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문대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의 황민화정책이 막바지에 이른 1942년 7월 20일 창원보통학교 졸업 후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던 백정기와 함께 비밀결사인 청년독립회를 조직했다. 청년독립회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활동과 ‘조선독립만세’라는 벽보를 진해군항과 연결되는 창원역 지하로 교량 등에 붙인 창원만세사건을 주도했다. 조문대...
-
일제 강점기 비밀 결사 단체인 조선 국권 회복단의 경상남도 마산 지부. 1915년 1월 조직된 비밀 결사 단체인 조선 국권 회복단은 박상진, 윤상태, 서상권, 배중세, 이시영 등 영남 지역의 자산가·혁신 유림·지식인들이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조직의 목적은 단군을 받들고 신명을 바쳐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할 것과 만주...
-
마산 지역에서 소작농과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 등이 설립한 단체. 노동자의 인격 향상과 상식 증진, 근검절약과 친목 및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중앙의 조선 노동 공제회 창립과 동시에 각 지방에 지회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마산 지역에는 마산 지회와 삼진 지회 및 구산 지회 등이 설립되었다. 이후 마산 지부는 1922년 10월 조선 노동 공제회로부터 일...
-
백정을 주축으로 한 천민 계급이 평등을 기치로 진주에서 조직했던 조선 형평사의 마산 분사(分社). 1924년 3월 6일 마산에서 조선 형평사 마산 지회인 마산 분사(分社)가 조직되었다. 1928년 3월 13일 경남 형평사 연맹 발기회를 가졌는데 마산 분사, 김해 분사, 창원 분사, 사천 분사, 진주 분사, 통영 분사, 부산 분사, 동래 분사, 밀양 분사가 발기 단체로 참여하였다....
-
일제강점기 창원에서 결성되었던 조선형평사 창원 분사. 형평사(衡平社)는 1920~1930년대에 걸쳐 백정들의 실질적 해방을 목적으로 활동한 전국적 조직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백정이라는 신분적 차별이 법률적으로 철폐되었으나 이후에도 실생활에서는 차별이 여전했다. 1922년 일본 관서 지방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1923년 4월 25일 진주의 이학...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사회 사업가. 조수옥(趙壽玉)[1914~2002]은 1938년 경남 진주 성경 학교를 졸업한 후 삼천포 교회와 부산 초량 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고, 호주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39년부터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하다가 1940년 9월 20일 부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1년 8월 25일 평양 형무소로 이송되어 옥고를...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당시 창원 읍내에서 매달 음력 2일과 7일에 열리던 5일장은 규모가 커서 장날마다 주변 농촌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은 3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각 지방의 독립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경상남도 지역의 애국인사들은 비밀리에 3월 23일(음력 2월 2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반의 준...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시인. 본명은 섭제(燮濟). 시인 조봉제(鳳濟)의 형이다. 조향(趙鄕)[1917~1984]은 진주 고등 보통학교를 거쳐 대구 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에 일본 대학 상경과를 다니다 중퇴하였다. 해방 후 마산 상업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는데 이 때 동인지 『노만파 魯漫派』를 주재했다. 이후 부산에 있는 동아 대...
-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희순은 1919년 3월 23일 창원군 창원읍 장터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 중의 하나이다. 창원읍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을 분담했는데, 조희순은 북면 주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는 일을 맡았다. 4월 2일 창원읍에서 진행된 제2차 독립 만세운동에서도 조희순은 적극 참여하여...
-
창원 출신의 교육자·정치가. 주기용(朱基瑢)[1897~1966]은 1916년 평안북도 정주 오산 중학교(五山中學校)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웅동면에 있던 계광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학교에 재직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여러 사람과 뜻을 모아 웅천, 웅동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옥살이를 하였다. 이후 옥살이를 마치자 설립자이자 장인이신 남강 이승훈의...
-
개항기 창원시 진해에서 근대 교육 기관을 설립한 선각자. 자는 우원(于源), 호는 석천(石泉)이다. 주기효(朱基孝)[1877~1941]는 1906년 김구석, 양주용과 함께 근대 교육 기관인 사립 개통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07년에는 숙명 의숙(淑明義塾)을 세웠다. 졸업생 중 유망한 제자 40여 명을 선발하여 사재로 유학을 시켜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교...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사회단체 운동가. 주병화(朱炳和)[?~?]는 1923년 10월 진해 노동회 창립 대회에서 서무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진해 소작회 간부로 있던 1924년 7월 진해에서 일어난 소작 쟁의에 관여하였고 이 때문에 업무 방해죄로 벌금 80원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1925년 2월 사상 단체 적성회(赤星會) 결성에 참여했고, 4월 창원 청년 연맹 집행 위...
-
조선 후기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배치규의 문집. 배치규(裵致奎)[1826~1891]의 자는 여용(汝容), 호는 죽초(竹樵)이며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아버지는 배덕위(裵德緯)이며, 어머니는 풍산(豊山) 홍씨(洪氏) 홍희범(洪羲範)의 딸이다. 8세에 소학을 배우고 시를 지을 수 있었으며, 13세에 『시경(詩經)』·『서경(書經)』을 외웠다. 문장과 글...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소설가. 본명은 이숙희, 필명은 이현욱(李現郁)이다. 지하련(池河蓮)[1912~?]은 1930년에 동경 소화 고등 여학교를 졸업하였고, 1935년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인 임화(林和)와 결혼하였다. 1940년에 결핵 요양차 마산으로 왔다. 1940년 12월에 단편소설 「결별(訣別)」이 평론가 백철(白鐵)에 의해 『문장』에 추천되어...
-
6·25 전쟁 때 경상남도 마산합포구 진동 지역에서 발생했던 전투 6·25 전쟁 과정에서 마산 지역 전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라 불리는 진동 지구 전투와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유엔군 전투이다. 진동 지구 전투는 당시 미 제24 사단에 배속되어 있던 김성은 부대의 활약이 컸다. 김성은 부대는 해병대 중령 김성은(金聖恩)이 이끌었던 부대이다....
-
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에서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국치일(國恥日)을 맞이하여 격문이 뿌려지고 포스터가 붙은 사건. 1930년 8월 29일 국치일을 맞아 진해 웅천면과 웅동면 일대에서 항일 운동을 고취하는 격문이 뿌려졌다. 일제 강점기 기록인 ‘고등 경찰관 계적록’[1919~1935]에 의하면 “일한 병합 기념일 당일, 9월 2일, 9월 22일의 3일에 걸쳐 창원군 웅천면 박정환...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에 있는 광천교(廣川橋) 건립과 관련된 석비(石碑). 진해 광천교 건립비(廣川橋 建立碑)는 웅천읍성의 동문에서 약 150㎞ 떨어진 지점의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동천(東川)에 세워진 광천교의 건립과 연관된 비석이다. 최초의 광천교는 오래되어 무너졌고, 지금의 다리는 다시 세운 것이다. 진해구 성내동의 광천교를 건립하고 이를...
-
진해 청년단과 대동 구락부가 통합하여 창립된 어용적 성격을 띤 단체. 1921년 4월에 진해 청년단과 대동 구락부가 통합되어 창립되었다. 진해 청년단의 단장 김병일(金秉一)과 대동 구락부 부장 홍수오(洪守五) 사임 후 두 단체의 의견을 모아 진해 구락부로 개칭하고 구자원(具子源)이 부장에 선출되었으며, 또 부무(部務)가 일층 확장되었다. 진해 청년단은 1915년 창립되었...
-
일본 해군이 한반도 주변 해역을 방어하기 위해 1910년부터 1922년까지 진해에 건설한 군항. 일제는 1904년 러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대규모의 군대를 한국에 진주시켰다. 창원·마산·거제 등 진해만 일대 주요 지역을 사실상 강점하고 여기에 해군 방비대 등 임시 군사 기지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거듭한 끝에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
-
1925년 진해에서 노동 계급의 단결과 노동 운동을 펼치기 위해 조직된 단체. 진해 노동 청년 동맹은 1925년 창립하였다. 1927년에는 진해 제4 청년 동맹과 진해 노동 청년 동맹은 취지가 비슷하여 두 단체의 협의한 결과 합치기로 하였다. 1926년 11월 3일에는 경남 진해 노동 청년 동맹의 제3회 정기 집행 위원회는 진해 청년 회관에서 우두만 사회 하에 개최되었고...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석동 뒷산 마을 공유림을 둘러싼 석동 주민들의 항일 농민 운동.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석동 뒷산에는 농우(農牛)의 목초지로 사용되는 마을 공유림이 있었다. 이 산림을 마산 부윤 미마쓰[三增久米吉]의 아들 쇼오고[詳吾]가 다년생 소나무를 벌목하고 과수원을 만들었다. 이에 석동 농민이었던 이장인 배효준을 비롯한 김시영, 우휘수 등이 쇼...
-
1926년 진해 지역의 소년들의 사회 운동 참여를 위해 조직된 단체. 회원 20여 명으로 창립되었다.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어 성주사 진해 포교당[현 정암사]으로 사무실을 옮겨 명칭을 불교 소년회로 개칭하였다. 이후 종교 집회를 가장하여 활동을 계속하였지만 일본 경찰이 포교당의 잦은 집회를 구실로 포교당 주지에게 압력을 가해 포교당을 더는 집회 장소로 이용...
-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 지역 농민들이 토지 수탈과 소작권에 대해 일으킨 저항 운동.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지역은 러일 전쟁 이후 1906년과 1907년에 일본의 해군 용지로 점탈되었다. 하지만 모든 토지가 군사 시설로 이용되지는 않았다. 일본 해군성은 그 남은 땅을 경작하도록 대여를 하였는데 일본인에게만 특혜를 주었다. 토지를 대여하게 된 일본인들은 농지를...
-
경상남도 진해 지역에서 1923년 소작료를 인하하고 관리자 횡포를 막기 위해 결성된 소작회. 지주가 소작권을 가질 수 없게 하고 고율의 소작료로 착취할 수 없게 대항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1923년 6월 18일 주병화(朱炳和), 문찬두(文酇斗), 김종건(金種健) 등이 발기인이 되어 불교 포교당[정암사]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다시 조직을 변경하여 종래 소작인만으로 조직되...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있었던 일제 강점기 일본 신사. 일제가 조선을 무력으로 위압한 것이 경찰과 군대였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이 바로 신사(神社)였다. 원래 신사는 일본의 토착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참배하는 곳이었다. 이 토착 신앙을 신토(神道)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의 악령에 대한 두려움과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참배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므로 신토는 뚜렷한 교리도 없...
-
일제 강점기 진해에 군항이 건설됨에 따라 주둔하였던 일본 해군 부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화하였고, 결국 1910년 한국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이미 러·일 전쟁 직후부터 한반도 남해안에 군항을 건설하려고 했던 일본은 진해를 군항 예정지로 선정하였다. 여러 사전 작업을 거친 끝에 191...
-
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에서 일어난 독서회 조직을 통한 항일 투쟁. 일제 강점기 진해 이동에는 역사가 오래된 야학이 운영되고 있었다. 1930년대 이 야학에 교편을 잡고 있었던 사람으로 문맹근, 박홍목, 박영수 등이 있었다. 이들은 진해 공립 보통학교의 졸업 동기생이며 진주 사범학교 특과를 졸업하고 이 마을에 살면서 향토애와 조국애로 의기투합하던 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오산 중학교를...
-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면에서 1925년 설립된 청년 운동 단체. 경남 창원군 진해면에서 1919년 창립한 진성회(進誠會)가 1925년 12월 13일 오전 11시 임시 총회를 개최하고 진해 제4 청년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학원을 설립하여 문맹 퇴치 운동을 하였다. 1926년 10월 31일 제2회 정기 총회에서는 회관 건축, 교양 문제, 재정 문제, 경남 사회 운...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대장동에 있는 효자비(孝子碑). 주정원비(朱鋌源碑)는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진해에 거주하였던 효행이 뛰어난 주정원(朱鋌源)의 행실을 칭송하기 위하여 1942년에 후손들이 대장동 마을 앞에 건립한 효자비(孝子碑)이다. 효자비(孝子碑)의 비명(碑名)은 ‘효자 국정 주공 정원 지비(孝子菊井朱公鋌源之碑)’이다. 비문(碑文)은 남평(南平)...
-
1934년 일제 강점기에 진해 지역 미혼 여성들로 구성된 비밀 결사 조직. 진해 처녀회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웅동적화비사(熊東赤化秘社)’를 통하여 진해 처녀회의 활동을 추정할 수 있다. ‘웅동 적화 비사’는 부산 경찰서 고등계에서 검거하여 조사 중인 소위 ‘진해 여공 적화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웅동에 있는 조맹규와 백태식 등이 부산에 있는...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해 지역에서 활동했던 항일 청년 운동 단체. 1923년 4월 진해 청년 구락부가 정기 총회를 열어 진해 청년회로 개칭하였다. 1915년 진해 청년단을 출발로 해 1919년에는 대동 구락부와 통합하였고 1923년에는 진해 청년회가 되었다. 1923년 10월 13일 일본 토요야마 대학 졸업생 엄용식, 쥬오우 대학 졸업생 이영실을 초청하여 경화동 불교 포교당[현...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해 지역의 수건 공장에서 발생한 노동 운동. 일제 강점기 진해의 여좌동에 있는 후쿠다 타월 공장에서 여자 노동자 절반 이상이 동시에 동맹 파업을 단행하였다. 공장주가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을 더 낮추겠다고 하여 동맹 파업을 발생케 하였다. 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에는 ‘수건 공장’이 여좌동과 덕산동 두 곳에 있었다. 덕산동에는 공장주가 타나카인 ‘타나카 타월 공...
-
조선 시대의 웅천현 지역에 1912년 일본 해군 군항이 들어서며 붙여진 명칭의 유래. 진해 지역은 1452년(문종 9)에 웅신현(熊神縣), 완포현(莞浦縣), 천읍부곡(川邑部曲)과 창원 남산 일부를 합하여 웅천현이 된 이래 조선 시대에 계속해서 웅천현(熊川縣)으로 존재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실시된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전국 행정 구역이 23부 336군으로...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황산동의 제황산 정상에 있는 박물관 겸 전망탑. 진해탑은 제황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전망탑의 성격을 가진 진해탑에서는 진해 지역 전체와 남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진해 군항제 때는 이곳을 중심으로 전야제와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제황산[90m]의 정상에는 일본이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하여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
-
1908년 마산 성호리(城湖里)에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학교. 영국령 오스트레일리아 미손회(會)의 파견 선교사 아담슨이 일찍이 본국에 청원하여 매달 금화 십 원의 보조를 받아 성호리 구 예배당[현 마산야학교] 사무실에 사숙(私塾)을 설치하고 학생 20여 인을 모집하여 이승규(李昇奎)가 숙장(塾長)으로 구학문을 가르쳤다. 1908년 7월 경성 정동 교회 고(故) 남승(南昇)을 초청...
-
조선 말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개항장·개시장에 설치되어 행정과 대외통상 업무를 보던 기관.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1876), 원산(1879), 인천(1882)을 비롯해 주요 항구가 개방되면서 그곳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증가하고 교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거류지 관계 사무와 통상사무를 전담하고 처리할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감리서는 초기에 해당 지역의 부사가 감리를 겸임하고...
-
1899년 마산포의 개항에 따라 창원 지역에 설치되어 통상·외교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관청. 감리서(監理署)는 조선 말기 개항장(開港場)과 개시장(開市場)에서 무역 및 외국인 거류지와 관련된 행정 업무를 담당하던 부서로서 수출·수입 상품에 대한 관세의 부과 및 징수를 담당하던 해관(海關)과 함께 개항장·개시장에 필수적인 관청이었다. 1883년 8월 부산·원산·인천에 처음 설치되었으...
-
1907년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으로 한국이 식민지화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1907년 1월 말부터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한국의 산업가와 지식인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1300만 엔에 달하는 일본 차관을 상환해야 하는데, 빈약한 정부재정으로는 그것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민간에...
-
1933년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에서 노동야학총동맹이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려다 일제에 발각된 사건. 1933년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지역의 각리에 산재한 노동야학 15개소의 야학 대표자와 교원이 북면노동야학총동맹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이들은 공립보통학교의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기로 하였으며,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려다가 일제에 적발되었다. 북면노동야학총동맹에서는...
-
일제강점기 창원 지역에서 가난한 아동들을 위해 만든 야학. 창원노동야학교는 창원 지역에서 보통학교에 취학하지 못한 가난한 아동들의 교육과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창원청년단의 문화부 사업의 일환으로 1920년에 설립되었다. 1925년 경비 부족으로 운영난을 겪자 창원청년회 정기총회에서 회원들이 경비를 모을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에도 노동야학은 계속 재...
-
일제강점기 창원 지역에서 결성된 사회운동 단체. 창원동화합성회(昌原東華合成會)는 창원 지역에 산재해 있는 많은 소년 단체와 청년 단체들이 함께 수양을 통하여 합치 단결하여 사회에 실익을 주는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1927년 9월 28일 창원청년회관에서 임시의장에 선출된 김치용(金致鏞)의 사회로 창원동화합성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후 창원동화합성회는 마산...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있던 여성 중심의 사회운동 단체.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청년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지역의 젊은 여성들은 창원 지역의 여성을 대상으로 사회적 교양을 쌓고 교육이나 훈련을 통하여 개개인의 인격을 완성하고자 여성 사회운동 단체인 창원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1926년 12월 19일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여 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집행위원으로 장경...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현동에 있는 고 이승만 대통령이 별장 및 정자로 사용하였던 근대 건축물. 고 이승만 대통령 별장은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건물이다. 별장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육각정이라 불리는 육각형의 정자가 있는데, 1949년 이승만 대통령과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이 만나 회담을 한 장소이기도 하다. 육각정은 1949년 8월 8일 이승만 대통령...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통신동에 있는 일제 강점기 때 지은 목조 우체국 청사. 진해 최초의 체신 업무는 1910년 4월 일본 해군이 임시 해군 건축부 가청사를 현동에 설치하면서, 그 가청사 앞에 같은 해 9월 현동 우편소인 우편국 분소를 설치한 것이 시초이다. 1911년 7월부터 시가지 건축 공사가 활발해짐에 따라 시가지에 일본인 입주가 급격히 증가하여, 모든...
-
1928년 2월에 창립된 창원 청년 동맹의 진해 지부. 조선 청년 대중의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이익에 노력하여 생활의 향상을 기하고, 의식적 교양 및 훈련을 통해 청년 대중의 완성을 위해 조직되었다. 창원 청년 동맹은 1928년 2월 7일 창립하였고 창원 청년 동맹 진해 지부는 1928년 4월 1일 창립되었다. 창원 청년 동맹 진해 지부는 조직된...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에서 결성되었던 사회운동 단체. 창원청년단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지식을 고양시키고 체육 활동을 보급하며, 직업을 갖도록 하여 지덕체(智德體) 강화를 통하여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결성되었다. 창원청년단은 1920년 6월 27일 창원면 중동리의 김일현(金一鉉)·김정숙(金正淑)·황의성(黃義性)·설근헌(薛根憲)·황진환(黃臻煥) 등...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있던 청년 중심의 사회운동 단체.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통일적인 조직을 결성하여 청년 대중의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이익의 획득과 생활의 향상을 꾀하고자 설립하였다. 또한, 조선 청년 대중의 의식과 교양 등을 철저히 훈련하고 조선 청년 대중의 장고한 조직의 완성을 기하고자 창원청년동맹을 설립하였다. 1928년 2월 7일 창원청년연맹이...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있던 7개의 청년단체가 연합하여 결성한 사회운동 단체. 창원청년연맹에는 창원청년단(김한용·이주만), 남면청년회(안준), 소계 청년회, 진해청년회 등이 참가하였다. 진해청년회는 일찍이 남면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안준(安浚)과 교분이 있던 주병화(朱炳和)를 매개로 창원청년연맹에 쉽게 참가할 수 있었다. 1925년 4월 4일(음력)에 창원...
-
1899년부터 1906년 사이 창원감리서에서 보고한 공문과 외부의 훈령을 묶은 공문서철. 「창원항보첩」은 1899년(광무 3) 5월부터 1906년 1월 사이에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에서 상급기관인 외부로 보낸 보고서와 외부에서 창원감리서에 내린 훈령을 편집한 공문서철(公文書綴)이다. 모두 5책으로 되어 있다. 국한문 혼용의 필사본 5책으로 묶여 있다. 책의 크기는 가로...
-
1906년부터 1908년 사이 창원감리서와 창원부에서 작성한 보고서와 의정부 훈령을 묶은 공문서철. 「창원항안」은 1906년(광무 10) 2월부터 1908년 1월 사이에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와 창원부(昌原府)에서 상급기관인 의정부로 보낸 보고서와 의정부에서 창원감리서와 창원부에 내린 훈령을 함께 모은 국한문혼용체의 공문서철(公文書綴)이다. 국한문 혼용의 필사본 1책(1...
-
일제강점기 창원 지역에 설립된 무정부주의자 비밀결사. 1928년 5월경 창원공립보통학교 훈도(訓導)로 재직하던 조영기(趙榮基)와 청년 손조동(孫助同) 외 몇몇 청년들이 독서구락부를 조직하여 사상에 관해 연구해 오다가 1928년 8월경 흑우연맹으로 변경한 뒤 부근의 청년들을 권유해 가맹시켰다. 이 후 마산경찰서에 조직이 발각되어 검거된 이후 취조하였으나 아무런 단서도 발견되지 않아...
-
1895년부터 1994년까지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1895년 23부제 실시에 따라 진주부 예하 창원군으로, 1896년 13도제 실시에 따라 경상남도 창원군으로 개편되었다. 1899년 마산포가 개항되었고,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가 개설되어 군수가 감리를 서리하였다. 1906년 창원부로 승격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창원군으로 개칭하고 외내면을 마산부에...
-
해방 직후 경상남도 창원시 대산면의 행정을 담당할 목적으로 설립된 정치·사회단체. 창원군 대산면 인민자치위원회는 해방 이후 경상남도 창원군 대산면에서 자주적으로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긴급한 당면과제는 치안 유지였다. 해방 직후 무장해제가 되지 않은 상태로 있었던 일본군은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철수...
-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행정을 담당할 목적으로 설립된 정치·사회단체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재편되자 지방의 건국준비위원회지부도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 경상남도지부도 1945년 10월 5일 경남도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경상남도 각 지역에서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당시 경남에는 1도 3시 19군에 모두 인민위원회가 존재했으며, 상당...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면민들이 전개한 일본인 군수에 대한 규탄 시위. 1910년부터 1918년까지 경상남도 내무부 및 제1부 도서기를 역임한 인물인 일본인 구찌이시[口石敬義]가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창원군수로 재직하면서 군민의 안전과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영리와 치적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농민들이 도청, 군청, 면사무소 등에 진정하는 등 강하게 항의하...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시 동정동에 있는 창원역의 철도 교통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한 건물. 창원 관내의 역 중에서 대표적인 창원역은 1905년 5월 1일 삼랑진-마산 간의 개통으로 1905년 8월 5일 가역사(假驛舍)를 설치하여 업무를 개시하였다. 그 후 1926년 11월 21일에는 진해선(鎭海線)을 개통하였으며, 1940년 12월 26일에는 지금의 역사(驛舍)를 준공하...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군 창원읍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창원읍 항일의거는 1919년의 3·1운동에 호응하여 같은 해 3월 23일과 4월 2일 창원읍 장날에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을 말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0년에 걸쳐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설치와 더불어 헌병경찰제를 통한 무력을 앞세워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직접 통치를 단행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
1908년 6월부터 9월까지 경상남도 창원항재판소에서 판결 선고를 받은 죄수의 죄명을 기록한 명부. 1899년 5월 1일 창원의 마산포 개항에 따라 5월 22일 창원항재판소가 설치되어 창원 지역의 재판 업무를 담당하였다. 「창원항재판소형명부」 역시 다른 지방 재판소 형명부와 마찬가지로 인쇄된 형명부 용지를 사용하였으며‚ 기재 형식도 동일하다. 「창원항재판소형명부」는 1908년(융희...
-
창원시 마산 출신의 시인. 본관은 영양(潁陽). 호는 심온(深溫)이다. 천상병(千祥炳)[1930~1993]은 일본 효고현[兵庫縣] 히메지시[姬路市] 출신으로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마산에서 성장하였다. 1955년 마산 중학교를 거쳐 서울 대학교 상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1964년 부산 시장 공보 비서로 근무하였고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
-
경상남도 창원시 천선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옹기 가마 터. 천선동 옹기요지의 위치는 창원시 천선동 산155, 산161-9번지 일대, 즉 옹기골로 불리는 삼성항공 2공장 뒤편의 야산 끝자락에 해당한다. 2005년 창원대학교 박물관에서 『문화유적분포지도』 제작을 위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지금의 삼성항공 2공장과 야산 경계부 절토된 단애면에서 다량의 옹기편과 소토를...
-
일제 강점기에 마산 노동회가 발간했던 기관지. 『첫소리』는 마산 노동 동우회가 1926년 2월 마산 노동회로 명칭을 바꾸고 야학 경영, 강습회 개최, 연맹체 조직, 벽신문 발간 등의 사업을 추진하며 만든 신문이다. 갱지 전지 한 장에 손으로 써서 만든 신문 체제의 벽보이다. 노동자들이 쉽게 인지하도록 전체 국문으로 썼다. 1926년 5월 20일부터 창간호를 발행하여 매월...
-
일제 강점기 창원 지역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대파한 청산리 전투의 승전 소식을 실은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한 사건. 평화적으로 진행된 1919년 3·1 운동이 일제의 강력한 무력 진압에 막혀 실패로 끝나자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군들의 무장 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독립군 토벌을 위해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전투에서...
-
경상남도 마산과 창원의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미가입 노동조합 대표자들이 결성한 모임.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창립과 함께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과 공식적·비공식적 교류와 정보 교환을 해온 마산과 창원 지역의 많은 노동조합들은 일상생활까지 탄압을 받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청송회는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의 예봉을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조와...
-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청년 운동가. 최달수(崔達守)[?~?]는 주로 소년·청년 운동에 관여하였다. 1930년 1월 마산 소년 동맹이 주최한 동화회(童話會)에 참여하고 3월에는 마산 청년 동맹 대회에서 마산 보통학교 문제를 언급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거되었다가 풀려났다. 1930년 3월 마산 청년 동맹의 집행위원, 4월 마산 소년동맹의 집행 위원장, 6월 경남 소년 연...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최동락(崔東洛)[1892~1963]은 1919년 3월 21일 경상남도 마산(馬山)에서 기독교 인사들과 창신(昌信)·의신(義信) 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울에서의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마산으로 내려온 이갑성(李甲成)은 창신 학교 교사 임학찬을 만나 서울의 만세 운동 상황을 전하고 의신 학교...
-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공산주의 운동가. 최명줄(崔明茁)[1909~?]은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졸업한 후 마산 어시장 점원으로 일하였다. 1929년 2월 마산 청년 동맹 집행 위원이 되고, 8월 마산 자유 노동 조합 검사 위원, 마산 노동 연맹 교육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1930년 3월 신간회 마산 지회 서무부원, 마산 자유 노조 정치 문화 부원, 6월 경...
-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현대시인. 최명학은 1966년 강원도 홍천군 상록중학교 재학 당시 소설가 전상국을 만나 문학에 뜻을 지니게 되었다. 1973년 2월 육군 보병 전역 후 가족들(어머니, 누나)과 함께 마산으로 이주하여 수출자유지역 근로자로 취업하였다. 문학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으로 습작 활동을 계속해 오던 최명학은 수출자유지역 근로자들의 문학동호...
-
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최범술(崔凡述)[1904~1979]은 1916년 경상남도 다솔사(多率寺)로 출가하였다. 1919년 3월 해인사(海印寺) 지방 학림(地方學林)에 재학 중이던 최범술은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 유학 중이던 최원형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 받고 동지들과 함께 만여 매를 인쇄하여 합천, 의령, 진주, 사천 등 지역...
-
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봉선(崔鳳仙)[1904~1996]은 1919년 3월 21일 마산 의신 학교(義信學校) 재학 중 김남준, 이수학, 안음전 등과 함께 결사단을 조직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독립 만세 운동에 필요한 태극기와 격문 등을 자신의 집에서 제작하였다. 그는 3월 21일, 의신 학교, 창신 학교(昌信學校) 학생들과 구마산(舊馬山) 장터...
-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세권(崔世權)[1901~1939]은 1919년 4월 11일 창원군 천가면 가덕도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1919년 3월 말 경 서울에 다녀 온 양흥석(梁興錫)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김동원(金東洹), 이상운(李相云), 조용진(趙鏞晉) 등과 뜻을 모아 천가면에서 4월 11일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에서 대동 상회를 운영했던 객주·중매인. 최수동[?~?]은 수협과 기선권현망의 중매인 패를 함께 가지고 대동 상회를 운영하였다. 멸치가 주요품목이었지만 생물과 건어물도 동시에 취급했다. 그는 당시 멸치 19만㎏~22만㎏ 정도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를 갖고, 건어물을 취급하는 서기 3명, 생물을 취급하는 서기 5명을 두고 있었다. 이외에도...
-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기업인. 최우열(崔祐烈)[1918~1975]은 1947년 불로 장유[구 복정 장유]를 창업하여 대표로 활동하였다. 불로 장유는 육군 군수품 납품 지정 공장이 되었다. 또한 미국 식품 의약 관리청[FDA] 공인을 취득하였다. 최우열은 1954년에는 구산 중학교를 설립하여 국가에 기증하였다. 마산 상공 회의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제...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화가. 최운(崔雲)[1921~1989]의 본명은 최용운(崔龍雲)이다. 주로 ‘게’를 소재로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다. 중국 북경 중산 미술 학교에서 3년 동안 수학하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59년에 흑마회전에 출품하고, 1962년에 재마 미술회전에 출품하는 등 11번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창원 남면 중학교[현 창원 남고등학교...
-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기업인·경제인·육영사업가. 최재형(崔載衡)[1919~1982]은 마산 상업학교를 졸업, 금융 조합 서기로 시작 유원 산업, 대선 소주, 유원 원료, 유원 건설, 남방 개발 사장, 마산 상공 회의소 회장, 경남 은행 감사를 지냈다. 일제 시대에 번성했던 마산의 주류 산업을 계승하되, 주정 회사를 만들어 마산의 주류 산업이 일본인이 즐...
-
창원시 마산 지역의 기업인·정치가. 최찬열(崔贊烈)[1902~1990]은 경남 연탄 대표로 기업인으로 활동하면서 대한 곡물 협회 이사, 경남 에너지 창립 회장, 한국 연료 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정치에 관심을 두고 마산시 의원으로 출마하여 초대 마산시 의회 의원이 되었고 이후 1952년 마산 시의회 의장을 지냈다....
-
창원시 진해구 웅동과 용원 등지에서 마을 주민을 위해 일한 유지. 최태원(崔太元)[1902~1975]은 웅동 면의원, 어업 조합장 등을 지냈다.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에는 최태원의 생전에 마을 사람들이 세운 덕행을 기리는 송덕비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마을을 위하여 용재교 가설, 교문 개축, 동도로 하수구 시설, 보안등 시설 등을 하였다 한다. 최태원은 일생 동...
-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해도(崔海都)[1910~1954]는 1930년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에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느끼고 스스로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최해도는 평소에도 투철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국치 20주년을 맞아 주민들에게 1930년 8~9월경에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고, 식민 통치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결심하...
-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무용가. 활동사항] 최현(崔賢)[1929~2002]의 본명은 최윤찬(崔潤燦)으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소년 가수로 가극단에서 일하다가, 초청 강사로 온 무용가 김해랑의 눈에 띄었다. 1946년 5월 마산의 김해랑 무용 연구소에 입소하여 전통 춤을 섭렵했고, 피난 와 있던 박용호로부터 현대 무용을 배웠다. 마산 상업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대...
-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경제인. 최희열(崔熙烈)[1912~1976]은 마산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67년 고려 대학교 경영 대학원 연수 과정을 수료하였다. 제일 은행 부장, 제일 화재 해상 보험 상무, 서울 은행 상무이사, 1970년 초대 경남 은행 은행장을 지냈다. 이때 경남 은행은 마산시 창동에서 직원 54명으로 출발하였다....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상곡리에 있는 마을. 상곡 마을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상곡리를 말한다. 삼한 시대에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의 하나인 골포국 혹은 칠포국에 속했던 지역이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굴자군[676년]에 속했다가 경덕왕 때인 757년에 의안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금주[현 김해시]에 속했다가 1274년(충렬왕 8)...
-
경상남도 창원시 삼동동에 있는 6·25 전쟁에서 숨진 호국 영령의 충혼탑. 경상남도청이 부산광역시에 있을 당시 6·25 전쟁 때 낙동강 전선에서 전사한 호국 영령을 용두산 공원에 모시었다가, 1983년 경상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함에 따라 함께 모시기 위하여 1984년 4월 26일 충혼탑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985년 6월 6일 제30회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출신의 독립 운동가·공산주의 운동가. 팽삼진(彭三辰)[1902~1944]은 1919년 3·1 운동 때 마산 장터에서 시위를 주도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개월간 복역하였다.[독립유공자 공훈자료와 『매일신보』[1919.5.22.]에는 6개월을 복역하였다고 한다.] 1923년 6월 보안법 위반자들의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조직된 의성계(義誠契) 간사...
-
1918년 간행된 경상남도 창원 출신 황덕길의 문집. 황덕길(黃德吉)[1750~1827]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자는 이길(耳吉), 호는 하려(下廬)이다. 안정복의 문인으로 이황·정구·허목·이익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15세~16세에 제자백가의 문을 익혔고 스승으로부터 위기(爲己)를 배워 일상생활의 윤리로부터 성명(性命)·이기(理氣)의 근원까지 깊이...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지역에 1960년 4·19 혁명 후 만들어진 영세 중립화 통일 운동 단체. 1960년 4·19혁명 이후 한국 영세 중립화 통일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김문갑이 위원장이 되고, 부위원장은 김성립·김형문, 기획실장은 김해용이 맡았다. 이 위원회의 주요 인물들은 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의 마산시 책임자였다. 위원회는 1960년 11월 6일 마산시 자산...
-
1960년 4·19 혁명 이후 사회 개혁을 위해 마산 지역에 만들어진 단체. 이승만 독재 체제가 무너짐에 따라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사회적 변혁, 남북통일 운동 등과 같은 민족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설립되었다. 혁신 세력의 정치 활동 참여를 주장하면서 사회대중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7월 29일 총선거에서 정치적인 진출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60년 4월 30일 부...
-
창원시 마산 출신의 기업가·정치인. 한태일(韓泰日)[1909~1995]은 마산 공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였다. 고려 모직 주식회사 사장으로 기업 활동을 하였고 대명 모방직 주식회사의 사장을 맡기도 하였다. 기업인으로의 위상으로 인하여 1957년부터 1967년까지 마산 상공 회의소 활동을 하면서 회장을 지냈다. 또한 마산 공업 중고등학...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황산동에 있는 근대 일본식 주택. 해군 제독 관사의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일본군이 진해에 주둔하기 시작한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건축한 것으로 보인다. 건축물 관리 대장의 사용 승인 년도가 1938년인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건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해군 제독 관사는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황산동 2...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 지역에서 창설되어 특히 상륙 작전에 큰 역할을 수행하는 군부대.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기 때문에 수륙 양면 작전의 필요성이 높아‚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상륙 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를 창설하였다. 그 뒤 1949년 5월 5일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고, 당시 초대 사령관 신현준 중령 휘하 380명은 해군에...
-
6·25 전쟁이 발발하자 진해 지역에 있던 해군 사관학교 생도들을 인근의 창원 상남 지역으로 파견한 사건. 6·25 전쟁의 상황이 악화되어 북한군이 마산 가까이까지 진격하여 오자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마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해에 있던 해군 사관학교 생도들이 전투에 투입되었다. 진해 군항 방위 사령부가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하였고, 그 계획에 따라 사관생도들은 1950년 7...
-
1932년에 마산 공립 보통 학교(馬山公立普通學校)에서 제작한 마산의 도시 지도. 「향토의 교통도[鄕土の交通圖]」가 제작된 1932년은 한국인들이 거주한 마산포[원마산]와 일본인들이 거주한 신마산이 도시 연담화(都市連擔化)[Conurbation: 중소 도시 시가지가 서로 붙어 거대 도시를 이룸]되던 시기다. 1920년대 벽두에 조선 회사령이 철폐되자 일본인들은 기업을 앞...
-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경상남도 창원 지역 역사. 현대라 함은 역사학의 시대구분 가운데 사상(思想)이나 그 밖의 것이 현재와 같다고 생각되는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동양사에서는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서양사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현대라고 말한다. 1976년 창원 지역을 관...
-
마산 신인회의 구성원이 중심이 되어 1923년 8월 새롭게 조직한 사상 단체. 사회주의 사상의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 한 주에 한 차례 모임을 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혜성사는 1923년 8월 조직되었고 1924년 8월 5일에 사각 동맹과 함께 ‘마산 공산 청년회’를 조직하였고, 1924년 8월 17일에 ‘마산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
일제 강점기 창원시 삼진 의거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홍두익(洪斗益)[1892~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三鎭)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삼진 의거는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古懸) 장날 만세 운동 때 일본 경찰을 피해 잠시 은신한 변상태, 권영대, 권태용 등이 계획하였다. 이들은 지방 유지들과 협의하여...
-
창원시 진해 출신의 정치인. 1928년 창원시 진해에서 태어나 2002년 세상을 떠났다. 마산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대학교 상과 대학을 졸업하였다. 황낙주(黃珞周)[1928~2002]는 진해 서여자 중학교 교장 및 이사장을 지냈다. 1972년 제 8대 신민당 국회의원이 되었고, 1973년 제 9대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원내 총무를 맡았다. 1985...
-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현대시인. 황선하는 1964년 2월 마산대학[현재 경남대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박두진 시인에 의해 시 「벽(壁)」(1955년), 「거울」(1958년), 「밤」(1962년) 등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 후 방창갑·박재두·고연규·김상력·이상개·배기현 등과 진해시 문학회를 조직하고 모임을 주도하였고 한국예술문...
-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정치인. 황은환(黃銀煥)[1924~2002]은 동아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뒤 고등고시 사법과, 행정과에 합격하여 부산 지방 검찰청 마산 지청의 검사, 서울 지방 검찰청 검사 등을 지낸 뒤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정치에 입문하여 신민당 경남 제 1지구당 위원장을 맡았고 신민당 정책 심의회 법제·내무 분과 위원장을 맡았다. 1971년...
-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황태익(黃泰益)[1877~1953]은 1919년 3월 28일 경상남도 창원 진동면 고현 장날 만세 운동과 4월 3일의 삼진 의거를 주도하였다. 그는 거사 전에 변우범을 찾아가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고 그와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황태익은 변상태와 함께 진전면 일암리에서 시위 군중 1,500여 명을...